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79) / 스페인
산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San Cristobal de La Laguna; 1999)
검은 윤곽선 사진 출처 : 오딧세이 모놀로그, SHADHA 2012.02.18 작성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 산타 크루스 데 테네리페 주[Province of Santa Cruz de Tenerife]에 속하는 산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는 스페인의 식민 도시 유적이다. 이곳은 두 중심지로 나뉘는데 비계획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어퍼타운(Upper Town)과 철학적 원칙에 따라 설계된 최초의 이상적 ‘도시-지역(city-territory)’인 로어타운(Lower Town)이다. 잘 뻗은 거리와 개방된 공간에는 16~18세기에 지은 아름다운 교회들과 공공건물, 개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역사 지구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최초의 요새화되지 않은 도시인데 항해를 기반으로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설계한 도면에 따라 건축되었다. 또한 1,000년 왕국의 종교적 개념에 따라 평화로운 사회의 새 질서를 만들자는 사상이 1500년에 고취되었고, 그 결과로 조직된 공간이 바로 산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라는 점에서 이곳은 ‘도시-지역’이라는 개념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요새화되지 않은 최초의 스페인 식민 도시로서 이곳의 도시 배치는 아메리카 식민 도시들의 모델이 되었다. 산크리스토발은 알폰소 페르난데스 데 루고(Alonso Fernandez de Lugo)에 의해 1497년에 건설되었다. 스페인이 정복한 최초의 해외 영토인 동시에 카나리아 제도에 세워진 마지막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는 얕은 호수 또는 습지라는 뜻의 ‘라 라구나(La Laguna)’에서 이름을 따왔고, 1837년에 얕은 습지의 물을 모두 뺐다. 최초의 식민지 거주자들은 대부분 군인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건물 부지가 할당되지 않았다. ‘요새화되지 않은 시가지’라는 말은 누구라도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공공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계획 없이 작은 집들이 라 콘셉시온(La Concepcion) 교회 주변의 어퍼타운에 위태로운 상태로 들어섰다. 그런 와중에 1502년 총사령관인 총독이 정식으로 그의 관저와 교회 사이 지역의 도시 설계도를 제작했다. 비로소 마을의 건축은 제도의 규제를 받게 되었다. 설계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구상한 이몰라(Imola) 시의 도시 계획도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는데 폭이 넓은 주요 도로 칼레 레알(calles reales)이 공공 광장과 연결되고 좁은 길들이 서로 겹쳐지는 격자 배치를 띠도록 되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로어타운은 섬의 지배층들을 끌어들였고, 16세기 초 수도원 공동체들은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빠르게 커졌다.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로스 레메디오스 교회[Church of Nuestra Senora de los Remedios; 1511], 산 미겔의 은신처[the Hermitage of San Miguel; 1506], 산 세바스티안 병원[Hospitals of San Sebastian; 1506], 로스 돌로레스(Los Dolores; 1515) 병원이 그 예이다. 1521년에 마을 의회인 카빌도(Cabildo)에서 비용을 대면서 상수관이 설치됐으며, 1525년 최초의 공공건물들이 들어섰다. 마을은 1514년부터 공식적인 도시로서의 지위를 갖고자 했으나 1531년에 와서야 비로소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마을의 주민 수가 6,000명에 이르고 규모 또한 카나리아 제도의 마을들 중에서 가장 커지자 1554년에 마을 의회는 짚으로 지은 모든 건물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산크리스토발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로서 주도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당시 지어진 건물들의 모습에서 과거에 이 도시가 누렸던 번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정치・종교・경제의 중심이 점차 산타크루스(Santa Cruz)로 옮겨 가면서 산크리스토발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808년에 이곳에 카나리아 제도의 최고 평의회[Junta Suprema]가 설립되면서 산크리스토발은 짧은 기간 동안 정치적인 부활을 맞는 듯했다. 하지만 5년 후 최고 평의회가 산타 크루스데 테네리페에 있는 주 의회[Diputacion Provincial]와 불화를 빚고 해체되면서 짧았던 부활의 시간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20세기에 산크리스토발은 과거의 역할을 어느 정도 회복했는데 이곳에 있는 대학교의 명성 덕분이었다. 산크리스토발은 1497년에 세워진 어퍼타운인 빌라 데 아리바(Villa de Arriba)와 1502년에 세워진 로어타운인 빌라 데 아바호(Villa de Abajo)로 나뉜다. 주요 도로인 칼레 데 라 카레라(Calle de la Carrera)는 첫 번째 교구 교회와 델 아델란타도 광장[Plaza del Adelantado]을 이어 주면서 계획 도시의 축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기하학적 중심 역할을 하는 칼레 데 산 아구스틴(Calle de San Agustin)이 카레라 도로와 나란히 놓여 있고, 이 도로를 따라 초기 상인들이 지은 대저택들이 늘어서 있다. 도로는 무데하르(Mudejar) 양식으로 지어진 많은 광장들로 이어진다. 콘셉시온(Conception)에게 헌정된 최초의 교회는 붕괴되었다가 1511년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이 교회는 여러 양식들이 혼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구조들[탑과 세례장], 양쪽으로 통로가 있는 회중석, 예배당 등의 모습들이 교회가 거쳐 온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 인근에는 산 아구스틴(San Agustin) 수도원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16세기 초에 건설된 이 수도원은 아름다운 2층 회랑을 갖고 있다. 총사령관은 로스 레메디오스(Los Remedios)에게 헌정된 교구 교회를 1515년에 짓는 것을 시작으로 로어타운 개발에 집중했다. 로스 레메디오스 교회는 통로가 하나인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었으며, 17세기에 탑이 추가로 세워졌다. 1813년에 새로운 테네리페(Tenerife) 주교 교구가 설정됐는데 로스 레메디오스 교회가 이 교구의 교회가 되었다. 20세기 초에는 3개의 통로와 부속 예배당들을 포함해서 광범위한 교회 건물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산타 카탈리나 데 시에나(Santa Catalina de Siena) 도미니크회 수녀원은 1611년에 문을 열었다. 그 후 영향력이 매우 커진 수녀원은 인근의 많은 건물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수녀원의 외관은 소박하고 검소하지만 내부 장식은 매우 호화롭다. 자그마한 산 미겔 소성당[Ermita de San Miguel]은 설립 후 안타깝게 쇠락했지만 나중에 문화센터로 복원되었다. 산타클라라 수녀원은 1697년에 화재로 파손되었는데 화재 후 남아 있는 건물들 역시 비슷하게 문화센터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마을엔 아름다운 개인 저택들이 많이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은 카사 델 코레히도르(Casa del Corregidor)인데 처음 지어졌을 당시 그대로의 모습인 것은 붉은 돌로 마감된 건물 정면 뿐이다. 카사 델 레르카로(Casa de Lercaro)는 멋진 마니에리슴 외관을 하고 있으며, 현재 테네리페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사 데 알바라도 브라카몬테(Casa de Alvarado Bracamonte; 1624~1631)는 19세기까지 역대 총독의 사무실과 관저로 쓰였다. 붙임기둥이 있는 붉은색 석대 대문과 주철 발코니, 부서진 페디먼트(pediment)가 남아 있는 이 건물은 현재 시가 지정한 역사・예술 유산 구역에 속한다. 카사 데 살라자르(Casa de Salazar)는 1682년에 세워졌다. 이 건물의 아름다운 정문은 바로크 양식을 기본으로 마니에리슴과 신고전주의 요소가 가미된 절충적인 양식으로 지어졌다. 카세 데 오수나(Casa de Ossuna)는 정면 1층에 긴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산크리스토발의 거대한 문서 보관소로 이용되고 있다. 18세기에 세워진 건물들 중에는 현재 카나리아 자치 정부의 관사로 쓰이는 카사 데 몬타네스(Casa de Montanes)가 있다. 또한 1767년 카나리아 제도에서 축출되기 전까지 예수회가 사용한 L자형 구조의 카사 데 로스 헤수이타스(Casa de los Jesuitas)도 18세기에 지어졌다. 카사 데 라 알온디가(Casa de la Alhondiga)는 18세기 초에 옥수수 시장으로 지어졌다. 19세기 초에 이 건물은 프랑스군의 막사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지방 법원으로 쓰이고 있다. 이 도시에는 20세기 건축물도 상당수 있다.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로드리게스 데 아세로(Rodriguez de Azero) 궁과 레알(Leal) 극장 같은 건물들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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