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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1
근무처 앞산 , 구릉지 정도라 달리 산 이름은 없다. 하지만 땅꾼들에게는 이 산은 명산으로 통한다. 뱀이 득실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봄이면 진지를 길목에 구축하고 모기장 같은 그물망을 걸쳐 놓던 곳이다. 그러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녀석들은 기어나오다가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꼼짝없이 잡히는 신세가 되곤 했다. 막히면 돌아서면 될 것을 녀석들은 멍청하기 이를데 없다.
이는 뱀의 귀소본능을 이용한 포획작전이다. 수사망에 걸려든 범인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고향땅에서 붙잡히곤 한다. 이 또한 귀소본능이다. 인간에게도 연어같이 귀소본능이 있다. 때가 되면 인간들은 자신의 정든 품 속으로 향한다. 마이카 시대인 지금도 명절이면 민족대이동이 벌어지지만 그 시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1960년 서울역 압사사고, 1975년 용산역 귀성객 압사사고가 이를 반증한다.
당시 이동수단이라고 해야 기차 아니면 생긴지 얼마 안된 고속버스가 전부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명절이 수학여행이다. 문득 그 시절의 수학여행이 떠오른다. 하필 그 무렵 연거푸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많은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10월 14일 현충사에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서울 경서중학교 3학년 학생 77여 명을 태운 전세버스가 모산역 북쪽에위치한 이내 건널목을 지나던 중 서울발 장항행 열차에 버스 왼쪽을 들이받았다.
차는 약 80여 미터 가량 밀려가면서 연료통이 폭발, 불길에 휩싸여 학생 45명과 운전기사가 그자리에서 숨지고 3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2명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3일 후 인창고교 2학년 학생(430명)과 보인상고(185명) 및 보성여고(110명) 등의 서울 시내 3개 고등학교 학생과 교사를 태우고 청량리역을 떠나 제천역으로 가던 6량 단위의 제 77호 보통열차가 원주역을 통과한 지 얼마 안 되어 사고가 또 발생했다.
석탄과 목재를 싣고 가던 화물열차와 충돌하여 학생 10명과 인창고교 교감 및 교사 2명, 동행 사진사 1명 등 14명이 사망하고 5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일 전에 발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 때문에 문교부에서 "모든 수학여행은 열차로 이동하라" 는 지시를 내린 바로 뒷날에 발생한 참사였으며 이 참사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수학여행 자체가 금지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고가 나 수학여행을 말리던 때인데 그래도 우리는 71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사건은 그시대만 있었던 게 아니다. 2000년 7월 14일 오후 2시 45분경에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 추풍령 고갯길에서 부산 부일 외국어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을 태운 버스 2대와 고속버스 1대, 5톤 트럭 1대, 승용차 3대 등 8대가 연쇄추돌하여 총 18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했다.
지금도 울화가 치밀고 속이 타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2014년 4월 16일 아침, 진도 앞바다에서 안산단원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을 실은 여객선이 침몰하였다. 이 학생들 중 이 백명이 넘게 어린학생들이 희생 되었고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놀러갈 때라든지 명절같이 마음이 들뜰 때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것만 같다.
이동수단이 턱없이 부족하고 가는 길이 고달파도 우리는 명절이면 꼭 고향을 향했다. 이 전통은 한국, 중국(춘절)의 독특한 문화로 80년대 이후 ‘민족 대이동’이란 표현까지 등장한다. 서울역에 귀성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하여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던 그 시절 ,경찰의 호각소리와 휘젓는 긴 장대의 흐름에 맞춰 아이를 안은 아줌마, 선물꾸러미를 든 사내, 허술한 중년 아저씨, 공장 노동자 같은 처녀 ... 가릴 것 없이 광장에 모여 앉았다 섰다를 반복해 가며 인간물결을 만들었다.
전라선 임시열차 매표출구를 향한 진땀나는 전진은 그렇게 거듭되었다. 그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많은 인파들, 인간의 집을 향하는 집착은 본능과도 같다. 삶은 필시 어디론가 향하는 바람이 아닐까.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정처 없이 떠돌아도 고달픈 행로는 끝내 어느 정점을 향한다. 공간을 메우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는 존재들. 인간은 연어 같은 회귀성 동물임에 틀림이 없다.
귀성 열기는 혹한의 날씨에도 설 명절의 귀성 인파를 막을 수 없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한 귀성객들은 고속버스로 몰리고 그것도 구하지 못한 손님들을 위하여 개인 승합차들이 비싼 요금을 받고 불법(?) 운송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IMF를 겪던 시절에는 한동안 귀성행렬이 주춤하기도 했다. 회사가 부도나고 직장에서 해고되니 고향에 돌아갈 형편도 면목도 없었으리라.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에는 출세한 자식이 좋은 자동차를 몰고 내려오면 그 자체로 이미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곤 하였다.
그런 우리의 설은 두개다. 양력설은 1896년 1월 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을 받아들여 새해 1월 1일을 설날이라고 공식화 했다. 그러나 일제를 거쳐 해방된 이후까지 음력설은 행정적인 억압을 받아야만 했다. 이중과세에 따른 낭비를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조상 전래의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정부가 양력설을 공휴일로 지정, 단일과세를 시행했으며 1981년 12월에는 국무총리 지시를 통해 모든 공직자들에게 구정과세를 금지시켰다.
이 같은 정부지시에도 불구하고 매년 음력설에는 고향으로 가는 귀성객들이 서울역과 버스정류장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그러다가 1977년 수출이 100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정부가 국가적 축제를 준비하면서 여론을 조사한 결과 두 가지 금기(禁忌)를 풀어달라는 민심이 나타났다. 하나는 음력설을 명절로 지정, 휴무토록 해달라는 민심이고 또 하나는 쌀 막걸리를 허용해 달라는 민심이었다.
당시 수출입국에 총력을 투입하고 있던 박정희 정부는 양력설 3일 휴무 외에 음력설까지 공휴일로 지정하면 수출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불허했다. 쌀 막걸리는 식량부족 시대에 쌀수입 비용이 너무 무거우니 고구마나 옥수수로 빚어 마시도록 강요했었다.이 같은 절실한 민원 두 가지를 국무회의마저 결단하지 못했다. 혼식과 분식을 권장하던 시절 쌀 막걸리나 구정 휴무는 통치권 차원에 속했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무회의가 결단을 못 내린 채 청와대로 올려 박 대통령이 구정은 ‘민속의 날’로 정해 3일간 휴무하되 수출공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이 100% 귀환토록 각 수출공단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또 쌀 막걸리는 수출 100억불 달성 기념을 하루만 허용한다는 조건이었다. 참 대단한 박통이었다. 그 시절 귀성을 한 근로자가 다시 안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고향에 다시 주저 앉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동네친구들을 만나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이 음력설 공휴일 지정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1985년에는 ‘민속의 날’로 지정, 하루만 쉬게 했다. 그 뒤 음력설이 설날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되찾은 것은 1989년이며 3일간 휴무도 이때부터 시행됐다.
음력설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의 명절이자 조상을 모시는 날이며 어른들까지 세배(歲拜) 올리는 날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및 경제개발 시대의 수난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최고의 명절이니 앞으로는 더 이상 시비와 논란을 겪지 말아야 한다.고향(故鄕)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며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피는 것’이 바로 귀성(歸省)으로 흔히들 이쯤을 대목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래떡을 뽑는다고 방앗간에 큰 다라이를 순서대로 늘여 놓았고 장터는 미어터지도록 몰려들어 대목준비에 바빴으며 미장원 이발소 목욕탕 가릴 것없이 사람들이 쏟아져 어디고 분주했다.까치 설날이 지나면 바로 때때옷을 입는 설날이다. 동구밖에는 벌써 어른들이 서성이고 윳놀이, 널뛰기, 팽이돌리기에 고스톱까지. 라디오 방송은 고향을 향하는 릴레이 방송을 하였는데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떠 붐비는 곳을 알려주고 나훈아의 고향역, 홍세민의 흙에 살리라, 오기택의 고향무정은 단골메뉴로 흘러 나왔다. 어느 때는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가족이 화장실에 간 줄도 모르고 차가 출발해버리는 상황도 발생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니 연락할 방법이 없어 공개 스튜디오에서 '○○○씨,아내분을 △△휴게소에 두고가셨습니다. 같은 방향 고속버스 기사님께 부탁해서 태워 보내드릴테니 다음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계세요'라고 방송을 하기도 했다. " 조율시이, 홍동백서 상차림, 많은 가지수를 챙겨 준 조상님이 아이들은 당연 고마운 노릇으로 동네 강아지들도 맛있는 냄새에 취해 이리뛰고 저리 뛰고 누구든 이 명절때문 사는 것같이 짜증을 부리지도 않고 그때만은 마냥 즐거운 나날이었다.
명절 2
명절맞이로 귀경을 서둘러 떠난 직장이 모처럼 한가하다. 퇴근 정시보단 조금 이른 때 거리로 나왔다. 가볼 곳이 있어서다. 누가 그곳을 들리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 이 무렵엔 꼭 찾게 된다. 기실 그제도 곳을 다녀왔으니 오늘 또 가기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곳을 가지 않아서는 왠지 찜찜하다. 생각해보니 무릇 그 시절 이 맘 때 찾던 그 습성이 나를 잡아끄는 것일 터 이 또한 명절의 한 풍습이라 해두어야 할 것이다.
역시 생각한 대로 곳은 엄청 붐빈다. 오늘 같은 대목은 근래에 드문 일이다. 찜질방이 생기고선 할일이 없어져 곳이 객쩍다 하였는데 모처럼 신바람이 난다. 해를 넘기기 전 묵은 때를 벗겨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나와 똑같이 하는 모양이다. 내 살던 곳 안양은 시내 편에 목욕탕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일요일 아침 9시경이면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거의 없었다.
기름보일러가 없던 시절이라 나무나 조개탄을 이용했을 터인데 11시가 넘으면 벌써 물이 식어 온탕 밸브 가지고 아저씨들은 승강이를 했다. 때 구정물은 욕조에 배서 손으로 만지면 벽에 달라붙은 묵은 때가 둥둥 물살을 탔다. 실밥 터지면 꿰매서 쓰던 이태리타월 손 주머니가 그 당시 막 나오던 무렵이다. 나는 그곳을 어느 정도 커서 그것도 겨울철에만 갈 수 있었는데 그 붐비는 겨울철의 목욕탕에 숨 쉴 틈 없이 꽉 들어차던 때가 바로 명절 무렵이었다.
겨우 자리 잡은 좁은 터에 아버지와 아들이 등을 서로 밀어주는 정겨운 풍경을 많이 보았다. 나 역시도 명절 때는 어김없이 아버지하고 꼭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명절 때 곳에 서면 묵은 때를 벗겨주던 팔 힘이 무척 셌던 아버지가 소상하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손힘이 얼마나 셌는지 앙상한 갈비뼈를 밀 때면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참다못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면 아버지는 밀린 때를 내보이며 더욱 세차게 밀어대곤 하였다. 그런 아버지는 때를 다 밀고 나면 으레 등짝을 한 대 후려쳐 다 되었음을 알렸다.
그쯤은 두 아들이 아버지 등을 밀 차례다. 두 아들이 힘을 합하여 아무리 세게 밀어도 아버지는 꿈쩍을 하지 않았었다. 힘들인 목욕을 그렇게 하고나면 목이 마르고 몸이 축 처지고 만다. 곳을 나와 우리가 꼭 들리던 곳이 바로 길 옆 호떡집이다. 어쩌면 그것 때문 우리 형제는 아버지와 목욕탕을 가려 한 것인지 모른다. 아버지는 흑설탕 진한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호떡을 사주며 먼저 집에 가라고 하고는 옆집에 달라붙은 이발소로 향하곤 하였는데 동생과 나는 가지 않고 이발소 창가를 기웃하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동생 감기 걸리게 한다고 역정은 내셨지만 표정은 전혀 화가 난 모습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삼베과자를 사주신 것을 봐서도 아버진 화는커녕 또 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갖았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아버지와 목욕을 한 기억이 없다. 나이 들어 아버지가 병색이 완연하여 당신이 제대로 닦지 못 할 무렵 너 댓 번 그것도 집에서 목욕을 해드린 것이 전부다. 그 시절에도 존재 했을 아버지 엉덩이에 붙은 큰 점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추운 겨울 철 그것도 명절 무렵에 목욕을 같이 한 것이 고작인 셈이다.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던 그 따스한 기억도 아릿한 지금 내 머리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이 묵은 때를 말끔히 벗고 조상을 뵈어야한다는 의식이다. 당시만 해도 욕조에 거뭇한 때가 그득하였으며 깨끗이 벗겨내야 한다고 이태리타월로 피 멍이 들도록 몸 구석구석을 꼼꼼히 더듬었으니 묵은 때란 것이 보이는 형태로만 파악해두었을 것인데 그런데 어느 때 부터선가 나는 묵은 때를 단순 그렇게만 생각지를 않는다.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지는 지금의 세상엔 몸을 박박 문지르던 이태리타월도 자취를 감추었으며 묵은 때도 없다.
그럼에도 다들 이 맘 때면 묵은 때라도 벗겨낼 양 몰려들어 물에 몸을 담근다. 그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도 곳에 들러 묵은 때는 아니 나온다 하여도 묵은 것을 씻는다고 여긴다. 묵은 해를 보내는 때 묵은 때 또한 씻겨 보내는 것은 당연할 터 때는 아니 나오는데 평안한 마음이 되는 것만 같다. 이때쯤의 묵은 때란 새로움을 전제한 자성을 의미한다. 비바람에 젖어들며 야속한 세월을 박박 문대어 산다고 살고 보니 묵혀진 마음속에 헛되이 쌓여진 것은 정작 묵은 때가 아닌 허욕이었으며 정갈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갈수록 쌓이는 것이 묵은 때이고 늘어나는 것이 마음의 빚이다.
자식들을 앞세운 아버지 모습들이 오늘도 눈에 많이 띈다. 그들 또한 나처럼 묵은 때에 대하여 습관처럼 행하다가 어느 무형의 또 다른 느낌을 자연스레 언젠가는 갖게 되리라. 그 생각에 미치자 애들을 데리고 같이 올 것인데 하는 후회가 따른다. 시커먼 묵은 때처럼 나타나고 보이는 것에 급급하여 너무나도 드리없이 손쉽고 안일하고 편하게만 대하고 살았던 것도 같다.
명절은 어릴 적 마음으로서 느껴야 한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명절이다. 밝은 해가 집안에 아버지라고 한다면 포근한 달님은 어머니다. 달님이 꼭 채워질 때면 추석 명절이고 그믐 지나 새 달이 올라설 때는 희망의 설날이다. 인간의 출발점은 바로 고향이고 진정한 고향은 어머니로부터다. 어머니가 연상되지 않는 고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숙명의 위안과 회한은 어머니 곁에서 비로소 말끔해진다.
철부지 자식도 버림받은 몹쓸 사람도 그리움은 어머니로부터다. 그러기에 명절은 부산을 떨고 호들갑스럽게 맞이하는 날이 아니다. 명절날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가 TV에서 십 수 년 째 계속 이어졌었다. 아버지는 늘 그 채널을 아침시간 고정시켰었다. 그 프로를 모두 모여 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시간을 갖곤 하였다. 아버지는 그 프로를 보시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낸 그 다음 해 돌아가셨다.
이제 나는 그 전처럼 기차도 타지 않고 귀경을 아니 한다.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차표산다고 장대 얻어맞으며 몇 밤을 꼬박 새워도 좋으련만. 인간사 소망하는 뜻과 달리 흩어진 바람이 된다는 사실을 가슴 절절이 느끼는 때가 바로 지금 내 나이의 이 명절 때가 아닌가. 해 저물 녘 노을이 한해의 묵은 때를 모두 짊어진 양 길게 늘어지며 더디만 간다. 그렇게 한해가 묵은 때 밀리듯 올해도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