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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집 제34권 / 행장(行狀) / 통훈대부 행 정주목사 오계 조공 행장 계축년(1913) 〔通訓大夫行定州牧使梧溪曺公行狀 癸丑〕
曺挺立 | 1583 | 1660 | 昌寧 | 以正 | 梧溪 |
공의 휘는 정립(挺立)이고 자는 이정(以正)이다.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선계가 신라 태사(太師) 휘 계룡(繼龍)에서 나왔다. 고려 태조 때 휘 겸(謙)은 벼슬이 대악승(大樂丞)이었고,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다. 그 뒤에 평장사(平章事)가 된 분이 여덟이었고, 후손들이 계속 벼슬이 혁혁하였다. 휘 계형(繼衡)에 이르러 연산군과 중종의 즈음에 당하여 벼슬이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이 분이 휘 언홍(彥弘)을 낳았으니 부사과(副司果)를 지냈고, 이 분이 휘 몽길(夢吉)을 낳았으니 목사(牧使)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휘 응인(應仁)을 낳았으니 유림의 명망이 있었고 벼슬은 대구 부사(大丘府使)를 지냈으며, 호는 도촌(陶村)이다. 부사공은 전의 이씨(全義李氏) 군자감정 증 승지(軍資監正贈承旨) 득분(得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계미년(1583) 8월 8일에 합천(陜川)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7, 8세 때부터 기국과 도량이 이미 이루어졌다. 겨우 관례를 하였을 무렵에 종숙부 이재(頤齋) 선생 우인(友仁)에게 수업하여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문예(文藝)가 고원하고 통달하였고 시에 더욱 뛰어났다. 약관(弱冠)의 나이 때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고, 을사년(1605, 선조38)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기유년(1609, 광해군1) 증광시에 등과하여 명성이 크게 드러나 처음에는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청요직을 역임하여 양사(兩司)에 있을 때는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헌납(獻納)ㆍ장령(掌令)을 역임하였고,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있을 때는 설서(說書)ㆍ사서(司書)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을 역임하였으며, 관직(館職)에 있을 때는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겸지제교(兼知製敎)를 역임하였는데, 있는 곳마다 모두 직분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계축년(1613, 광해군5)이후부터 조정의 의론이 서로 갈라지고 국시(國是)가 어그러지고 뒤섞여 식견 있는 사대부들 중 사당(邪黨)에 들어 이상한 의론을 주장하는 이가 많았으나 공과 부사(府使)였던 아우 정생(挺生)은 오직 바른 사람에게 의귀하였다.
정사년(1617, 광해군9) 겨울에 흉측한 의론이 일어나 대비(大妃)를 유폐시키려고 도모하자, 공은 헌납(獻納)이 되어 사간(司諫) 남이준(南以俊)과 지평(持平) 김호(金昈)ㆍ정양윤(鄭良胤)과 함께 일시에 상소하였는데, 광해군이 매우 노하여 불충으로 논하고 모두 외직에 임명하라고 명하여 공은 나가 북청 판관(北靑判官)이 되었다. 무오년(1618, 광해군10) 가을에 북청에서의 치적이 뛰어난 것으로 서북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을 맡게 되었다. 광해군은 여전히 이전의 노여움을 품어 네 사람을 모두 남쪽 지방으로 옮겨 임명하였는데, 공은 영해 현령(盈海縣令)이 되었다. 부사공(府使公)이 당시 대구부(大丘府)를 맡고 있었는데, 위적(僞賊)을 잡지 못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 부사공은 야정(倻鄭)과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일찍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뒤에 그가 이첨(爾瞻)에게 매수된 것을 보고 바로 투서하기를, “근래 광창(廣昌)이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소인입니다. 또 어찌 몸이 산림에 있으면서 권신과 결탁하여 능히 끝까지 좋은 이름을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빨리 그와 절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인홍의 자질(子姪)들이 그 편지를 이첨에게 보여 주었는데, 이첨은 실로 이미 앙심을 품게 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역조(逆造)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이첨의 뜻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다. 마침 위적(僞賊) 박치의(朴致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혹자가 “치의가 대구의 팔공산에 숨었다.”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인하여 일부러 치의를 놓아주었다고 무함하여 부사공을 옥에 갇히도록 하였는데, 반 년 만에 풀려났다. 정인홍의 자질들이 다시 편지로 이첨을 부추겨 말하기를, “반드시 조모(曺某) 부자(父子)를 제거한 뒤에야 영남 선비들의 의론을 한데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사공은 이로부터 배척당하여 등용되지 못하였고, 공은 영덕(盈德)에 6년이나 있으면서도 소환되지 않았으니, 대개 간당(姦黨)들이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反正)하고서야 체직되어 돌아왔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부사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이로부터 10여 년을 집에서 지냈다.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도성에 쳐들어오자 공은 난리를 듣고 왕사에 근로하였다. 다음해 봄에 도성에 이르러 비로소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고 이어서 평양 서윤(平壤庶尹)에 제수되었다. 평양 고을은 오랑캐에게 처음으로 병화를 겪어 공사 간이 텅 비게 되었는데, 공은 수고로움을 다하여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니, 일 년이 되지 않아 옛날처럼 안정되고 창고에도 쌓인 것이 있게 되었다. 당시에 서로(西路)에 일이 많아 공문이 번잡하였는데, 순찰사가 번거롭고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맡기니, 공은 판단하여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였다. 평양부에 한 명의 사형수가 있어 이미 무복(誣服)하여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공은 그가 원통하다고 의심하여 집행을 늦추었다가 마침내 실제 범인을 찾아내어 무고가 밝혀지니, 방백(方伯) 이하들이 모두 신통하게 여겼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신들이 왕래하며 명성에 대하여 서로 말하였다. 5년의 임기가 다 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었다. 이윽고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갔는데, 당시에 조정에서는 품계를 올려 중용하려고 하여 비변사(備邊司)에서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의망하였으나 명이 내려오기 전에 곧 체직되어 돌아왔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담양 부사(潭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에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나가게 되어 길이 평양을 경유하였는데, 온 경내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다투어 맞이하고 전송하여 수 백 리에 공장(供帳)이 이어졌다. 정주에 있을 때 한결같이 평양을 다스릴 때와 같이 하여 지방관에 대한 평가가 일대에서 최고였다. 임기가 끝났으나 그대로 일 년을 더 머물렀는데, 두 고을 사람들이 모두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통례(通禮)로써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며 금봉(金鳳)의 시냇가에 별장을 정하였으니 연하(煙霞)와 천석(泉石)이 있는 승경이었다. 좋은 봄날이나 맑은 가을날이면 은자(隱者)의 차림으로 시냇물을 따라 오르내렸다. 때로 흥이 이르면 여러 명사들과 약속하여 경내의 여러 승지를 찾아 도착하여서는 편안하게 시를 읊조리니, 산 속 스님이나 시골 촌로들은 그가 벼슬하였던 사람인 줄 몰랐다.
공은 어려서 질병이 많았는데 섭양(攝養)에 방도가 있어 만년에 건강을 회복하였다. 연세가 80에 가까웠는데도 총명함이 여전하였고, 밤 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종일 단정히 앉았으니 남들은 권태로운 기색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병이 위독했을 때도 정신이 또렷하여 자제들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것이 한결같이 평소와 같았다. 돌아가신 것은 실제로 현종(顯宗) 원년 경자년(1660) 9월 17일이었으니, 향년 78세였다. 그해 12월 3일 거창(居昌)의 견암산(見巖山) 자좌(子坐) 등성에 장사 지냈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현감을 지낸 양(瀁)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매우 있었고, 공보다 33년 앞서 돌아가셨다.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로는 장남 시량(時亮)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차남 시윤(時胤)은 양자로 나갔다. 딸로는 장녀는 수사(水使) 이민발(李敏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사인(士人) 이전(李瑑)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사인 김시(金蓍)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繼配)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참판에 증직된 덕민(德民)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부(主簿) 시적(時迪)ㆍ주부 시매(時邁)ㆍ통덕랑(通德郞) 시건(時建)이고, 딸은 이민행(李敏行)과 조두우(趙斗佑)에게 출가하였다. 후배(后配)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시열(時說)과 시방(時䢍)이다.
시량(時亮)의 두 아들은 하전(夏全)과 하현(夏賢)이고, 여섯 딸은 하준(河濬)ㆍ이탁(李桌)ㆍ김동필(金東弼)ㆍ이성호(李聖虎)ㆍ여용화(呂用和)ㆍ조태윤(趙泰胤)에게 출가하였다. 시윤(時胤)의 두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를 지낸 하경(夏卿)과 진사를 지낸 하형(夏亨)이고, 한 딸은 이상일(李相一)에게 출가하였다. 시적(時迪)의 세 아들은 무과에 합격한 하명(夏明)과 하징(夏徵)ㆍ하빈(夏彬)이다. 시매(時邁)의 한 아들은 하진(夏振)이다. 시건(時建)의 세 아들은 하영(夏英)ㆍ하근(夏根)ㆍ하귀(夏龜)이다. 시열(時說)의 두 아들은 하서(夏瑞)ㆍ하성(夏聖)이다. 시방(時䢍)의 한 아들은 하식(夏植)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어질며, 기국이 넓고 중후하였다. 마음가짐은 충성스럽고 두터워 남과 경계를 두지 않았고, 몸가짐은 겸손하고 삼가 하여 스스로 모나게 행동하지 않았다. 행동거지는 반드시 주도면밀하고 자세하였으며, 말씨는 편안하고 고요하였다. 일을 도모함에는 반드시 그 끝을 궁구하였고, 말을 할 때는 반드시 그 행실을 돌아보았다. 부모를 섬김에는 기뻐하는 안색과 부드러운 용모로 부모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힘써 곁에서 종일 모심에 게으른 기색이나 거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형제간에 있어서는 애정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많은 것을 나누고 적은 것을 보태어 줄 때 이해를 따지지 않았다. 더욱이 조상을 섬기는데 삼가하여 제수를 마련할 때 반드시 친히 주관하여 정결하게 하였고,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사당에 올렸다. 속절(俗節)에는 반드시 묘소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팔순의 나이에 가까워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향사에는 질병이 아니면 반드시 몸소 제사를 받들었다. 종족을 대할 때는 친인척 간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여러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었으며, 종들에게까지도 모두 환심을 얻었다.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함께 할 사람을 가리되 사생(死生)과 궁달(窮達) 때문에 조금도 변하는 것이 있지 않았다. 숙특(淑慝)과 향배(向背)의 사이에서는 비록 목소리와 안색을 크게 엄하게 한 적은 없었으나 정신이 통하고 기상이 합하는 사람은 모두 한 때의 선인(善人)과 군자(君子)들이었다.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을 때,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의론을 올린 것 때문에 이 고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한 번 만나보고는 평소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뻐하였고, 그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대부분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서 판서(徐判書) 성(渻)ㆍ김 판서(金判書) 시양(時讓)ㆍ심 판서(沈判書) 액(詻)ㆍ이 참판(李參判) 명준(命俊)이 영덕(盈德)과 영해(寧海) 등으로 귀양 왔는데, 공이 영덕 수령으로 있을 때 종유하며 담론하면서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그리고 심상(沈相) 일송공(一松公)이 일찍이 부사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아드님의 지론(持論)이 공평하고 바르니, 축하드릴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향리에 있을 때에는 아(雅)와 속(俗) 사이에 잃은 것이 없었고, 늙은이를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였으며, 선을 행하는 사람을 가상하게 여기고 능하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겼다. 길흉과 환란에는 구제함에 방도가 있었고, 빈객의 왕래에는 응접함에 마땅함이 있었다. 재능이나 처지, 나이나 지위로 남에게 더하지 않았고, 사물을 접하고 처리할 때에는 너그럽고 공평함을 힘써 따랐다. 혹 따르는 것에 눈이 멀어 논의가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곡진하게 비유하고 깨우쳐 대도에 이르도록 하였다.
유도(儒道)의 중요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마음을 두어 자임하였다.
남계서원(蘫溪書院)은 유현(儒賢)을 제향하는 곳인데, 갑론을박의 논란이 있어 영남 우도의 선비들이 무리를 나누고 이견을 세워 동계(桐溪)를 헐뜯고 배척하는 자가 생기는 지경이었는데, 공은 동계를 부호(扶護)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덕천서원(德川書院)도 옛날에 또한 대립해 서로 공격하는 일이 있어서 전후로 원장과 장의(掌議)가 된 이들은 대부분 배척당하였는데, 공이 원장이 되어서는 과격하지도 추수하지도 않아 조절하여 진정시키니, 무리들이 따라서 안정되었다. 의령(宜寧)의
덕곡서원(德谷書院)과 합천(陜川)의
이연서원(伊淵書院)은 모두 대현(大賢)을 제향하는 곳인데, 여러 가지 일들을 처음 시작하여 기해년(1599, 선조32) 봄에야 비로소 승격을 청하여 국학(國學)이 되었으니, 공의 노력이 많았다.
평소 배우는 사람들을 만나 가르칠 때 문 앞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였다. 혹 가난하여 능히 오래 머물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입히고 먹여 주어 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하였는데, 뒤에 문명(文名)을 떨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아, 공은 시례(詩禮)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걸출한 자질을 가져서 문학과 정사 둘 다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다. 벼슬길이 이미 열리고 나서 임금의 계책을 윤색하고 조정의 책략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겨우 한 고을 수령을 맡겼으니 진실로 그 재능과 학식을 펼치기에 부족하였던 것이 바로 첫 번째 불행이었고, 광해군을 섬기고 간사한 재상과 가까이 하여 약유(若濡)의 노여움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 두 번째 불행이었다. 그리고 몇 대 뒤에 종사(宗嗣)가 엎어지고 끊어지는 화가 있게 되니 후대에 문호를 유지 못한다는 경계가 되었다. 그러나 도촌공(陶村公)은 이미 스스로 야하인(倻下人)과 길을 달리 하였고, 이재공(頤齋公)은 서궁(西宮)의 변고 때 시안(詩案)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공은 아버지와 스승에게 일찍 전수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흉론(凶論)에 항거하다가 외직으로 배척당하게 되었고, 권간(權姦)을 거슬러 화기(禍機)를 밟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쾌쾌(夬夬)는 허물이 없다는 것은 실로 이미 날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공은 동계(桐溪) 문간공(文簡公)에게 대해 나이가 형으로 섬길 입장이었으나 마음은 스승으로 사모하였다. 그 출처의 의론은 성세(聲勢)가 서로 의지하였기 때문에 선공의 장례에 동계가 실제로 묘갈명(墓碣銘)을 지었고, 공이 동계에 대하여 칭술한 것은 대개 동계를 북두 이남에 한 사람 밖에 없다고 하였다. 영남 우도의 제현들이 용산(龍山)에서 수계(修稧)할 때에는 한 때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다 모였으니, 지금 그 계안(稧案)이 갖추어 있다. 그런데 공과 동계만 유독 이름을 적지 않고 선생이라고 적었으니, 당시 사론(士論)이 추중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불행이라는 것은 혹 사람에 달렸고 혹 하늘에 달렸기에, 공이 반드시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또한 동계도 능히 면하지 못했던 것이니,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처음 공이 돌아가셨을 때 맏아들 군수공(郡守公)이 벌써 공의 사행(事行) 한 통을 기록해 두었는데, 후손 계달(啓達)과 석형(錫衡) 씨가 그것을 가지고 긍섭에게 보이며, “행장을 지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긍섭은 다 읽고 일어나 “이것 자체로 행장이 되기에 충분하니 거듭 행장을 지을 것이 없고, 또 못난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두 군이 “비록 그러하더라도 실로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긍섭은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그 원본을 살펴 위와 같이 기술하면서 감히 한 마디도 꾸미지 못하였고, 또 마음에 느낀 점을 붙여 훗날 병필가(秉筆家)들이 살피기를 기다린다.
[주-D001] 8일 : 저본에는 ‘팔(八)’ 자가 없으나, 《오계집(梧溪集)》 권6 부록의 조긍섭이 지은 〈행장〉에 의거 번역하였다.[주-D002] 겨우 …… 무렵 : 《오계집》 권6에 실려 있는 조긍섭의 〈행장〉에는 ‘관(丱)’ 자로 되어 있고, 조정립(曺挺立)의 아들 조시량(曺時亮)이 지은 〈가장(家狀)〉에는 ‘보성동(甫成童)’으로 되어 있다.[주-D003] 이재(頤齋) 선생 우인(友仁) : 조우인(曺友仁, 1561~1625)을 말한다. 자는 여익(汝益), 호는 이재(頤齋)ㆍ매호(梅湖)ㆍ청관(聽罐)ㆍ매악산인(梅岳山人)ㆍ현남(峴南),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88년(선조2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05년(선조38)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21년(광해군13)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이 황폐하고 폐허가 되어 있음을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筆禍)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인조의 등극으로 풀려나 상주(尙州)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이재집》이 있고, 가사집 《이재영언(頤齋詠言)》이 있다.[주-D004] 양사(兩司) :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한다.[주-D005] 관직(館職) : 홍문관 또는 성균관 직임의 총칭인데, 여기서는 홍문관을 말한다.[주-D006] 정생(挺生) : 조정생(曺挺生, 1589~?)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령(以寧), 호는 도곡(陶谷)ㆍ도계(陶溪)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에게 수학하였고, 벼슬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주-D007] 남이준(南以俊) : 1566~? 자는 사수(士秀),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1609년(광해군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614년 필선이 되어 아우 남이웅(南以雄)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주-D008] 김호(金昈) : 1584~1631. 자는 회보(晦甫),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10년(광해군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 겸설서를 거쳐 다음해 정언이 되었다. 옥당록에 오르고, 겸문학ㆍ지평을 지냈다.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의 절차를 맡지 않으려 하였다는 이유로 온성 판관(穩城判官)으로 좌천당하였다.[주-D009] 정양윤(鄭良胤) : 1589~? 자는 효원(孝元),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615년(광해군7) 식년시 을과 4위에 문과 급제하여 1616년(광해군8)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고 이후 사헌부 지평,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1618년(광해군10) 2월 정창연(鄭昌衍)의 폐모(廢母) 반대 주장에서 혐의를 피하려는 계책으로 상소하여 근친(覲親)을 청한 일로 고신과 관직을 빼앗겼다. 인조반정 이후는 폐모론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는 실세(失勢)하였다.[주-D010] 야정(倻鄭) :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을 말한다.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산림(山林)으로서 선조, 광해군 시대에 북인,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다. 인조반정 뒤에 참형되었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주-D011] 이첨(爾瞻) :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을 말한다. 자는 득여(得與),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다시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훗날 광창부원군(廣昌府原君)에 봉해졌다.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정인홍(鄭仁弘) 등과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다. 인조반정 뒤에 참형되었다.[주-D012] 광창(廣昌) : 광창부원군(廣昌府原君) 이이첨(李爾瞻)을 말한다.[주-D013] 역조(逆造) : 정조(鄭造, 1559~1623)를 말한다. 자는 시지(始之),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05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의 주구가 되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하였으나 박승종(朴承宗)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제기하여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적극 가담하였고, 다음해 부제학ㆍ대사성을 거쳐 1619년에는 대사간이 되었다. 1621년 형조 참판을 지내고, 1622년 부제학ㆍ동지의금부사로 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역전되면서 원흉으로 지목되어 1623년(인조1)에 사형되었다.[주-D014] 박치의(朴致毅) : 조선 중기의 유생으로,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이다. 박충간(朴忠侃)의 서자이다. 서자는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 있음에 불만을 품고 아우 치인(致仁)과 함께 명문의 서자들인 심우영(沈友英)ㆍ박응서(朴應犀)ㆍ서양갑(徐羊甲)ㆍ이경준(李耕俊)ㆍ김평손(金平孫) 등과 강변칠우ㆍ죽림칠우를 자처하여 여주의 북한강 근처에 무륜정(無倫亭)을 짓고 시주(詩酒)로 교유하다가, 1612년(광해군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 600~700냥을 약탈하였다. 이듬해 모두 체포되었으나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주-D015] 서로(西路) :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를 말한다.[주-D016] 무복(誣服) : 강제를 당하여 없는 죄를 있다고 자복(自服)함을 말한다.[주-D017] 밝혀지니 : 저본의 “자(自)”는 《심재집》 권29와 《오계집》 권6에 실려 있는 조긍섭의 〈행장〉에 “백(白)”으로 된 것에 의거 수정 번역하였다.[주-D018] 공장(供帳) : 잔치를 열 때 배설(排設)하는 장막, 용구, 음식 등을 말한다.[주-D019] 금봉(金鳳) :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에 있는 마을이다.[주-D020] 여러 : 저본의 ‘청(淸)’은 《심재집》 권29와 《오계집》 권6에 실려 있는 조긍섭의 〈행장〉에 ‘제(諸)’로 된 것에 의거 수정 번역하였다.[주-D021] 속절(俗節) : 절기나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즉 정조(正朝),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동지(冬至), 납일(臘日) 등의 속절(俗節)에 사당이나 선영(先塋)에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주-D022]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 :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말한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ㆍ필운(弼雲)ㆍ동강(東岡),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임진왜란 때 병조 판서를 지내면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좌의정ㆍ영의정을 지냈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오성대감으로 불렸다. 저서로는 《백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주-D023] 의론을 …… 있었는데 : 이항복(李恒福)이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던 것을 말한다.[주-D024] 한 번 만나보고는 : 조정립이 인목대비 폐출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5품 외관직인 함경도 북청 판관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북청에 귀양 가 있던 백사 이항복에게 1613년 계축옥사 때 이항복을 탄핵할 것을 주장한 데 대해 사과하였던 일이 있었다.[주-D025] 만사를 지어 애도하였는데 : 《오계집(梧溪集)》 권2에 〈백사 이 상공에 대한 만사〔白沙李相公挽詞〕〉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와 광해조에 많은 이들 재상에 앉았지만, 명공이 최고로 걸출하다 손꼽겠네. 국가 동량 존재하니 큰 절개를 알겠고, 재상이나 장수로도 뛰어난 재주 보였네. 영원한 의리 취해 몸은 낙엽처럼 가벼웠고, 걱정으로 한번 병이 걸리자 경괴 먹는 꿈 꾸었네. 동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찍 알진 못했으나, 가시는 길 애도하니 슬픔이 가득하네.〔兩朝多少坐司台, 獨數明公最傑魁. 國棟樑存知大節, 山東西出見全才. 千年取重身輕葉, 一病緣憂夢食瑰. 生長東南曾不識, 湘流一弔有餘哀.〕”[주-D026] 서 판서(徐判書) 성(渻) : 서성(徐渻, 1558~1631)을 말한다.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본관은 대구(大邱)이다.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현손이고, 이이(李珥)ㆍ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이인기(李麟奇), 이호민(李好閔), 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주-D027] 김 판서(金判書) 시양(時讓) :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을 말한다.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仲), 호는 하담(荷潭),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병조 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와 사도도체찰사를 겸했다. 척화를 주장하다 영월에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 《부계기문(涪溪記聞)》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주-D028] 심 판서(沈判書) 액(詻) : 심액(沈詻, 1571~1654)을 말한다. 자는 중경(重卿), 호는 학계(鶴溪),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이듬해에 설서(說書)ㆍ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98년(선조31)에 경성부판관에 이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644년(인조22) 도승지ㆍ대사헌 등을 지냈다. 1647년(인조25) 형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청송군(靑松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의헌(懿憲)이다. 저본의 “낙(洛)”은 《심재집》 권29와 《오계집》 권6에 실려 있는 조긍섭의 〈행장〉에 “액(詻)”으로 된 것에 의거 수정하였다.[주-D029] 이 참판(李參判) 명준(命俊) : 이명준(李命俊, 1572~1630)을 말한다.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ㆍ진사재(進思齋),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1603년(선조36) 정시(庭試)에 합격하고, 형조 좌랑ㆍ병조 정랑ㆍ서원 현감(西原縣監)ㆍ평양 서윤(平壤庶尹)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 때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1644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잠와유고(潛窩遺稿)》가 있다.[주-D030] 심상(沈相) 일송공(一松公) : 심희수(沈喜壽, 1548~1622)를 말한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ㆍ사재(思齋)ㆍ수뢰누인(水雷累人)이다. 우의정ㆍ좌의정을 지냈고 청백리에 뽑혔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는 《일송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주-D031] 동계(桐溪) :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자는 휘원(輝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척화를 주장했다가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모리(某里)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32] 덕천서원(德川書院) :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을 제향한 서원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다. 1576년(선조9)에 창건되었고, 1609년(광해군1)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주-D033] 조절하여 : 저본의 “주(賙)”는 《심재집》 권29와 《오계집》 권6에 실려 있는 조긍섭의 〈행장〉에 “조(調)”로 된 것에 의거 수정 번역하였다.[주-D034] 덕곡서원(德谷書院)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제향한 서원이다.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에 있다. 1660년(헌종1)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뒤 복원되지 못하다가 4칸의 서당만 중건했다.[주-D035] 이연서원(伊淵書院) :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제향한 서원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매암리에 있다. 1587년(선조20)에 창건되었으며, 1660년(현종1)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주-D036] 약유(若濡)의 노여움 : 소인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더러움에 젖는 듯이 여겨 노여워하고 미워하는 기색이 있음을 말한다. 《주역》 〈쾌괘(夬卦) 구삼(九三)〉에 “광대뼈에 건장하여 흉함이 있고, 홀로 가면 비를 만나니, 군자는 결단함을 쾌하게 한다. 젖는 듯이 여겨 노여워함이 있으면 허물이 없으리라.〔壯于頄, 有凶, 君子夬夬, 獨行遇雨, 若濡有慍, 无咎.〕”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주-D037] 야하인(倻下人) : 정인홍(鄭仁弘, 1535~1623)으로,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이다. 산림(山林)으로서 선조, 광해군 시대에 북인,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다. 인조반정 뒤에 참형되었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주-D038] 서궁(西宮)의 변고 :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된 것을 말한다.[주-D039] 시안(詩案)에 …… 뻔하였다 : 조우인(曺友仁)이 필화(筆禍)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렀던 것을 말한다.[주-D040] 쾌쾌(夬夬)는 …… 것 : 《주역》 〈쾌괘(夬卦) 구오(九五)〉에 “현륙을 끊듯이 결단하면 바른 도에 허물이 없다.〔莧陸夬夬, 中行, 无咎.〕”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41] 동계(桐溪) 문간공(文簡公) :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이다. 병자호란 때 이조 참판으로서 척화를 주장했다가 이듬해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모리(某里)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42] 나이가 …… 입장이었으나 : 정온(鄭蘊)과 조정립(曺挺立)의 나이 차이가 14세이다.[주-D043] 선공의 …… 지었고 : 《도촌선생실기(陶村先生實記)》 권2에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실려 있다.[주-D044] 공이 …… 하였다 : 《오계집(梧溪集)》 권3에 〈동계 정공에 대한 제문〔祭桐溪鄭公文〕〉에 상세하다. 북두 이남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뜻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곤경에 처한 어떤 사람을 대신하여 어려운 사신의 일을 자청하고 나서자, 인인기(藺仁基)가 “우리 적공의 어진 덕성으로 말하면, 북두 이남에서 오직 한 사람 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狄公之賢, 北斗以南, 一人而已.〕”라고 칭송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주-D045] 맏아들 …… 두었는데 : 조정립(曺挺立)의 장자 조시량(曺時亮)이 지은 〈가장(家狀)〉을 말하는데, 《오계집(梧溪集)》 권6에 실려 있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남춘우 (역) | 2015
姜大遂 | 1591 | 1658 | 姜大進 | 晉州 | 學顏, 勉哉 | 寒沙, 秋磵, 秋澗 |
암서집(巖棲集) 조긍섭(曺兢燮)생년1873년(고종 10)몰년1933년자중근(仲謹)호암서(巖棲), 심재(深齋)본관창녕(昌寧)초명인섭(麟燮)초자노견(魯見)특기사항문박(文樸),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교유
巖棲先生文集卷之三十四 / 行狀 / 通訓大夫行定州牧使梧溪曺公行狀 癸丑
曺挺立 | 1583 | 1660 | 昌寧 | 以正 | 梧溪 |
公諱挺立字以正。昌寧之曺。系出新羅太師諱繼龍。麗太祖時有諱謙官大樂丞。尙公主。其後有爲平章事者八。後仍蟬赫。至諱繼衡。當燕山中廟之際。官至戶曹參判。是生諱彥弘副司果。是生諱夢吉牧使贈左承旨。是生諱應仁。有儒林望。官至大丘府使號陶村。娶全義李氏軍資監正贈承旨得蕡之女。以萬曆癸未八月日。生公于陜川里第。公生有異質。承襲庭訓。自髫齔器度已成。甫冠受業于從叔頤正先生友仁。涉獵經史。文藝超達。尤長於詩。弱冠屢捷鄕解。中乙巳司馬。登己酉增廣第。聲華大發。初除成均舘學諭。自是歷剔淸要。在兩司則正言持平獻納掌令。春妨則說書司書文學弼善。舘職則修撰校理兼知製敎。所居咸稱職。然自癸丑以後。朝論携貳。國是顚錯。士大夫有識者多與邪黨立異。公與弟府使挺生。惟正人之爲歸。丁巳冬凶論起。謀幽廢大妃。公爲獻納。與司諫南以俊,持平金昈,鄭良胤一時抗䟽。光海盛怒。論以不忠。幷命補外。公出爲北靑判官。戊午秋。以北聳遞西北文官守令。光海猶蓄前怒。四人者皆徙補南邊。而公得盈海縣令。府使公時知大丘府。有僞賊失捕事。始府使公與倻鄭同郡居。盖嘗師事之。後見其爲爾瞻所賣。卽投書曰近觀廣昌所爲。眞是小人。且焉有身處山林而締結權要。能卒保令名者乎。不如早與之絶。鄭之子姪以其書示爾瞻。爾瞻固已心銜之。己未逆造按嶺南。希爾瞻旨欲甘心焉。適有僞賊朴致毅者。或言致毅匿大丘之公山。因羅織以故縱致毅。逮繫府使公王獄。半年乃得解。鄭之子姪復以書嗾爾瞻曰必去曺某父子。然後南中士論可一也。府使公自是擯不用。而公在盈德六年不召還。盖姦黨不欲其立朝也。癸亥改玉遞歸。甲子丁府使公憂。自後家居十餘年。丙子冬北虜入都。公聞亂勤王。明年春至都下。始拜工曹佐郞。旋除平壤庶尹。州道於虜初經兵火。公私赤立。公焦勞撫集。未期按堵如故。府庫有儲。時西路多事。簡書旁午。巡察使有煩劇難理者。必以屬公。公剖析悉當理。府有一死獄囚。已誣服當刑。公疑其寃緩之。竟得正犯誣者。自方伯以下皆神之。由是使盖往來。譽聞交道。居五歲秩滿。入爲軍資監正。旣而出牧星州。時朝廷欲遷秩重用之。備局爲擬萊伯。命未下尋遞還。乙酉拜潭陽府使不赴。明年除軍器寺正。未幾出牧定州。路由平壤。闔境父老迎送恐後。數百里供帳相望。在定一如所以治平壤者。報政爲一路最。準瓜期仍任一年。兩府人皆立石思之。己丑以通禮拜密陽府使。亦不赴。自是歸臥田里。占一墅金鳳川上。有煙霞泉石之勝。每春姸秋朗。角巾杖屨。沿流上下。有時興到。約諸名流。搜歷境內淸勝。至則盤礴吟咏。山僧野老。不知其爲官人也。公少多疾病。攝養有方。晩復康健。年迫大耋。而聦明不衰。夜寐夙興。終日端坐。人未見有倦意。及疾革。神精了了。囑子弟後事一如平昔。乃沒。實顯宗元年庚子九月十七日也。享年七十八。以其年十二月三日。葬于居昌見巖山子坐之原。夫人安東權氏縣監瀁之女。甚有婦德。先公三十三年沒。生二男三女。男長時亮文科郡守。次時胤出后。女長適水使李敏發。次適士人李瑑。次適士人金蓍。繼配慶州金氏贈參判德民之女。生三男二女。男時迪主簿,時邁主簿,時建通德郞。女適李敏行。次適趙斗佑。后配坡平尹氏。二男時說,時䢍。時亮二男夏全,夏賢。六女河濬,李
,金東弼,李聖虎,呂用和,趙泰胤。時胤二男夏卿文科府使,夏亨進士。一女李相一。時迪三男夏明武科,夏徵,夏彬。時邁一男夏振。時建三男夏英,夏根,夏龜。時說二男夏瑞,夏聖。時䢍一男夏植。曾玄以下不能盡錄。公天賦純仁。器宇弘重。宅心以忠厚而不設畦畛。持己以謙謹而不爲崖岸。動止必周詳。辭氣必安靜。慮事必究厥終。出言必顧其行。事父母愉色婉容。務得怡悅。侍側終日。未甞有惰氣慢辭。處兄弟情愛篤至。分多潤寡。不校利害。尤謹報本。膳具必親視致潔。有新物必薦。俗節必上墓展謁。至耄耋不懈。大小祀享。匪疾病必躬奠獻。待族黨婣睦無間。御羣下恩威兼施。以至臧獲皆得其歡心。取友必擇所與。不以死生窮達有少改。於淑慝向背之間。雖未甞太厲聲色。而所與神輸氣入者。皆一時善人君子。其在北靑也。白沙李相公以獻議謫居是府。一見歡若平生。其卒也爲詩文以哀之。多人所不敢言者。徐判書渻,金判書時讓,沈判書洛,李參判命俊。編管盈寧等地。公之宰盈也。從遊談論。情好甚密。而沈相一松公甞致書府使公曰令胤持論平正可賀也。其在鄕曲。雅俗無所失。老老而幼幼。嘉善而矜不能。吉凶患難。賙濟有方。賓客往來。接應有宜。不以才地年位加諸人。接物處事。務從寬平。或有昧於所從論議乖剌者。必委曲譬曉。使底大道。
至於斯文重事。加意自任。
蘫溪書院俎豆儒賢。而有甲乙之閙。嶺右士類分朋立異。至有詆斥桐溪者。公扶護洞老。終始不貳。
德川院舊亦有角立相攻之事。前後爲長貳者多被排擯。公爲洞主則不激不隨。以賙鎭之。衆隨以定。宜之
德谷。陜之
伊淵。皆大賢妥靈之所。庶事草創。至己亥春。始得請陞爲國學。公之力爲多焉。
平居接引學者。戶屨常滿而敎誘不倦。老而冞篤。或有貧不能久留者。爲衣食之。使得卒業。後以文名占科第者甚多。嗚乎。公生詩禮之家。負魁偉之材。文學政事。兩有具美。進塗旣闢。若可以潤色王猷。裨贊廟略。區區百里之寄。誠未足以展其器業。乃一不幸而事昏朝比憸相。不能無若濡之慍。再不幸而數世之後。宗嗣有覆絶之禍。爲後來門戶之戒。然陶村公旣自貳於倻下人。而頤齋公當西宮之變。坐詩案幾死。公於父師。早有所受之。故能抗凶論而至斥外。忤權姦蹈禍機而不悔。則其夬夬之无咎。固已不俟終日矣。公於桐溪文簡公齒後。兄事而心師慕之。其出處論議。聲勢相倚。故先公之葬。桐溪實爲之銘。而公之稱述桐溪則盖以爲斗南一人矣。至嶺右諸賢修稧於龍山。盡一時之選。今其案具在。而公與桐溪獨不名。書以先生。當時士論之歸重。卽此可見矣。若其所謂二不幸者。或係於人。或係於天。非公之所能必免。亦桐溪之所不能免也。於公何有哉。始公之沒。而胤子郡守公業已錄公事行一通。後孫啓達,錫衡氏。持以示兢燮曰願有以善狀之也。兢燮讀卒業而作曰。此自足狀。無用疊狀。且眇劣之所不敢也。二君曰雖然固以請。兢燮辭之不得。則謹案其本而撰次之如右。不敢有一辭之華。且附所感於心者。以俟他日秉簡者攷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