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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9 / ‘주는 자’의 복을 받자 (행 20:31-35)
남태평양 한복판에는 타히티에 속한 핏캐인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1790년에 타히티에서 반란을 일으킨 죄수들을 진압하면서 그중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 섬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때 죄수들이 섬에 들어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술을 만드는 일이었으며 이후 섬은 온갖 방탕한 생활과 폭력이 난무하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남자라곤 자기 혼자 남게 된 사람이 옛날 짐을 정리하다가 낡은 성경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읽기 시작한 그는 성경 말씀을 통해 극적으로 변화되면서 섬 주민들을 전도하여 성경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지금은 도둑이나 폭력이 없고 술도 없는 섬이 되었으며 주민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온 섬이 주일성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누가 될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앞서의 예화에서도 보듯 누가 알았겠습니까? 유배지에 격리된 죄인을 통해 섬 하나가 통째로 낙원으로 변화될지를.
이렇듯 하나님은 택한 자를 들어 복음이 세상 곳곳에 전파되게 하시는데 예수님 승천 이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책의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했고 후반부에는 사도 바울이 주도한 이방 선교와 관련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해야 하는 상대로만 인식하고 있던 때였는지라 바울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 유대인으로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음은 물론이고 이방 선교를 하는 바울을 방해하고 핍박까지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의 큰 박해와 환란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이방 교회들을 돌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모아 지원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요즘 식대로 가정해 볼 때 예루살렘 교회를 본교회로 친다면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들은 선교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본교회가 후원하고 지원해서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는 거꾸로 선교지가 본교회를 후원하고 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 전도에 도움을 주긴커녕 방해하고 핍박만 했던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그리했습니다.
오늘 본문만 봐도 본문은 그간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하기 위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했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부분인데, 3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35절에서는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그간 많은 교회가 이 구절만 떼어서 헌금을 독려하거나 심지어는 헌금을 강제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상 바울은 그런 의도에서 이 말씀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시 35절을 보면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인 것을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내 마음이 내키고 안 내키고를 떠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이 복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본문을 보며 헌금을 많이 해야 복을 받을 거라든지 나는 헌금을 많이 못 하니 복이 별로 없다는 식으로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무엇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고,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어떤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라도 순종하려고 함으로써 그 이후에 있을 복을 소망하라는 게 바울의 권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라고 하시는 것이나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들을 순종하기만 하면 복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3절에서도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던 겁니다.
성경은 읽는 것만으로도 복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우선은 성경 말씀부터 읽고 들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하여 여러분이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지키려고 한다면 잘 지켰든 잘 못 지켰든 결과에 상관 없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지키려고 했다는 그 마음과 믿음만으로도 복을 주십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바울이 헌금과 관련하여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한 주된 주제는 단지 헌금을 해야 한다든가, 구제나 선행을 베풀라는 정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너희는 순종하려고 하는 자가 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방 교회 입장에서 그간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에게 보인 행태들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할 이유가 없다거나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는 멸시 외에는 받은 것이 없다고만 하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만 순종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마태복음 10:8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을 하셨기에 예루살렘을 위해 헌금하는 것을 후원한다든지 돕는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주는 자가 되려는 마음에서 행함으로써 그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려고 하라는 것이 본문의 바울 설교의 핵심입니다.
결국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은 ‘너희가 주는 자가 될 때 너희에게 복이 있게 된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의 복의 개념에 있어서의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풀어 쓰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가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는 자가 되기만 하면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결과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나의 안 되는 걸 되게, 나의 없는 걸 있게, 또한 나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실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복이 있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진정 우리에게 있어야 할 복이 아니겠는지요?
그러자니 그런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는 자’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라면 무엇보다 신앙생활에서부터 성공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믿음에서 이긴 자만이 세상에서도 이기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아직 세상을 이긴 자가 되지 못하였다 함은 내가 아직 믿음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이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찬송가 357장 후렴을 보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라고 했습니다.
이 찬송가대로 언제 어떤 순간에서도 ‘주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 이기는 것이고, 이렇게 우리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요한복음 16:33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것처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도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려면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부터 듣고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일례로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 여사는 링컨이 어렸을 때부터 거의 매일 성경을 읽어주었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실 때는 ‘링컨아! 매일 성경을 읽되, 어려운 때는 더욱 읽어라. 성경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뿐’인 것을 믿는 게 믿음입니다.
바울 역시도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33절로 34절 말씀을 보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기 위해 헌신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생이 자꾸 힘들어지고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노력했음에도 받는 것이 없다 보니 그럴 때가 많습니다. 간혹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해줬는데 그는 보답은커녕 안면을 몰수해 버립니다. 자주 나는 세상에서의 일에 정말 전심으로 수고했는데도 받은 걸 보면 세상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듯 주었는데 받은 것이 없게 되면 누구라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이며, 때론 괘씸한 마음까지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그럴 때면 여러분이라면 이 말씀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셨다!”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주는 것’이나 ‘받는 것’은 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기브 앤 테이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사람에게서 받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나 세상에게는 우리가 주는 자가 되기만 하면 받는 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 받는 것’에 있어서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이젠 ‘사람에게서 받는 것’과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받은 것이 적거나 없다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그럴 때가 오히려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을 발동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믿음은 내가 받은 것을 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을 헤아리는 것이 복 받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려도 어떤 분은 계속해서 줄 것이 없다고만 합니다.
아닙니다. 누구에게든 줄 것은 많습니다. 본문에서 헌금과 관련한 물질을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는 것이 꼭 물질이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려고만 하면 ‘신앙적으로는’ 복음을 전해 주거나 중보기도를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도 영혼을 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내가 복 받는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려고만 하면 ‘인간적으로는’ 위로를 해 줄 수도 있고 칭찬이나 용서를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도 그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은 성경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내가 복 받기 위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듯 일단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내 주위엔 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주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든 그 사람을 위해 당장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생각했으면 그 일을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복되다 하시는 ‘주는 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주는 자로서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고 하는 열심과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은 아주 예민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니까 잘 유의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복신앙’이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사실 그동안은 성도는 기복신앙을 가지면 안 된다고 배웠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엔 잘못된 기복 신앙을 피하라는 것이지 실상 기독교야말로 절대적으로 기복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이 모순 같지만, 진실을 알려면 이제부터라도 참되거나 혹은 잘못된 기복신앙이 각각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기복’이란 말 그대로 복을 기대한다거나 복을 기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대하고 기원하는 복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신앙이 ‘잘못된 기복신앙’이 될 수도 있고, ‘참된 기복신앙’일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유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재산 중에 최고의 재산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아들이 ‘땅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만일 전쟁이 나면 어떡할래?’라고 묻습니다.
아들이 ‘그러면 금은 어떻습니까?’라고 대답했더니 아버지는 ‘그것도 괜찮긴 하지만, 만일 강도가 그 금을 빼앗아 가면 어쩔 거냐?’고 하자 아들이 난감해하며 ‘그럼 이 세상에서 최고의 재산이 뭐냐’고 묻자,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산 중에 최고의 재산은 복이다. 복은 무겁지도 않고, 네가 가는 곳마다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 예화에서 아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잘못된 기복신앙'이고 아버지가 말한 것이 '참된 기복신앙'입니다.
아들은 최고의 재산으로 세상 것들을 꼽았지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재산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씀드린 복의 개념을 적용해서 보면 유대인 아버지가 최고의 재산으로 뽑은 ‘복’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기대하고 기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참된 기복신앙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나에게 있는 최고의 복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기에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자가 되는 것 역시도 그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주려는 상대가 불신자라면 그가 하나님을 믿어 그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게 하기 위해 그에게 복음을 주는 자가 되려고 해야 하며 상대가 신자라면 그에게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복이 있도록 그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여러분이 줄 수 있는 것을 내어 줄 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계기에 그 자리엔 당연히 복도 있게 되는 것이며 그 복 중엔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기적도 있게 되는 겁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습니까?
어린아이가 자기 도시락을 ‘제자들에게 주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또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기적도 베드로와 요한이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랬기에 누가복음 6:3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이젠 누군가를 위해 물질적인 것을 주는 자가 되려고 하는 욕심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자에게 필요한 물질의 복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해 영적인 것도 주는 자가 되려고 하는 욕심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자에게 필요한 영혼이 잘되는 복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당장은 나에게 물질적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주는 자가 될 수 있음을 알기 위해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주는 자가 되자’는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자.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주자.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주자.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자.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자.
이렇게, 여러분 모두도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무엇으로든 주는 자가 되려 하셔서 주는 자를 더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