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떨어지는 이유
동백꽃은 왜 떨어지는가
돌아볼 새 없이 옹골지게 동백꽃 떨어진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 제 목을 쳐서 떨어진다
금상첨화의 꽃 따윈 허공에 진 빚으로 치부하는
저 개결한 습성이야말로 무명의 성질을 닮았다
목을 걸고 맹세한다는 말 해내겠다는 말
섭리를 뱉어내는 목, 몫으로 읽을 때의 목이다
동백꽃은 몫이 없는 목을 지녔다
아름다움을 추종하는 무리에 섭슬리지 않는 것
밟히면서 색깔이 번지는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읽는 것
그러니까 제 얼굴로 관(棺)을 짜는 것
그렇다면 다시, 동백꽃은 왜 떨어지는가
스스로를 꺾어 운구하는 저 행위를
나는 경첩을 떼어 낸 바람의 문짝으로 읽는다
저것은 배신보다 빠른 배신
저것은 죽음보다 앞선 죽음
그리하여 마침내 동백꽃은 왜 떨어졌는가,
내가 오늘 두 손 가득 들고 선 핏빛 동백꽃이 답이다
초연히 달궈지고 있는 내 무상(無常)의 심장이 동백의 말이다
여는 무대- 이혜성 플루트 연주자 : <별> / <숨어 우는 바람 소리>
색
사태가 났다
무너져 내린 단풍의 잔해로
욱수골 저수지 가는 길이 막혔다
붉은색이 엷어져 가는 세월이었다
당신과 나눈 말들이 몇 번 피고 졌는지
옹이로 갈라진 내 몸피를 보면 알 수 있을는지,
물의 냄새에는 여태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저장고의 시간은 묵은 화약처럼 푸슬푸슬 흘러내린다
저수지 가는 길, 검붉게 찍힌다
짙은 색들은 서로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계절이 만나는 둑길, 겹쳐진 색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방금 바람이 복원한 파랑을 내려다본다
경사진 마음에 희미한 목소리들이 찰랑거린다
내 몸의 낡은 색들이 물에 풀려 간다
시간은 색이다, 아주 오래 전
당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은 묽어져 갔다
내 몸이 그린 곳곳에 당신의 바탕색이 있었다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묻어나면서 나는 이제
채도와 명도가 너무 낮은 색,
어느덧 저수지에 또 다른 색이 어린다
무너져 내린 단풍이 여기까지 밀려온 것일까
거기 초록의 웃음 하나가 하얀 미소에 스며드는 걸
본다, 내가 물들었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내 온몸을 다 그려도 아깝지 않았던 색, 당신
욱수골 : 대구 시지 욱수동에 있다
혼자 밥 짓기
잘 고른다는 건 잘 버린다는 말이라는 거
계약직을 한 번이라도 해 보면 아는 사실입니다
버려진 기분이 위안을 받는 건 게으름은 자동갱신이라는 거. 목구멍은 평생계약이라 위아래 입술이 뭘 먹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도장을 찍어요
오일장이 좋은 이유는 슈퍼와 달리 냄새가 뒷짐지고 다닌다는 겁니다. 부딪쳐도 찡그리기는커녕 오랜만에 만난 삼촌이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걸 보듯 잠시 땅바닥을 차며 능청 떨어요. 호떡집과 파전집 주위를 얼쩡거리다 돌아가신 엄마를 닮은 촌부한테서 쌀 한 됫박을 샀습니다. 한쪽 다리를 저는 걸음은 쌀을 든 손으로 균형 맞춥니다. 방 한 칸이 절룩거리면 담장에 기댄 접시꽃이 얼른 손 내미는 풍경을 상상하며 걷다 사고를 치고 맙니다
포장지가 터져 쌀이 쏟아졌군요. 신중하게 골라 담았지만 이미 쌀은 그 쌀이 아니어서 구경하던 남자는 더러워졌다 하고 참견하던 여자는 흙 묻었다 하네요. 조합하면 흙 묻은 더러운 쌀입니다. 그러니까 액면 그대로는 흙은 더러운 것이고 쌀은 못 먹는 것이 되고 말아요. 세상에,
집에 오자마자 쌀을 씻습니다. 가볍게 뜬 웃음을 걷어 내면 심각한 이야기만 남습니다. 당신과 주고받은 말 중에도 쌀이라고 생각했던 흙알갱이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말들을 잘 씻어 안쳤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뒤늦게 발견한 저 쌀벌레는 어떨까요. 허기를 파 먹는 바구미 몇 마리. 둘 사이에 형성된 습도는 벌레를 부르고 맙니다
다 된 밥을 풉니다. 혼자 살고부터, 기다림을 거리감으로 곱새기고부터 뜸을 들이지 않고 먹어요. 한 끼 식사도 밥솥과의 계약이라 믿고 남은 밥은 보온으로 처리합니다. 속이 설설 끓는 고비를 넘긴 뒤가 중요합니다. 적절한 온도 유지가 밥맛을 결정하지요. 이러쿵저러쿵 찧고 찧은 말과 같습니다. 뚜껑이 자주 열리면 관계가 꾸덕꾸덕해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