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봄 날에 운부암을 다녀오다
운부암은 은해사의 부속암자이다.
운부암은 예로부터 고요한 절집으로 알려져 있다. 절터를 정할 때 성스러운 구름이 서려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종이 아닌 선불교 사찰의 분위기를 자아내는가 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분위기를 노래한 유방선의 시가 실려 있다.
홀로 찾은 운부사
선방 고요하여 마음 붙일 만 하네.
운부암에 가려면 은해사를 거쳐야 하지만 나는 은해사보다는 운부암을 다녀오고 싶었다. 예전에 여러번 찾았던 절이고,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나서 이다. 개울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걸었던 길은 험한 산행의 길이 아니었다. 은해사 앞에 있는 안내판에는 운부암까지의 거리가 3.5 km이다. 가고, 오는 거리가 우리 부부에게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계곡을 따라서 완만한 길이라지만 그래도 산길인데------, 집사람과 나는 예전의 인상들이 너무 강하게 떠올라서 다녀오기로 했다.
3월이 끝날 즈음이라 날씨도 많이 풀렸다. 까짓거, 쉬엄쉬엄 걸으면 다녀올 수 있으리라. 마음을 정했다. 대구에서 하양까지는 지하철과 버스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하양서 은해사까지는 택시로 갔다. 걸음을 줄이자면서 은해사는 들리지 않고, 운부사로 향해서 걸었다. 꽃샘 추위도 물러나서인지 봄날의 햇살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길에 깔려 있다. 지나는 길에는 소나무 숲도 있고, 저수지를 끼고 도는 수변로도 있다.
예전과 비교하여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어졌고, 시멘트로 포장도 되어 있다.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도 여럿이다. 모두 우리 부부보다는 젊은 사람이어서 앞지른다. 그 중의 한 부부는 저 만큼 앞질러 가다가도, 돌 위에 앉아 쉬고 있다. 쉬지 않고 걷는 우리의 뒤로 쳐진다. 저 부부는 토끼이고, 우린 거북이 이다 면서 집사람과 마주 보고 웃었다.
내가 운부암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에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가 쓴 ‘운부난야(雲浮蘭若)’라는 현판도 한 몫을 한다. 편액에는 계해년 한 겨울이라고 적혀 있어 1863년의 겨울에 썼다. 1860년(철종11년)에 암자가 화재로 소실하고, 응허와 침운 스님이 재건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절집을 중건하고 박규수가 현판을 써서 달았는 듯하다. 박규수가 이 절에 머문 데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고요하다는 뜻이다. 숲이나,들판,모래사막 등의 뜻이 있다. 박규수가 들렸을 때는 절의 분위기가 아주 고요함을 느꼈었나 보다.
박규수가 이 암자에 머문 것은 임술년에 일어난 선산의 민란과 관계있다. 박규수는 경상도 안핵사로 내려와서 경상도 북부지역이 그의 담당 구역이 되면서 경상감영에 머물렀다. 팔공산 북쪽 지역이 소요가 제일 심했다. 내가 구미에 머물 때 선산민란을 주도한 전범조라는 분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의 농민항쟁이 일어난 이유는 역사공부를 하면서 배워저 잘 안다. 선산의 주모자인 전범조라눈 분은 체포되어 대구로 끌려와서 참수 당했다. 지금의 현대 백화점 앞의 관덕정으로, 이곳은 그때의 사형장이었다. 최재우도, 많은 천주교 순교자, 그리고 전범조도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전범조를 붙잡아서 대구로 압송한 일을 박규수가 했다. 나는 전범조라는 분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므로 박규수가 왜 여기서 운부난야를 썼는지 짚어보곤 했다.
나는 임술민란의 자료를 뒤적이다 선산의 전범조라는 분에 흥미를 가졌다. 선산군 무을면 출신이고, 지금도 전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의 자료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무런 자료도 얻을 수 없었다. 선산의 향토사학자 분이 말해주었다. ‘후손을 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역 죄인의 후손은 도망울 가버리거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찾을 수가 없지요.’ 했다.
어쩌면 전범조의 비석 하나라도 세워드릴까 한 내 생각도 버렸다.
조선 말에 나라가 망할 때,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어서 이전투구로 싸웠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는 개화파는 좋은 정치꾼이고, 수구파는 나라를 망치게 한 나쁜 사람이라고 배웠다. 박규수는 당연히 개화파로 분류하였다.
임술민란의 현장에서 나라 사정을 직접 경험했고, 지위도 높은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을 하였는가. 일본은 이때 명치유신을 시작하였음을 생각하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는 개화나 수구나 같았다는 생각이다. 역사에서 ‘나쁨’과 ‘좋음’으로 편 가르는 일은 역사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규수만 하더라도 민란으로 들끓던 시대의 지도자로서, 이 나라에 어떤 도움이 되는 일을 하였을까. 일본이 명치 유신을 하던 시기의 우리 지도자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래서 조선 말의 정치꾼이라면 개화파든, 수구판든 나라를 말아먹은 나쁜 패거리로 본다.
절집을 찾는 목적을 내 마음 다스리기로 잡아놓고, 쓸데없는 망상으로 마음에 흙탕물만 일으킨다.
절 이야기나 마저 하자. 운부암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혜사의 산중암자이다. 711년(성덕왕 10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단다. 나는 믿지 않지만 절에서 말하는 자료이니 소개는 해야겠다. 조선 초 양식인 보살상이 출토되어서, 주불전에 모시고, 관음보살을 의미하는 ‘원통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그런데도 신라시대 불상이라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860년에 화재로 소실된 이야기는 앞에서 말했다. 예전의 신령각을 삼성당으로 크게 지은 것이 예전의 답사 때와 달라진 모습이다.
절을 오르는 옛 돌계단에 불이문의 현판을 단 작은 절문이 있다. 이 불이문은 고풍스런 분위기만 망치는 듯하여 보기가 좋지 않았다. 자료를 보니 2012년에 KBS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세트로 만들어 제운 것이라는데, 왜 아직까지 그 자리에 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요즘에 답사한 여러 절과 비교하여 절을 오르는 길을 차가 다니도록 넓히고, 포장한 것 외에는 비교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따뜻한 봄날이어서 절의 주변에는 고개를 내미는 어린 쑥이 많다. 집사람은 ‘쑥국에 좋겠다’며 쑥을 뜯는다. 예전에 절에 와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나무라며, 빨리내려가자고 재촉했는데------, 절에서 마련한 나무의자에 얹아서 기다리다 지루하여 절 입구에 서 있는 화강암 비석 앞으로 갔다. 자연석 그대로인 비석의 주름진 곳에 100원 짜리, 10원 짜리 동전이 불어 있다. 500원 짜리도 보인다.
나는 절집을 찾아 다니면서 절의 자리는 우리의 민중들이 소망을 빌던 토속 신앙터라는 믿음을 가진다. 예전에는 돌을 붙여두지 않았다. 갓바위에서도 예전에는 없었는데, 머리가 깨인 사람들이 더 많이 사는 요즘에 동전이 바위에 붙어 있는 것을 보니 한국사람의 바탕 정신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어릴 때 벌써 우리의 토속신앙은 미신이라면서 없애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렇게 살아 있으니.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이도록 붙잡아 주는 것은 불교가 아닌, 바로 이런 토속신앙이 아닐까. 그런데도 요즘의 정치바닥에서는 토속신앙을 미신이라면서 흝뜯는 소리로 요란하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무식쟁이로 생각한다.
집사람은 햇쑥이라면서 여전히 땅바닥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눈을 드니 산마루의 솦잎이 더 푸르러 진 듯하다. 구름 한 점 유유히 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