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바람 성령
제자들은 사람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지금 우리는 성령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 사람 예수님과 성령 예수님은 완전히 같은 분, 한 분이다. 성령님은 2천 년 전에 하시던 일 그리고 2천 년 동안 해오시던 똑같은 일을 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서 하기를 원하신다. 뜬구름 같은 성령님보다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그분을 따르기 쉬웠을 거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 제자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 즉 그 시대 최고 엘리트들이 보기에나 무식한 사람들이었지 실제로는 지금 우리들처럼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우리 같은 그들이 사람 예수님을, 그분과 수년 동안 함께 지냈는데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온전히 믿지 못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을 따르고 그분에게 순종함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도로 표지판처럼 한눈에 알아보고, 네비게이션 안내처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경은 성령을 숨 또는 바람에 비유한다. 예수님도 바람을 신비로운 존재로 여기셨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지금은 과학자들 연구 덕분에 이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어디로 불어가는지 다 아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내 얼굴을 스치며 어디론가 불어가고, 때로는 아주 거칠게 소용돌이로 땅의 것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모습은 여전히 신비롭게 보인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영혼이 자유로운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제멋대로 사는 거다.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방종한 이들이다. 하느님 뜻에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순종하는 게 바로 성령 바람을 따라 사는 거다. 나는 하느님께 순종함이 상식에 어긋나게 살고 또 그렇게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수긍하는 선한 삶을 살게 한다. 그런데 가끔은 상식을 뛰어넘는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수는 있을 거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런 삶을 예고하셨다. 그 시대 스승이라고 불리고 양심적인 니코데모도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느님은 우리 죄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특정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희생이고 완전한 사랑과 무한한 자비의 표현이다. 우리 하느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유대인 예수님은 그 조상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불 뱀 그리고 구리 뱀 사건을 상기시키며 당신의 봉헌과 우리의 삶을 설명하셨다. 광야에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자 모세에게 청해서 구리 뱀을 만들어 나무에 매달고 그 뱀에게 물렸을 때 그것을 바라보면 모두 낫고 살아났다.(민수 21,9) 그 모형 뱀은 그들을 죽게 한 것, 즉 죄다. 하느님을 거부하고 대들던 행동이다.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 몸이 바로 우리가 저지른 죄의 모습이다. 우리 영혼은 그 죄로, 하느님을 거부하면서 그렇게 처참하게 된다.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끝났다면, 그리고 나중에 그분이 구세주였다는 게 밝혀졌다면, 그 죄책감과 하느님을 살해했다는 두려움으로 차라리 죽는 게, 아니 죽으면 하느님을 봬야 하니까 그냥 먼지처럼 없어지는 게 좋다고 여겼을 거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제로 죽음으로써 우리 죄도 그분의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진 거다. 우리가 할 일이란 그것을 믿음뿐이다. 성령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로서 이보다 더 확실한 건 없다. 그것이 하느님이 진흙 인형에게 불어넣으신 그 숨을(창세 2,7) 잃지 않는 길이다.
예수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자 걸림돌입니다. 주님께 제 영혼을 맡기는 건 말뿐이지 실제로는 제 고집대로 합니다. 죽음과 부활의 길, 십자가의 길 앞에서 자주 우물쭈물합니다. 그러니 이 생각 저 생각 따져볼 게 아니라 저 자신을 버리는 게 훨씬 낫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소년 예수님을 안고 있는 그 손에 제 영혼을 맡깁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