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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갑습니다.
오늘은 이제 노자 도덕경 이주장입니다.
바이든 KT가 해석하는 도덕경 이주장이고요.
어 이제 우리가 아마 다 알 거예요.
또 노자 도덕경의 이제 처음 나오는 글귀가
도가도 비常도
명가명 비常명
이렇게 나오는데 이거는 아마 많은 분들이 아마 다 들어보셨을 거예요.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常도가 아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도가 아니다.
진짜 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진정한 도가 아니다.
도라고 이렇게 말하는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마음 공부라는 것은
법이라는 것은 법이라고 말하면 법이 아니고 열반이라고 말하면 열반이 아니에요.
부처라고 말하면 부처가 아닙니다.
불성 자성 본래 면목 주인공 뭐 참나 대아 진아 뭐 뭐라고 써도 괜찮지만
그것은 그냥 그냥 임시로 쓰는 거야.
임시로
불교에서는 이것에 바탕을 두고 이렇게 쓰는 거예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이 본질은 여기 바탕을 두고 항상 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도 평생 법을 설하셨지만
나는 평생토록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나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이 가르침을
낙처를 말해서 확인할 수는 없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 이제 보통 그 말이라는 것은요?
어떤 것이냐면 그냥 하나밖에 없으면
이제 전에 에카하르토 톨레가 이런 비유를을 들었죠. 이 세상 오온 천지가 전부 다 노랑 노랑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산도 들도 하늘도 모든 것이 전부 다 노란색이라면. 그 노란색 세상에서 사는 노란색 사람들이 우린 노란색이야. 이렇게 얘기할까요?
노란색이란 말이 필요할까요 필요가 없어요. 그냥 노란색이라는 개념도 없어요. 말도 없어요.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컴퓨터 거기에 갑자기 다른 파랑애가 하나가 딱 나타나면 갑자기 이제 이상한 충격을 받겠죠.
이게 뭐지? 희한한 색이 하나 나타났네 하고 걔를 이제 이름을 걔네와 우리가 다르구나라는 걸 그때 알게 돼요.
아 다르구나 같은 게 아니구나.
그러면 다르다라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기 시작해야 돼요.
너는 파란색 우리는 전부 다 노란색
근데 우리는 다수결이니까 우리가 정상. 너 혼자니까 니는 비정상 우리가 그런 분들에 빠져 있잖아요. 이름을 붙인 다음에 정상 비정상 다수결로 다자와 소수자임들을 차별하면서 분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라는 것은
둘로 나누는 행위이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행위예요.
이름을 붙인다. 정의를 내린다. 이런 게 다 마찬가지예요.
이건 어떤 거야
불교는 이런 종교야.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없죠.
대부분 불교 신자분들은 불교는 무슨 종교냐?
내지는 어릴 때부터 들어본 얘기가 불교가 뭐냐? 하고 물어보면 그 누구도 불교는 이런 거다 하고 명확하게 얘기하질 않아요.
그냥 어떤 사람은 불교 핵심이 뭡니까?
이러면 어떤 사람은 불교는
무아 아닌가요? 특히
연기법 아닌가요? 불교는
중도인데
공사상인데
5온 12처 18개 관련된 얘기가 많던데
위빠사나하라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저마다 또 이제 경전 대승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들마다 아함경 공부하는 사람 법학 공부하는 사람 모든 경전과 어록에 따라. 내세우는 게 다른 것 같단 말이야. 그니까 불교는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리 공부해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 어떤 것도 불교를 딱 규정짓는 말일 수가 없어요. 어떤 經이나 사상이나 철학도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라고 규정짓는 순간 정의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정의 속에 불교를 가두고 말죠.
그 불교가 그 정의 안에 이렇게 박제되거든요.
그러면 진짜 불교는 우리는 못 만나는 거예요.
그 규정된 말 속에 갇혀 있는 불교를 불교라고 생각하면서 그 말 안에 사로잡혔는 것이죠.
그러니까 인류가 발견해 냈든
어떤 진리라고 하는 경전이라고 하고
성경이라고 하는 성스럽다고 하는 모든 말들이
그 말을 말 그대로 갇힌 채로
그 말에 갇힌 채로 해석을 하게 되면
항상 아주 심각한 오류를 범해 왔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성경은 이렇게 해석하는 거야라고
이렇게 하나님을 보는 관점들이 있어요.
사람들마다 목사님들 신부님들마다 그 이제 信관이래요.
신부는 자기만의 관점이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성경을 해석하는 자기만의 관점이 있단 말이죠 그것이 이거야라고 이렇게 정의 내리면 그거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혀 자기 머릿속에 가두는 거예요. 자기 이해 속에 하나님의 그 광대무변한 진리를 자기 머리로 이해한 기독교 속에 가둬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해하는 거 옳고 너희들이 이해하는 건 틀렸어. 이렇게 돼 버려요. 그러니까 같은 가르침인데 이렇게 믿으면 이정교가 되고 저런 방식으로 믿으면 저정교가 되어서 이런 방식으로 믿는 건 옳고 다른 방식으로 믿는 건 틀려. 그래서 종교 전쟁을 일으켜서 다르게 믿는 사람들은 다 없어져야 돼. 그래가지고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단 말이죠? 왜 그럴까요?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일은 왜 그럴까요? 나는 절대 진실이다. 절대 질리다. 그러니까 내가 절대 진리가 되면 상대는 상대적으로 틀린 게 돼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틀린 것은 진리가 아닌 게 돼버려요. 둘로 나누는 것이 이렇게 위험하고 무섭고. 아니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오죠.
옛날에 이제 문자주의라는 말이 있어요. 성경을 이해할 때 문자 그대로 백 프로 다 문자 그대로 질리다.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으면 그 문자 그대로 진리야.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죠? 그럼 굳이 그때로 믿어. 믿게 되면 말의 낙처를 알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왜 이런 말을 했을까에 대한 그 본뜻을 알아야 되는데 그 언어 언어에만 갇혀가지고 그 해석을 한 채 그 말이 의미하는 바 고거 그대로만 진리야 이렇게. 믿는 것이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뭐랄까 어리석은 방식으로 어떤 기독교를 믿어왔던 방식이었다. 이렇게 반성 같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물론 여전히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겁니다. 이것이 진리야라고 딱 정해버리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차별되고 둘로 나뉘어요. 그러면 진리가 올바른 것이고 진리 아닌 건 틀린 거잖아요. 그러면 올바른 것과 틀린 것이 싸우고 경쟁하고 전쟁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조금 더 잘 실천하고 잘 믿고 잘 따르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요. 이렇게 계급적으로 좀 높아지고요. 진리를 잘 못 실천하는 사람들은 아주 그 수준 낮은 저열한 신자가 돼버려요. 그 사람마다 계급이 나뉘어요. 둘로 나누는 것이죠. 진리는 진리라는 것은 오 노주 전체가 저 하늘의 신에서부터 저 지역에 있는 중생들까지 누구 하나 다르지 않다라는 불이 아니다라는 지극한 그 대평등에 가르침이거든요. 그 누구도 진리에서는 소외될 수가 없어요. 최악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진리에서는 소외되지 않아요. 지역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신께서 구제를 안 한다. 그런 분이 신을까요? 우리가 너무 자기 수준에서 신을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착한 사람은 좋고 나쁜 놈들은 싫잖아요. 그러니까 신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자기 수준으로 신을 깔아뭉개는 그 행위일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요 자 이 A는 이것이다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이것은 BCD 이것과는 다르다라는 어떤 차별 분별을 가져오는 행위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도 그렇고 노자에서도 그렇고 항상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뭐냐면. 불교산 명상 혹은 명색이라고 불러요. 우리가 명상한다. 할 때 명상이 아니라 명과 상 즉 상 모양을 지닌 것의 명 이름을 붙인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 12연기라는 것은 괴로움이 생기게 된 원인을 12가지로 규정한 거거든요. 12년 기 중에 하나가 명색이거든요. 즉 개념의 원인은 명세에 있다는 거거든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명색은 뭐냐 하면 내가 분별 의식이 내 생각 분별심이 세상 모든 것들을 명색으로 파악하는 것이 분별 망상이다. 이 소리에요. 즉 내가 세상을 알 땐 어떻게 하느냐? 이름과 모양을 부여해 놓고 그걸 알았다. 이런다는 거죠? 우리 저기 앞에 소나무 숲을 그대로 이렇게 살려놨어요. 소나무 숲이잖아요. 소나무가 이렇게 우리나라 전통 소나무가 이렇게 딱 서 있습니다. 그럼 이제 스크 이렇게 아들딸들이 같이 이렇게 오신 집들이 많으신데 너희들 너무 지루하면 이렇게 나가서 뛰어놀아도 돼. 이렇게 꾹 닦고 안 있어도 괜찮아 아이들이 물어본단 말이야. 엄마 이 나무는 무슨 나무야? 아 이거 소나무야. 그러면 이제 소나무라고 알잖아요. 이름을 알잖아요. 아 이렇게 생긴 거 이렇게 생긴 나무 모양이죠? 상 이렇게 생긴 나무는 이름이 소나무 그럼 이제 알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고 이제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소나무는 뭐 사시사철 푸르고 이 소나무 솔잎은 2개 우리나라 전통 소나무 2개죠. 이렇게 다 소나무 미국산은 3개 그 예를 들어 이런 식의 몇몇 가지를 알아요. 그러고서는 알았다.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놀라운 점은. 여러분 나무를 공부할 때 아는 나무 공부합니까? 아름다운 공부 안해요. 이름을 딱 알고 나면 그건 안다고 여기고 아는 나무 공부 안 하고 어 난 첨보는 나무야 할 때 신기하다. 이건 뭐지 하고 이제 눈여겨보고 오래오래 지켜보고 관찰하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름을 붙여서 안다라고 여긴 것은 더 이상 관심 갖지 않아요. 그러니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막 요즘에 막 무슨 뭐 K-POP이니? 무슨 뭐 해서 우리나라를 동경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그래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한국을 보면서 되게 감동을 하고 막 놀라워하고 그런다 그래요? 근데 한국사는 사람은 막상 그걸 뭐 그렇게 놀라워하지 않겠죠? 맨날 보던 거니까 이름을 알고 개념을 알고 그게 뭔지. 내가 알고 그 아는 이름을 난 매일 보고 살았으니까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거예요. 관심 갖지 않는 거죠. 근데 여행을 떠나면 그걸 처음 보거든요. 첨본 곳에서 처음 이름도 모르고 생겨날 때 마치 어떤 게 벌어지냐면. 우리가 가든 방식이 아니에요. 우리는 모르는 것도 이렇게 조금 관찰하다가 이름 뭔지 알고 저는 그냥 휙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진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를 때 분별이 아무것도 없을 때는 어떤 상황이냐면 막 갓난아기가 막 태어나자마자 누워있어서 움직이지. 또 못하고 있는 갓난아기가 이렇게 그냥 뒤로 누워 있다가 모빌이 이렇게 움직이는 걸 천장에 이렇게 달아주면 뭐가 막 움직이는데 이 모양 저 모양의 모빌이 막 움직일 텐데. 그거를 바라보면서 신기해하는 그 아이들의 눈동자 순수하다고도 말할 수 없어요. 정말 어떻게 사람의 눈동자가 이렇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천진난만할 수가 있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그 맑은 눈동자로 너무 놀랍고 신기한 것이죠. 그렇게 그냥 본다는 말이에요. 그냥 경이로운 눈동자로 아는게 없을 때 이름 붙이지 않았을 때 모를 때 모든 것이 새로운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저 딴 외계 별에 살다가 지금 인간계 탁 내려갔다 치는데 인간계는 외계 별에 있는 아무것도 없다 쳐보세요. 인간관계는 모든 것이 다새롭다. 사람도 이렇게 생긴 건 움직이는 걸 처음 봤다. 나무도 산에 저런 나무가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 모든 것이 신기할 때 그 외계에는 어떤 눈동자로 바라볼까요? 아무것도 몰라요. 이름도 모르고 개념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투명한 눈빛으로 바라볼 거란 말이죠? 오를 때 울을 때 그걸 그냥 생각하지 않고 판단 분배하지 않고 오래오래 바라보게 되거든요.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그것과 만날 수 있어요. 마주할 수 있어요. 근데 우리는 진작부터 이름을 꽉 찍어 놓고 그건 이런 거야라고 조다. 나쁘다라는 분별을 꽉 개입시켜 놓고 나서는 그렇게 해서 알고 나서는 더 이상 그 관심 갖지 않아요. 그리고 그다음에 그걸 보면 나 아는 거야? 옛날에 알았던 거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덮쳐 버려요. 옛날에 아는 어떤 사람이 어떤 연예인만 나오면 뭐 저 사람은 내가 꼴보기가 싫고 하면서 체내로 확 돌렸던 분이 있었거든요. 항상 그걸 보면은 채널을 확 돌리면서 짜증을 냈다는 말이죠. 항상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의 다른 점을 발견하고 새롭게 바라보게 되면서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게 되었다.
계속해서 내 생각 속에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내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을 덮어씌운 거야. 내 분별 의식 가지고 그런데 여러분 자식을 매일 만나고 10년 20년을 만난 여러분 자식도 얘가 어떤 애인지 모르지 않나요? 심지어 내가 착하는지 나쁜 앤지조차 모르겠을 때가 있어요. 어떨 때 보면 얘는 보* 싶은 때도 있고 어떨 때 보면 참 아름다울 때도 있고 주변 사람도 다 그렇단 말이에요. 심지어 자기도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착한 지 못됐는지를 알 수 있나요? 그러고 그걸 그렇다고 규정할 수 있나요? 착하다라고 규정한 사람이 정말 계속해서 착할까요? 아니면 인연이 착하도록 허락을 해주니까 착해진 걸까요? 그 사람도 극한 상황에 뭐라 너 버리면 똑같이 못 됐어지지 않을까요? 나라고 규정할 만한게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이름을 부여하고 모양을 부여해서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세상은 이런 곳이고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야. 정치인들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요런 사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요런 사람. 이런 사람은 꼴보기 싫고 저런 사람은 좋아 이렇게 머리를 생각을 한 다음에 그걸 믿어버린단 말이에요. 누가 자기 생각이 믿어요? 그래서 그것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버럭 화를 내거나 너는 틀렸다라고 싸우거나 이렇게 자기 생각을 믿고 고집을 해. 버리면 누군가와는 다투기 시작해요. 너는 틀린게 되고 나는 옳은게 되기 시작해요. 그런데 세상에 선악 얼고 그름 맛 커틀림 길고 짧음이 정해져 있을까요? 나는 저 사람을 싫어했는데 싫어한다라는 것은 좋고 싫음이라는 두 가지를 이념으로 좋은 게 나타나고 좋은 것을 인연으로 싫은 게 나타나고요. 싫은 것을 인연으로 좋은 게 나타날 수 있거든요. 짧은 것을 인연으로 긴 것이 나타나고 긴 것을 인연으로 짧은 것이 나타나지 이것만 있을 땐 이게 긴지 짧은지 모르는 거예요. 얘는 요렇게 인열이 나타나면 긴데 전봇대부터 가면 얘는 엄청나게 하염없이 짧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얘는 얘 자체로서는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죠. 어떤 이름으로 얘를 말할 수 없잖아요. 얘를 긴 거라는 말에 가두어버리면 얘는 긴 게 돼버려요. 그럼 우리는 이 기준을 가지고 내 안에 딱 있으니까 뭔가 생각은 선명해지는 것 같아요. 생각으로 이건 길다라고 딱 정해놓고 사니까 사람들이 이제 물어봐요. 노키가 커 작아 이거보다 크잖아 그럼 커 그 나무는 커져가 이거는 이거보다 크니까 커 이것보다 작으면 무조건 작아야 돼요. 볼펜이 이만한데 볼펜 길이 짧아 이러면 짧아 이거 기니까 얘랑 비교하면 짧으니까 이런 식의 어떤 고정된 관념의 틀을 하나? 내 안에 색안경처럼 가지고 있게 되면. 사람이 똑똑해지죠. 자기 생각을 주장하게 돼요. 왜 이거 옳고 그른 기준이 나한테 딱 있으니까 근데 이 기준이 정해진 실체 연말이죠? 이게 정말 긴 거냐 말이죠? 사람이 맞다. 틀리다 옳다 그러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그런 게 어떻게 정해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나는 능력 있어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나는 외모가 좀 돼. 이런 말로 나를 규정할 수 있을까요? 나는 못났다. 잘났다 능력 있다. 능력 없다. 나이가 많다 적다. 이런 걸로 자기를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규정할 수 있겠죠? 근데 그것은 분별에 불과하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규정하는 순간 정의 내리는 순간 이름 붙이고 그 이름을 믿는 순간 나는 그 마을에 갇히게 됩니다. 그 규정에 갇힌 자유롭지 못한 전제로 하나씩 제한되는 아주 비좁은 존재가 돼버려요. 우리 의식은 거기로 한정이 돼버려요. 아주 비좁아지게 됩니다. 상상력 상상의 나래를 피지 못해요. 무한한 어떤 창작 창의 이런 것들이 **버려요. 내가 아는 것 속으로 갇혀버리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아는 것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많은 걸 아는 분들은 뭐라고 얘기하시냐면 교수님들이나 이런 분들은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점점 더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왜냐하면 많이 안다는 건 더 많이 모르겠다라는 것을 동반해요. 알고 모르고는 연기적으로 연결돼 있거든요. 이 도덕경에서도 그 유무 상생이라는 말을 많이 써요. U아 이따와 없다는 서로 서로 살려주는 관계다. 이것과 저것 많다 적다 크다 작다 잘났다 못났다. 옳다 그르다는 하나만 가지고 설수 없는 거예요. 상대가 있어야만 내가 있을 수 있는 연기적인 관계거든요. 상의 상관적인 관계거든요. 얘는 작지도 크지도 않지만 얘가 있을 때만 얘는 작다라고 이렇게 구현이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 드러나는 거죠? 얘는 본래 작은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다른 타자를 통해서 내가 살려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와 내가 차이가 나지만 차이 나는 것은? 맞거나 틀리거나 옳거나 그러거나 난 저런 걸 싫고 이런 건 좋아 나는 싫고 저런 사람처럼 되고 싶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뭔가를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연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라는 것은 그것과 이것이 둘이 아니라는 거거든요. 차이가 나지만 차이가 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만을 우리는 분별의 눈은 어떻게 보냐면 이걸 보고 차이만을 봐요. 얘는 작고 얘기는 길어. 그러니까 난 징계되고 싶어. 난 키가 크고 싶어 잘하고 싶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 관심이 있단 말이죠? 근데 하이데건가요?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차이가 난다라는 것은 그냥 차이만을 얘기하는 것은 한쪽만 바라보는 것이다. 차이가 나는 것은 곧 그것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라는 것을 뜻한다. 그걸 연장 연장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거든요. 차이도 있지만 연결되어 있는 것에서 오는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걸 뭐 차연 이런 말로 표현을 한다고 그래요. 차연의 관계다. 연기적인 관계란 말이야. 너와 나는 잘났고 못난 것은 그럼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하나도 사라지는 거예요. 하나가 사라지면 나머지 하나도 사라지는 상생의 관계입니다. 너를 통해 내가 규정되고 나를 통해 너가 규정되고 너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너가 있는 관계의 모든 존재는 근데 우리는 둘 중에 하나는 버리고 하나 좋은 것만 하나만 취하고 싶어 한단 말이죠. 오소는 진보는 다 없애버리고 세상이 다 보수가 돼야 돼. 이렇게 얘기하고요. 진보는 보수는 다 없어지고 진보만 있어야 되는 이유는. 진보 없는 보수가 있고 보수 없는 진보가 있을까요? 만약에 진보가 다 사라져 버리면 보수 안에서 극단적 보수가 보수가 되고 약간 진보적 보수는 진보라고 또 이름을 붙여서 둘로 나눈 채 거기서 어차피 또 싸울 겁니다. 그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보수적 어떤 정치 활동을 하더라도 진보를 없애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들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있을 때 내가 있을 수 있는 거죠? 달라이 라마 스님이 그랬다고 하시죠? 나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없어지고 전부 다 불교만 됐으면 좋겠다. 불교로 모두를 다 개정하고 싶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이 세상에는 불교만 있으면 안 된다. 다른 종교도 있어요 하고 모든 종교가 다 있어야 한다.
저것이 싫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버리는 거 그거는 분별해. 어디석은 생각인 것이죠? 그것이 있으므로 내가 있다라는 것을 모르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유무 상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러니까 제한된 한정된 눈으로 세상을 자기식대로 규정하는 분별심의 눈입니다. 분별심을 중생심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분별의 도구가 바로 말이고 언어고 개념이거든요. 분별해도 우리 분별을 더 잘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 그게 바로 언어예요. 언어 그래서 뭐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 어떤 분은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다른 말이 아니에요. 여기에 이제 노자에서도 좀 이따 얘기를 하는데요. 무명천지짓고 유명 만물지 모라고 해서 이름 없는 것 그게 천지의 원천인데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만물의 모태가 된다 그랬어요. 이름 붙이지 못하는 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게 모든 것에 바탕이거든요. 마음 3개 USIM이란 말이에요. 일체 USIM조란 말이에요. 모든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노자에서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를 첫 글자에다가 도라고 이름을 붙여버렸어요. 뭐가 더 비싼 거 이름 붙일 수 없는 거지만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려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니까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더 하고 이름 붙인 거예요. 불교에서는 마음 자성 번성 원래 면목 주인공 뭐 참나 뭐 연회장 9분 그냥 임시로 이름 붙인 거지? 왜 세상 사람에게 이 법을 전해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름 붙인 거예요. 그래서 임시 방편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언어는 전부 다 임시 방편이에요. 모든 언어가 전부 다 임시 방편이에요. 임시적으로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언어를 임시적으로 알아듣는 걸 통해 그 낙처를 확인하면 되는 것이지. 그 말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도 마음 법 이렇게 그냥 이름 붙여 본 거지. 그건 그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 이제 예를 들어 초기 불교를 공부하고 이런 분들이 선불교는 자성 벌레 면목 주인공을 주장하기 때문에 불교감이다. 이거는 자성 분해면목 주인공이라는게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 붙인 거라는 걸 몰라서 그래요. 그런 게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또 없다라고 할래니 없다라고 할 수 없이 이렇게 살아있어요. 이걸 불교에서는 유무 중도라고 해서 진짜를 돌을 법을 얘기할 때는 유라고 말해도 안 되고 무라고 말해도 안 된다 그러거든요. 유무 중도로 설해야 되는 거예요. 원래 면목 주인공은 있다라고 말해서 틀리고 없다라고 말해도 틀려요 있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데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단 말이에요. 말로 하게 되면 있다거나 없다라고 규정을 해 버리면 있다 하면 있다의 규정에서 거기 있음을 믿어버리고 없다 하면 없는데 사로잡혀 가지고 없음을 믿어버리니까 사람들은 분별심은 양도 일단 하고 싶어요. 양쪽 중에 어떤 하나를 딱 쥐고 싶어? 한단 말이에요. 그래야지만 속이 시원하거든요. 그 어떤 분들은 스님들이 법문 하다 보면 그런 분들도 계세요. 손님 진짜 제가 참고 참고 참았는데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결론을 내주세요. 부처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본래 변목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거는 긴 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 말 갈 것 같아요. 이건 긴 거다. 이렇게 규정지라고 하는 말과 똑같아요. 제가 어떻게 이거를 길다라고 규정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여러분이 나는 잘랐어. 나는 못났어. 나는 능력 있어. 나는 능력 없어. 어르신들 연세 많으신 노사님들은 자신의 인생을 막 말씀하시면서 아 제가 그렇게 못산 건 아닌 걸까요? 이게 두려우신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아 그래. 그래도 잘 살아왔어요. 이 말을 너무 듣고 싶어 하기도 해요. 그거 왜 스님들한테 들어야 되죠? 자기가 자기에게 해줄 수 없나요? 자기를 그렇게 못믿나요? 우선 자기를 못 믿어요. 남들의 말을 믿지 자기를 못 믿어요. 이게 우리의 가장 큰 어디서 금이고 우리가 두려운 이유예요. 우리의 삶이 두려운 이유예요. 내가 모르니까 누군가가 나 대신해서 경문대 주기를 바래요.
삶에는 오른 삼도 없고 틀린 삶도 없고요. 훌륭한 인생도 없고 못난 인생도 없고요. 잘나고 그러니까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분별의 구조 이 현실 생활 현실 세계 속에 이런 게 없다는 얘기 아니에요. 현실에는 나쁜 놈도 있고 나쁜 놈은 응징해야죠. 착한 사람도 있고 파 있어요. 그곳에 대해서 판결 제대로 해야죠? 법을 법을 딱 세워가지고 판결도 제대로 해야 되고 할 건 다 해야 돼요. 현실에서는 근데 이제 제가 말씀드리니까 이제 출생한 법을 얘기를 하는 거예요. 출세간에 진실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근데 우리 뭐든지 분별된 이 세상 맞닥뜨리다 옳다. 그러다 뭐 이런 분별되는 이 모든 세상의 뿌리가. 본 마음이거든요. 도거든요. 말로 할 수 없는 규정할 수 없는 이름 할 수 없는 그냥 이게 텅 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거 하나거든요. 이게 무명천지짓이란 말이에요. 무명 이름 없는 게 이 이 이름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진실을 하나 진리 하나 이것이 천지의 원천이 된다. 오 노즈 전체의 원자 여러분들의 원천이 이름 없는 이거예요. 이름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선에서는 이거 이렇게 부른단 말이에요. 왜 이거 이러냐 저거라고 안 그러느냐? 저거 하면 저쪽 어딨는거 같잖아요. 이쪽에 있는 것 같지 않잖아요? 친밀하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이거 하니까 아 요쪽 어디만 있는가 요쪽 어디만 있는 게 아니에요. 통으로 우주 전체가 이거지.
삶의 근원은 우리는 여러분들은 우리는요. 가짜 세상의 진짜가 아니잖아요. 가짜 세상은 이렇게 그냥 연기하며 사는 거죠. 한 세상 한 세상 한세상 그냥 사는 거예요. 뭐 그렇게 대단하게 의미 지을 게 있어요? 아니 여러분 전생에 어느 때는 나쁜 놈이었단 말이에요? 안 그렇겠어요. 아니 죽이면 죽을 짓을 안 했겠어요. 아니 금세 됐을 건데. 저도 어릴 때 생각하면 제가 다 죄의식이 느낄 때 많았단 말이에요. 나쁜 짓 안 하고 살았겠습니까? 어느 생애는 여러분이 사람 엄청 죽였을 거란 말이에요? 전쟁에 나가가지고 엄청 죽이기도 하지 않았겠어요. 그때만 죽였는데 솔직히 지금도 죽이지. 생명을 저도 서울 부산 상주 맨날 왔다 갔다 하면서 자동차의 시체를 달고 다녀요. 바퀴는 개미 시체 유리창에는 날벌레 시체들이 죽음과 삶이 도저히 아니거든요. 죽음을 죽음이 있으므로 사연이 있고 삶이 있으므로 죽임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현실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서는 내가 잘났다 못났다 얘기할 수 없어요. 내가 지금은 잘났겠죠? 막 금생은 좀 잘랐겠죠? 과거 어느 생이 아주 못났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지금까지 인생이 순탄하겠죠. 앞으로 인생이 더 무서워질 수도 있단 말이에요. 심각해질 수도 있고 안 했겠어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다고 현생을 막상 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죠. 현실을 정말 멋있게 아름답게 이렇게 잘 살아야 되는데. 제가 드리고 싶은 핵심은 뭐냐 하면 그거는 겉모습이다. 모양의 세계다. 현실의 세계다. 그런데 현실의 세계만 보고 살았잖아요. 지금 우리는 현실만 보고 살았잖아 눈에 보이는 것만 이렇게 보이면 길면 길다 했고 짧으면 짧다 하면서만 살았잖아요. 이게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다는 거는 생각 못하고 살았단 말이에요. 내가 잘났다. 혹은 내가 못났다라는 것만 쥐고 사니까 잘났다. 이런 사람은 우월감에 남들을 상처 주고 살고요. 나는 못났어 하는 사람은 열등감에 쩔어가지고 너무 괴로워하면서 세상을 산단 말이에요. 그 양 극단이 틀렸단 말이에요. 그거는 생각일 뿐이란 말이에요. 분별일 뿐이란 말이에요. 분별심 속에만 일어나는 망상이란 말이죠? 그럼 망상의 세계 속에서는 그러고 살아도 되는데 진실은 그렇지 않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법회라는 것은 법을 얘기하는 곳이잖아요. 법에서는 진실을 알려준단 말이에요. 뭐가 진실이냐? 나는 잘랐어. 이거 생각이에요. 문별이에요, 나는 못 났어. 이것도 분별입니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도 어디 적은 거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도 어디 썩은 거예요. 근원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근원에서는 아무런 차별과 분별이 없어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했습니까? 이거 할 수가 없다니까요. 왜냐하면 등수가 1등부터 꼴찌까지 전국 아이들을 등수로 매겨 버리니까 도대체 몇 등이 잘한 건지 알 수 없잖아요.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 분별을 해서 내가 이랬다 저랬다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저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진짜 진짜 어리석은 사람들이냐? 그렇든가요? 제 학교 다닐 때 공부 상당히 못했고 놀고 심지어 깡패짓도 하고 이러던 친구들이 지금 정말 잘 사는 친구들이 많고요. 심지어 나중에 성격까지 막 바뀌는 사람도 없나요 있습니다. 손톱 바뀌어서 자기가 옛날에 잘못을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좋은 일 하고 살아야 된다고 사업을 하면서 버는 돈을 정말 많이 기부를 하면서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런데 똑똑하던 친구들이 이렇게 좀 뭐 좀 망하고 남들 또 사기치고 그런 사람도 있다니까요. 그 얼마 전에 어떤 법문을 듣다 보니까 어떤 큰 손님께서 그 얘기를 하시대요. 나이가 들어서 이게 참 그 늙으니까 참 좋다. 젊음은 젊음이라 좋겠지만 난 나이 들어 보니까 나이 드는 것도 참 좋다. 젊었을 때는 젊으니까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뭐 뭐라 그러지? 무슨 블라방처럼 많이 꼬여가지고 나를 사기치려는 사람도 많이 꼬이고 또 나도 또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는 인연 때문에 나도 또 사람들을 또 사기 치는 일도 생기고 그런 일들이 갑갑한 일들이 많은 많고 관계도 맺어야 되고 뭐 하지 않을 것도 해야 될 때도 있고 막 이러면서 살았는데 아니 나이 들으니까 이제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고. 뭐 그러니까 세상 속 편하다는 거야? 그런 사람들 나한테 와서 독벌로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뭐 나한테 뭐 바라는 사람도 없고 너무 속 편하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죠? 관점의 차이 아니에요. 늙었다 젊었다. 이것이 좋다. 저것이 나쁘다. 그 군인들은 군대 가기 싫어하잖아요. 근데 연예인들 인터뷰한 거 보면 장병들이 되게 어렵다는 게 있거든요. 연예인들이 연예인 활동 하느라고 너무 죽도록 힘들었을 거 아니에요. 막 연습생 활동하면서. 연습한다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몸을 하루 종일 막 걸려야 될 거 아니에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런 친구들이 군대에 오면 편하게 3년 쉬는 것 같지 않을까요? 그래서 연예인들이 군대 갔다 온다. 이러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군대 가서 좀 쉬고 와야 되겠다. 근데 진짜 쉴 것 같아요. 왜냐하면 눈 코 뜰 새 없이 새벽부터 막 10개 20개 일정을 소화하는 연예인들이 쉴 수가 없이 쓰러지기 직전에 군대에 오면 군대 가서 푹 쉬죠. 매일 같이 89시간은 잘 수 있으니까 1 8시간 잘 수 있죠. 먹고 자고 훈련 해봐야 뭐 1년 내내 우리 저기 보살님들이나. 이제 남자들은 아는데, 여자분들은 군대 하면 진짜 사내 같은 것만 봐가지고 하루 종일 그것만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러면 1년에 한두 번 이렇게 흘려놨을 때만 그러고 그러는 거고 평소에는 그냥 하루 일과 하거든요. 잡초 뽑고 컴퓨터 치고 우리 사는 거랑 똑같단 말이죠? 관점이 달라요. 모든 것이 어떤 게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이런 게 세상에는 없습니다. 다 자기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것이죠. 어 그래서요 이도 진실 진리 이거는 말로 규정해 버리면 그는 거서 진실을 풀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 이제 지금까지 규정해왔던 말로 규정하고 언어로 규정하면서 이름을 부여했던 모든 것에서 그 이름은 이제 그대로 쓰더라도 그것을 좀 빼보는 연습이랄까 그런 게 좀 필요해요. 난생 처음 보는 것 같은 생겨난 눈동자로 그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로. 나무 한 그루를 마주봐 보세요. 옛날 인디언들은 기력이 딸리거나 힘이 빠지거나 상처받거나 마음이 힘들 때 숲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숲속에서 나오지 않았대요. 그러면서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이렇게 부둥켜 안고는 나무의 숨결을 느끼면서 나무의 소리를 들으면서 나무의 어떤 감촉을 느끼면서 나무를 오래오래 끌어안고 있었대요.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기저귀 솟구쳤대요. 그게 뭐를 얘기를 할까요? 세상 속에서 상처받고 이럴 때는 분별 속에 있는 거예요. 사람이 항상 분별 속에 있기 때문에 사람 삶이 혼란스럽고 번잡하고 해결해야 될 일들 투성이고 잠시도 쉴 수 없어요.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요. 근데 숲으로 들어가면 숲으로 들어가면 오래오래 숲에서 그 숲과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여기 이렇게 우리 저기 이제 그 찾아오시는 분들이 평일에도 많은 분들이 오시는데 오셔서 이렇게 절인 때 절 같지가 않고 이게 카페 이것은 카페인가 절인가 그냥 이거는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이렇게 요즘 이제 날씨 따뜻해지니까 의자에 앉아서 그냥 호소를 바라보면서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냥 가만히 20분이고 30분이고 혼자 와서 그냥 가만히 앉았다. 간단 말이죠 부처님께 잠깐 참배하고. 보통 절에 가면 그 법당에 들어와서 도우지 집어 들고 이제 천수경 외고 금강경 외고 반야신경하고 뭐 하고 뭐 하고 1시간 기도 딱 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이제 고소 뿌듯함이 좀 덜하면 이제 절 같은 거 한 1200대 하면 이제 뿌듯함이 약간 올라와요. 몸이 뭔가 좀 한 것 같아서 뭔가 이렇게 성취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면서 아 오늘 많이 했다. 이러고 이제 집에 간단 말이죠? 그것도 좋아요. 왜냐하면 그 기도하고 연보하고 도경하고 할 때 내가 분별을 따라가지 않거든요. 그냥 그 도경하는 그 자리에 있단 말이에요. 연구단은 그 자리에 있단 말이에요. 저를 할 때 막 생각 따라가지 않고 그냥 저라면서 그 절하는 그 그 동작을 그냥 관하면서 깨어있으면서 그 자리에서 절을 하게 된단 말이죠. 처음엔 안그러더라도 시간이 가면서 점차 그렇게 돼요.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고 좋단 말이죠? 그렇게 그것도 하나의 이제 그게 이제 기도잖아요. 근데 이제 그것만 기도냐. 집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밖을 하루에 그 멍 때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러면 뭐 충전하고 싶다 그러잖아요. 진짜 충전이 충전하고 싶어. 이러면서 난 좀 쉬는 날 충전하고 싶어. 이러면서 쉬는 날 이제 쇼파 하나가 돼가지고 리모컨과 하나가 돼가지고 이렇게 누워서 이거 돌리면서 충전한단 말이죠. 그러면서 TV 보다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나오면 막 욕을 욕을 하면서 막 계속 분별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그것도 휴가가 되지만 그 휴가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근데 그보다 더 근원적인 휴식. 근원적인 어떤 치유 말 그대로 진짜 힐링이죠. 그건 뭐냐 하면 생각과 함께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분별과 함께하지 않는 시간 그냥 앉아서 하염없이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무 이렇게 이름 붙이지 않고 이름표를 떼고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저 호수를 바라보면서 호수 이렇게 이름 붙이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거예요. 참 저는 여기 와서 너무 좋은 것이 어 옛날에 제가 이제 히말라야를 막 들뜬 마음으로 갔다 왔을 거 아니겠어요. 아 히말라야를 안고 사는구나. 이런 느낌 여기가 히말라야. 그 어떤 로츠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못지않은 시말라야 오천 고지 예 가면요. 고쿄라는 곳에 가면 이런 호수가 있어요. 한 요만해요. 딱 요만해요. 웬만한 호수가 이렇게 눈에 비치면서 호수가 바라보이는 이렇게 통유리 창으로 혹은 그 앞에 있는 저런 의자에 앉아가지고 호수를 바라보다가 설산을 바라보다가 그러면서 한나설을 보내요. 거기서 동네 한 바퀴 걷다가 가장 살아있을 때거든요. 우리가. 가장 즉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있을 때거든요. 왜 살아있다고 하느냐 생각 속을 거니는 때는 생각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때예요. 그러느라고 진짜 살아있는 자기의 생명은 죽이고 있는 거예요. 생각 속에 사로잡혀 있는 하고 근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평생을 그러고 살아왔죠. 평생의 생각이 만든 꿈의 꿈속에 사로잡혀서 여러분 생각이 만드는 여러분 세상이라는 꿈을 여러분이 창조했잖아요. 여러분 머릿속에 여러분 머릿속에 들어있는 대한민국이 있거든요. 여러분이 만든 딱 하나의 대한민국 속에 여러분은 살고 있어요. 여러분이 만든 내 남편 여러분이 만든 내 가족 이 우주를 자기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판단해서 만들어 놓고는 그게 진짜 메타버스예요. 자기 머릿속에 자기 분별 의식 속에 그 메타버스 우주를 완벽하게 만들어놨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에 자기가 창조주거든요. 그래가지고 대통령을 죽였다. 살렸다 하고 마음속에서 온갖 사람들을 욕했다가 또 칭찬했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울고 웃고 자기를 욕하고 이러며 산단 말이죠. 전부 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 생각의 꿈 이 꿈에서 깨는 것이 이 공부거든요. 마음 공부거든요. 그래서 명상을 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한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게 이제 명상에 비해서 명상이라 이러면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있으세요. 이러면 못했어요. 한 번도 그래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방편으로 쉽게 한 거란 말이에요. 기도를 좀 하세요. 이렇게 하는 말은 금강경 독성을 하면서 또는 관세보살 연부를 하면서 절을 하면서 그때 그거 하나에 딱 집중할 수 있단 말이야. 한 가지 대상에 딱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먼저 준단 말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집중을 하고 거기에만 있어 봐라. 이렇게 집중한단 말이죠? 그런 숙제가 없으면 우리는 분별을 따라가니까 근데 막 절만하라고 하든지 연볼만 하라고 하든지 도경만 하라고 하든지 하면 거기에 이렇게 몰입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이게 뭐랄까? 공부의 좀 머리를 잘하는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보면 기도하다가 온갖 체험들을 다 해요. 정말 고요해지는 체험도 하고 뭔가 썩 내려가는 체험도 하고 그래서 저는 이 공부가. 이 기존에 30년 40년 절에 다니면서 기도 엄청 많이 했던 노보사님들 있잖아요. 이 노보사님들이 이제 이 법문을 듣기 시작하면 그분들은 옛날에 기도했던 저적들이 있어가지고 로봇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옛날에 기도할 때 이런 체험해봤다. 저런 체험해봤다. 뭐 고요함을 경황해봤다. 이런 분들 많거든요. 근데 체험이 있어도 자기가 안목이 없으면 그 체험이 뭔지를 체험에 힘을 받지를 못해요. 근데 이제 공부를 하면서 안목을 딱 키우고 나면 그것이 이제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 기도했던 거 뭐 수행했던 거 연보됐던 거 독행했던 거 이게 버려지는 게 아니에요. 그게 선근 공덕을 쌓았던 거예요. 그게 단편에 수행이 되어서 그 방편이 이제 내 안목을 딱 밝히고 나면 그게 나에게 큰 힘으로 확 작용을 해요. 버릴게 하나도 없어요. 제가 처음에는 수행할 필요 없다 기대할 필요 없다. 그거는 뭐 수준 낮은 거나?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한 것은 방편으로 약간 충격요법을 줘야 충격을 받고서는 그냥 확 돌이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또 그 당시에는 그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 이제 제가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저는 방편으로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 얘기를 굳이 곧대로 여기에 딱 정리해가지고 아 기분 나쁜 거야. 수행은 나쁜 거야? 저래서 기도만 하는 사람들은 수준 낮은 사람들이야. 이렇게 정리해 가지고 불교를 그런 걸로. 딱 정리해놓고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수준 낮다고 이러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그거는 자기 수준이 낮은 거예요. 자기가 올바른 걸 딱 정해놓은 거 아니에요. 이게 올바른 이게 고차원적인 수행이야. 이렇게 정해놓은 거 아니에요. 여긴 그런 게 없습니다. 정말 이 공부는 하면 할수록 정말 대평등이구나. 그 옛날에 절에 안 가도 상관없어요? 마을 앞에 있는 어기에 큰 나무 선왕당 앞에 가서 자식들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지급 정성으로 물 하나 떠다 놓고 기도했던. 그럼 뭐 너무 살리면 그 정성스러움 그것이 아름다움 아닙니까? 그게 종교의 어떤 근원적인 원천 같은 거 아닐까요? 어떻게 그거를 무시할 수 있겠어요? 3의 모든 그 겉에 드러난 모든 현상들은요? 우리가 때에 따라서 비판도 할 수 있고 맞다. 틀리다 이렇게 할 수 있죠. 근데 그 비판이라는 것은 다 방편이에요. 그것이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비판이 아니에요.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거기 사로잡혀 있는 것을 깨줘야 되는데 이걸 안 깨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 충격 충격 요법을 주기 위해서 야 그거 샀던 거야. 한번 충격을 받는단 말이야. 이 사람이 충격을 받아가지고 충격을 받아가지고 여기서 탁 한번 놓여나는 계기가 된단 말이에요. 그런 어떤 자극 충격 요법을 딱 주기 위해서 옛날에 황벽사님 같은 분이 인제 가르칠 때도 때리거나 또 임시 옆에 도반 스님이 임제는 맨날 잠만 잤다 그래요. 선방에 앉아가지고 잠만 자는데 옆에 맨날 앉아가지고 참선하는 스님한테 가가지고 참선 자꾸 깨우면서 임재 못봤네. 저렇게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데 너는 맨날 이렇게 깨르게 이지거리는 하고 있을 거냐. 이러면서 혼을 냈단 말이야. 근데 슬립이 얼마나 어이가 없겠어요? 난 이렇게 참선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임제는 맨날 저렇게 누워가지고 잠만 자는 놈인데 이제 충격요법을 준단 말이에요. 그럼 그 말을 듣고는 그 어록을 딱 보고는 어 오케이 앉아 있는 건 다 나쁜 놈들이고 그냥 내가 잠만 자고 이러는 게 오구나. 이렇게 쥐면 안 되겠죠? 그럼 말이잖아요. 말 말이 낙찰을 하겠네라는 거지? 그 말을 따라가서 그렇게 정리하고 수행은 이런 거야? 이렇게 정하라는 얘기가 아니죠. 그래서 이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을 명감면 비상명이라는 말을 이 바이런케이트가 그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풀고 있어요. 실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실제를 제안하게 됩니다. 말할 수 있는 돈은 영원한 돈 아닙니다. 돌을 말하려 하면 돌을 시간 속으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도의 이름을 붙이려 하면 그 때문에 돈은 시간 속에 멈추어 버립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더 이상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이란 자유롭고 무한하며. 시간이나 공간 속의 위치가 없으며 어떤 장애도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경험입니다. 그랬어요. 의지에 앉아 있는 거 그 누구에요? 그게 바이런게이트 자기를 바이런게이트 이렇게 자기라고 부르지 않고 의자에 앉은 이거 이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에요? 이거는 이름이 없단 말이에요? 여러분 그것도 이름이 없단 말이에요. 이것은 뭐냐하면 이것은 이름이 없습니다. 나는 영혼의 경험입니다. 이랬어요. 진짜 자기는 진짜 나라는 것이 있다면 진짜 나는 영원의 경험이에요. 근데 그 영혼이 뭐냐? 영원이란 자유롭고 자유로운 게 자기라니까요. 무한하며 한정이 없는 거에 몸에 갇혀 있지 않고 생각이나 의식이나 어디에도 제한돼서 한정되지 않은 게 진짜 자기고요. 시간이나 공간 속의 위치가 없는 게 진짜 나예요. 그게 영원이고 여러분은 지금 이 몸이 날아가면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이 나만을 나라고 여겼잖아요. 이건 내가 아니에요. 이거는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 소리랑 똑같은 게 여러분 몸이에요. 여러분 마음이고 이 소리는 1년 따라 생겼다 사라지잖아요. 근데 이 소리가 2년 따라 생겼다 사라졌는데 어디 있다가 나타났죠? 얘가 이 소리의 전생은 어디 있죠? 이 소리가 전생에 있으면 이 소리는 전생에 지금 뭐하고 있을까요? 어디서 먹고 있다. 갑자기 일로 윤달이 있을까요? 이렇게 소리가 여기 안에 소리가 있나요? 이걸 막 분해하면 소리가 나올까요? 이거를 분해하면 소리가 나올까요? 공기를 막 뜯어보면 공기에 소리가 나올까요? 나는 이 소리 계속 듣고 싶다고 닭이 달걀을 매일 낳는 걸 보고는 달걀을 많이 갖고 싶다고 닭배를 쬐고 나면 달걀이 많이 없는 것처럼? 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싶다고 이거를 뜯어봐도 소리가 없고 이걸 뜯어봐도 소리가 없고 공기를 뜯어봐도 소리가 없어요. 어디를 찾아봐도 소리가 없잖아요? 소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없어요. 오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창조가 되죠? 뭐 이게 창조론이라는 게 뭐 진화를 하는 건가요? 아니면 뭐 누가 와서 탁 만들어낸 건가요? 창조한 건가요? 어떻게 창조가 돼요 없는 데서 있는게 창조가 되잖아요? 없는 데서 어떻게 있는 게 만들어져요. 조건이 합쳐지면 인과연이 합쳐지면 이 소리가 날 만한 인연이 모이면 소리가 생기는 거예요. 2년이 모이면 인연이 또 이렇게 이런 인연이 모이면 소리가 사라진단 말이에요. 그니까 이 소리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생겨났다가 2년이 다 하면 사라지는 거예요. 그리고 끝 어디서 온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2년 따라 왔다 인연따라 가고 끝났단 말이에요. 이건 아무 흔적을 안 남기고 그냥 가버렸잖아요. 이 소리 때문에 뭐 지구에 무슨 뭐 에너지 부피가 커졌습니까? 뭔 영향을 미*습니까? 이 소리 때문에 누군가가 막 상처를 받았습니까? 아무 일이 없단 말이야. 그냥 2년생 이념별 인연법이기 전부예요. 또 뒤에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 숨겨진 어떤 이치 진리 이런 게 없다니까요. 숨겨진 건 자기에게 있죠. 여기 그렇게 말해요? 비밀스러운 것은 어디에도 없다. 비밀스러운 곳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어떤 비밀도 없다. 모든 것은 대낮처럼 화나고 분명하다. 삶은 단순하다. 그럼 이렇게 이렇게 대낮처럼 분명하잖아요. 여기 숨겨진 게 있습니까? 이게 다예요. 전혀 숨겨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 뭐라고 했냐면요? 사람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숨겨진 것을 만들뿐이다. 백 프로 명백히 드러나 있단 말이야. 그냥 진실은 왜냐 생겨나고 사라지고 끝인 이 이념법의 진실이 그냥 이렇게 그냥 드러나 있단 말이야. 그 이거 끝이에요 깔끔하잖아요. 명백하잖아요. 그런데 이 중에 계중에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난 종소리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난 속으로 막 종소리 너무 듣기 싫다거나. 아니 이게 꼭 마치 층간소음하고 소리가 비슷하다거나 뭐 이런 분별을 해서 속으로 엄청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죠. 예를 들어 없었겠지만 어떤 소리를 이 소리를 듣고 스님 종을 치고 이거 하지 마세요. 마치 층간소음 같아요. 하는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사실은 이것은 비밀이 없죠. 명백히 다 드러나 있죠. 이게 다 해요. 다 드러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 안에서 비밀을 만들어요. 자기 마음 안에서 분노해 혼자서. 근데 그쪽으로 분노하면 남자한테 못 먹을 것 같으니까 분노 안 한 척하는 것까지 만들어내서 속으로 혼자서 막 분노한단 말이야. 이건 안 보이잖아요. 딴 사람들에게 안 보이잖아요. 자기 안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믿고 그것을 비밀처럼 애지중지하면서 숨겨놨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그 사람은 속으로 생각해요. 아 도형들은 이 소릴 들어도 나처럼 괴롭지 않겠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막 비밀을 만들어 놓는단 말이에요. 근데 이것은 아무런 숨겨진 게 없어요. 왜냐하면 다예요. 이게 다인데 이게 거룩합니까? 성스럽습니까? 아니 이게 듣기 싫고 짜증 납니까 얘의 인생은 아름다웠나요? 추했나요? 얘는 인생 한평생 자아 살다 갔나요? 아니면 한평생 살면서 누군가를 괴롭혔나요? 괴롭히는 거 내한테 있는 게 아니죠. 우리들에게 있죠. 그죠 어떤 사람은 이 소리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고 어떤 사람은 이 소리 때문에 행복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 소리 때문에 괴로운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은 최악이야. 이랬겠죠. 이 정소리의 인생은 최악이야. 이러겠죠 근데 이 소리를 듣고 좋은 사람은 너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겠죠. 우리 인생이 소리랑 똑같다니까요. 이 종소리랑 똑같다니까요. 2년따라 생겨나고 인연따라 사라지고 인연을 맺고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 5 노즐을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왜 내가 없으므로 내가 있음으로 3개가 있고요. 우주가 있거든요. 내가 이 우주의 한 부분의 역할을 하는 걸 통해서 전체를 살리고 있는 장 장엄한 광대무변한 일을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가 완벽하게 해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될 일인 거야. 이 세상에서. 나는 그것을 하는 걸 통해 이 우주에 기여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일론 머스크가 돼서 뭐 무슨 세계적인 대기업가가 돼가지고 그 세계를 막 뒤바꾸고 이런 사람이 돼야만 이 세상에 기여하는 게 아닌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가 좋아서 하나 적어왔는데요. 이 장혜순 선생과 장혜순 선생이 우리나라에 이렇게 살아있는 노자 이렇게 막 불렸었던 분이세요. 이분 독실한 천주교 신자셨고요. 근데 이현주 목사님하고 같이 쓴 책에서 이렇게 말해요 이은주 목사님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라고 하는 거창한 의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대로 가면 모두 함께 멸망할 것이 뻔하다면 내가 저거 바꿔야 돼. 하면서 저거 안 바뀌어 하고 막 막 울고불고 막 괴로워하면서 아파하면서 이럴 것이 아니라 그렇게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느냐? 나만이라도 살아남고 나만이라도 잘 사는 그런 길을 찾겠다라고 하는 그런 몸부림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의 노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노화는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 배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노화는 살아남았고 그 살아남은 한 사람 때문에 결국 인류가 살아남게 됐다는 얘기죠 했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장일수 선생님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소승불교의 아라한을 지 혼자 공부하는 수행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 몰라서 그러는 거다. 한 사람의 깨달음은 전 우주적인 사건이다. 알아앉음 되면 제도해야 할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야. 성경의 말로 해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그런 전일적 존재로 서느냐 못 서느냐 그것이 중요한 거지. 또 어떤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그가 속해 있는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연주 목사님이 그래요. 장외선 선생님이 치약산에 그냥 이렇게. 자신들 하면서 살고 계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해보겠어요. 위대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돼야 되기 때문에 서울에 가서 정치를 하고 대통령이 되어서 세상을 바꿔야만 되는 게 아니다. 그냥 치약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진리를 이야기하고 또 내가 소소하게 진리답게 살고 그것 자체가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바로 그 일이라는 거죠. 나는 왜 이렇게 작은 작은 반찬가게. 밖에 못하면서 저 서울에 잘팔리는 반찬가게도 아니고 시골에 반찬가게에서 그냥 반찬이나 팔면서 나는 7밖에 못 되는 걸까 어떤 보사님이 그러더란 말이죠. 그게 왜 그런 일이 돼야 되죠. 그 자기 생각 아닙니까 먹는다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이에요. 먹는다는 일이 없으면 사람을 살릴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이 세상은 누군가 1명의 어떤 임금이나 이런 사람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죠. 그건 그 사람은 거기서 역할을 하는 것 뿐이지. 각자 자기가 1명 한 명의 텀디바퀴가 연기된 하나하나의 존재가 온 우주 전체와 둘이 아니게 연결돼 있는 동등하게 전개한 존재인 거예요. 내가 바로 우준거예요. 내가 바로 이 우주 전체를 굴리고 있는 장조주공 하나님이고 조물주고 붓 따인 거예요. 자기가 무엇을 통해 나는 이 부처를 현현시키고 있을까요? 그것을 자격이라 그랬어요. 선사 선생님들은 작용 전체 작용 내가 밥 먹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농사 짓고 아들 밥 해먹이고 회사 가서 돈 벌어와서 자식 주고 이거 하나하나 이 작용 전체가 이게 전체 작용이라는 거예요. 내가 지구 작은 지역에서 하고 있는 요 반찬 만드는 요 일이 온 우주 전체를 매겨 살리는 전체 작용이라는 거예요. 이게 법의 작용이라는 거예요. 이게 법의 작용이죠. 우리가 그러니까 반찬을 만드는 이 일과 오늘 점심 뭐 먹을까? 오늘 김치찌개를 해 먹어볼까? 이 김치찌개 먹어야지 하고 결정 내린 이 일과 테슬라 회장이 내가 트위터를 한번 사볼까? 그런 일하고 똑같은 결정이란 말이에요. 똑같은 결정 아니에요. 그냥. 겉에 드러난 모습은 엄청난 모양의 차이가 있죠. 엄청난 모양의 차이가 있죠. 동등한 이 법에서는 김치찌개 먹어야지. 이게 법이고 트위터에 있어야지 이게 법이라니까요. 똑같은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다 법의 작용이라니까요. 이거 전체 작용이에요. 똑같은 동등한 부처의 작용이에요. 하등에 차별이 없어요. 이게 현상 세계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내가 자기가 먹을 밥 김치찌개 금융 결정이나 테슬라에서 트위터를 인수하는 건 엄청난 차이겠죠. 겉으로 봤을 때는. 근데 법에서는 여러분이 아들에게 아들 밥먹어 하든지 아니면 어디 여러분이 정치를 해가지고 우리나라에 헌법을 하나 바꾸든지 그 일이 동등하다니까요. 이 법에서는 뜻 앞에 잔다고 하니까요. 그게 할과 방이고 똑같은 법이라니까요. 마삼근이고 법을 써서 우리가 이 마음 하나를 써서 부처 하나를 써서 김치찌개를 선택하고 테슬라를 선택한다니까요. 전부다 마음 알아서 움직이는 거예요. 정치인 뭐 경제인 전부 다 이 마음이 없으면 어떡해. 살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정치인 그 경제인 그 결정 하나가. 나라를 살리고 죽이는 그 길장 하나가 그 사람 머릿속에 나온 거 계십니까? 그럴 수 없어요. 부인 자기 혼자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자기가 생각해가지고 자기 전쟁을 일으킬 수 없어요. 그 2년 있잖아요. 2년 그 사람이 살았던 인연 그 사람의 앞에 뒤에서 자기가 배워왔던 것들 그 주변 조건 러시아의 어떤 상황들 전반적인 역사 모든 상황들이 연결되어서 그런 결정 하나를 내려요. 제가 그 사람이 죄가 없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거 2년이 만들어내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인생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크든 작든 내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자기를 하고 있잖아요. 근데 내 맘에 들어 안 들어. 그럼 자기 생각이에요 분별이에요? 그 노래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사니까 나는 내 마음 내 인생이 마음에 안 들어. 이걸 믿으면서 내 인생을 바꾸고 싶어하고 내 인생은 못났다고 여기고 난 다른 사람의 인생처럼 멋있게 살고 싶어라고 여기면서 자기를 비하하면서 자기를 괴롭히면서 평생을 살고 있단 말이죠? 그러면 얼마나 서글픈 인생의 연기하겠습니까? 근데 놀라운 것은 그거는 거짓된 자기 생각에 불과한 거죠. 진실은 내가 오늘 점심때 아이한테 무슨 반찬을 해줄까? 집안 청소를 하나 부처님이 하는 행과 전혀 다를 게 없단 말이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행위 하나하나가 그대로 연기적으로 온우주 전체를 살리고 있는 행동인 것이죠. 나는 지금 이런 부처로서 나를 부처 자격을 지금 매 순간 하고 있단 말이야. 이 말을 어떻게 들어요? 부처가 듣고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제 얘기 듣고 있었는데 숨 계속 쉬고 있었잖아요. 내가 숨졌습니까? 진짜 내가 숨진 거 맞나요? 내가 의도를 해서 숨졌습니까? 너희도 한 번도 안 했잖아요. 이것도 안 했는데 저절로 취했었잖아요. 근데 가끔 내가 숨 쉬는 걸 이것도 하나 하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 나 내가 숨쉬는데 하고 이렇게 이러면은 잠시 어 내가 의도하니까 숨 쉬네. 이렇게 느껴질 수 있죠. 그죠 잠시 그래서 느껴질 수 있잖아요. 근데 대부분이 그러지 않잖아요. 근데 잠깐 그렇게 느낀 거 가지고 내가 의도해서 숨 쉬는데요. 이런단 말이에요 이게 뭐가 같으냐면 나는 의도에서 돈 벌었는데요. 이 말과 똑같아요. 숨 쉬는 것도 의도해서 숨 쉴 수 있죠 하려면 근데 이게 평소에 이게 항상 이렇게 되는 게 아니듯이 본래 숨 쉬고 있듯이 법 하나가 숨을 쉬게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여기 계신 분 여기 계신 분 여기 계신 분들이 숨쉬게 하는 그놈이 다른 놈이겠어요. 같은 하나님이라니까요. 이거는 이제 기독교인 분들은 좀 이해를 어려워 하시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노릇노릇 노로 이렇게 분화해서 그 신성이 여기저기 이렇게 같이 있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랑 같을 수가 있지? 어떻게 둘이 아닐 수가 있지. 그래 한번 더 접해보* 못했다 보니까 그게 이제 낯선 거죠. 분별의 구조에서는 이해할 수 없죠? 어떻게 하나가 전체고 전체가 하나 수가 있어요? 말이 안 되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사는 걸 통해 온 우주를 장엄하게 살려내고 있고 부처님이 2500년 전에 그 성스러운 길을 걸으셨던 것과 동등한 평등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다만.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삶의 시간보다 그러한 생생하게 깨어있는 삶을 부처의 삶을 분별하느라고 죽이고 있는 시간이 많았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생각을 자꾸 이제 좀 내려놓고 생각을 내려놓고 생각 아닌 언어 개념 이름 모양 그거 잠시 내려놓고 그냥 마주해 보란 말이야. 세상은 세상을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냥 마주해 보세요. 제가 아니 한 30년 전에 절 앞을 거닐다가 꽃 한 송이를 맞이했던 이야기를 가끔 했었는데. 이걸 읽다 보니까 아 그렇구나 그거는 제비꽃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제비꽃이라고 제가 알고 이야기 그렇게 붙인 것이지만 이름이 떨어져 나갔을 때의 경험인 거예요. 이름과 개념이 떨어져 나갔을 때의 봄 난생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본 적이 없었단 말이죠. 그렇게 꽃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냥 볼 때 언제나 아는 거 아님 모르는 거였고요. 꽃이었고요. 꽃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그 경험 이전까지 제가 뭔 얘기를 했냐면 가을에 단풍 구경을 가는 걸 이해를 못했어요. 왜 단풍경을 가지? 봄에 꽃구경 가는 거 이해는 못했어요. 왜 꽃구경을 가지? 저는 시골에 살았다 보니까 너무 고개만 들면 다 단풍이고 꽃이고 근데 일상이어서 별로 감동적이지가 않았어요. 산에 왜 가는지 몰랐어요? 사람들이 왜 산을 가지 힘들게 다리 아프게 근데 그 그게 꽃과의 마주 마주함 그 꽃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 그 봄의 경험 하나가 있잖아요. 그 봄의 경험 하나 생각과 개념과 판단 분별이 개입되지 않은 그냥 투명한 바라봄 그거 하나가. 제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버렸어요. 그 이후에 제가 이제 제가 주어진 일들 해야 되는 주어진 일들은 열심히 이렇게 뭐 장병들 법회하고 교육하고 뭐 이런 건 했지만, 오온통 관심사가 이제 일상적인 관심사가 싹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그때부터 이제 산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처음 지리산을 그 제비꽃 경험 이후에 지리산을 처음 가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고 나서 그냥 너무나 가슴이 설레고요. 그 지리산을 한 발 한 발 걸을 때 너무나도 놀라웠어요. 그때가 마침 아주 너무나 뭐랄까 참 그 날씨도 좋고 그랬는데 너무너무 좋았어요. 와, 그럼 지금 생각하니 그렇네요. 그 봄꽃이 봄꽃을 마주하는 경험 이후로 그 절에서 여름을 보냈고요. 그 절에서 가을을 보냈거든요. 그러면서 그 뒷산을 네 오고 가면서 막 풀과 나무와 꽃들을 보태면서 제 그때 그 해에 제 사진첩을 보니까 이제 디지털 카메라로 전부 다 풀떼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전부 다 풀대기 요만할 때부터 이렇게 점점점점 커가는 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제 그 주변 산을 계속 다니다가 다니다가 가을이 돼서 제가 지리산을 갔네요. 그 해. 왜 기억에 나냐면 그 지리산에서 그 그 단풍의 막 절정인 단풍의 아름다움 속을 이렇게 홀로 걷고 있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아름다우는 장면들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러면서 이렇게 침묵 속에 마주하는 봄 그해. 겨울에 제가 태백산을 갔었거든요. 태백산에 평일날 아무도 없을 때 눈이 내린 다음날 갔었는데 그 기차를 타고 그곳까지 갔다가 태백산으로 올라가는데 눈이 내려서 막 항구도 없고 너무 음악이 추웠어요. 정말 영화 한 10도 이하로 떨어졌던 것 같아요. 어마어마하게 추웠는데 그 어우 지금도 생각이 나네요. 그거 정말와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상이 이렇게 하얗고 이렇게 하늘은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파랄 수가 있지. 그러니까 이게 한 발 한 발 걷는 곳이 너무나 감동이었어요. 그 달라진 게 뭔가 지금 이렇게 되짚어 보니까 아포미아 세포 보는게 달라졌어요. 이제는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게 감흥이 없는 거예요. 알고 보는 거 이것이 뭔지 알고 보는 거 이런 게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그냥. 아 근데 이것을 제가 그때는 뭐가 뭔지 모르니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기껏 표현한다는 게 사람들한테 그것도 이제 기껏 편한데 장병들한테 하는 거죠. 장병들한테 그 전방 올라가서 전복 올라가면 너무 아름답거든요. 높은 데 주로 있으니까 전방 올라가서 너무 아름다워서 막 감동 감동 감동을 하면서 올라와가지고는 이 마음을 얘기를 해야 되겠는데 얘기할 방법이 말은 너무 제한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로밖에 못 하니까 와 정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니? 너무 아름답지 않나 이러면서 막 아름다운 얘기를 했을 때 그 어이없는 당황스러운 황당한 장병들의 눈동자 뭔 얘기를 하는 거지 하는 그러면서 이제 제가 약간 어떤 느낌이었냐면와 이거 절대 말할 수 없구나. 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구나. 표현할 수 없구나. 퍼펙트도 이렇게 몇 번 얘기를 해 봤는데 너무 초라한 거예요. 말이 나는 지금 니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이걸 듣는 사람이 반응을 보니까 이 말이 너무 초라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입을 닫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때 제가 써놨던 글에 이런 말을 써놓은 것 같아요. 와, 정말 말을 할 수가 없다. 진짜 이거는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여전히 살고 있는데 나는 그냥 혼자 딴 세계에와 있는 것 같다. 이거를 어떻게 말을 하지? 어떻게 표현하지 이랬던 어떤 곳이 있었거든요? 그게 말이 아닌 거예요. 말과 생각과 해석과 판단 개념이 아니라 그냥 직접적인 마주함이에요. 이 세상과의 직접적인 조우. 세상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거예요. 우리는 그 감각이 모두에게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가난하기 때문에 모빌 앞에서 이래봤단 말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제가 중 삼 땐가 중이 때가 학교 선생님이 새벽부터 오라 그래가지고 저희를 데리고 저기 산에 올라갔던 기억이 있어요. 우리 학생들이 다 같이 올라갔는데 막 다 욕하면서 올라갔어요. 전부 다 이상한 괴짜 선생님 만나가지고 우리 웬 고생이냐 하고 올라갔거든 근데 그날 따라 막 주변 환경이 막 바쳐졌어요. 오묘한 풍경 속에 안개가 자욱한 산 정상에서 그 안개가 너무 신비롭게 좌우한 사이에서 붉은 어떤 빛이 올라오는데 우리의 학생들이 중학생들이 뭐라 그랬냐면와 이래서 산에 가는구나. 이래서 이 새벽에 길을 쓰고 가는 이유가 있구나. 그 애들이 알아요. 그거를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우리 기차 타고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러면서 주말에 그 선생님이 저 그 선생님이 얼굴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정말 아름다운 경험을 안겨줬어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김밥 계란을 싸가지고 소백산을 데리갔어요. 그 소백산 정상에 올라가서 제가 그때 옛날 필름 카메라로 정상에서 이렇게 뻥을 잡으면서 하나 찍었던 사진이 지금까지 떠올리거든요. 근데 그때 우리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산에 가면서 아, 이것이 산이구나. 서로 서로 감동을 했던 기억이 나요. 아까 말했던 그 장병들도요. 처음에 한 번 두 번 얘기했을 때 뭐지 하다가 나중에 이게 몇 개월 이게 가스라이팅을 해버리니까 장병들이 저한테 편지를 쓰면서 전역한 친구들이 여러 있었어요. 스님이 처음에 자꾸 저 자연 얘기하는데, 나는 지금 그게 내 최악의 지금 내 내가 서울 사람이 난 서울에 매연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강원도 와가지고 막 이 이것 때문에 내 죽을 것 같았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그게 뭔지를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 어떤 장병이 이런 얘기 하더라고요. 어느 날 아침에 자다가 일어나서 막 산이고 이러니까 그냥. 밖에 이렇게 화장실도 그때는 있고 이랬나 보죠. 밖에 나가서 그냥 이렇게 쉬하고 쉬하고 고개를 딱 들었는데 갑자기 막 이 전체 화면이 그냥 쨍하면서 바라보이는 게와 스님이 말한 게 이거구나. 이런 느낌이 들더라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우리는 누구나 그런 어떤 그냥 좀 투명하게 마주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요. 살다 보면 살다가 근데 그것이 뭐 그렇게 강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뭔가 어떤 풍경 속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산에 올라갔을 때 그 풍경을 바라보고 막 감동하잖아요. 그런 생각이야. 생각이 나는 감동이 아니잖아요. 그냥 그냥 가슴에서 저절로 나오는 감동이지. 설악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오색에서부터 오 색의 2시 새벽 2시쯤엔가 문이 열려요. 항상 문이 안 열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2시에 줄을 확 서 있어요. 사람들이 새벽 2시에 그 2시에 문을 딱 열면 이제 다 같이 업체를 하면서 올라가다가 정상에 탁 올라가면 이제 잠시 뒤에 이제 해가 뜨거든요. 그럼 모두가 그걸 바라보면서 모두가 함께 감동에 젖어있어요. 뜨는 그 순간 한 3분 5분 입이 딱 멈춰요. 그냥. 일시 장래가 그냥 간간이와 이 소리만 터져 나오면서 생각이 딱 묻어버려요. 사람들이 5분을 못가요. 한 3분 지나면 그때부터 이제 잘자 잘하면서 야 이게 뭐 어떻다 저떻다 사진 찍자 하고 뭐 사진에 남고 이러지만 그러나 그 첫 뭔가 생각이 딱 뭐지는 그 경험들이 우리 누구나 있어요. 특히나 어릴때 그런 경험들이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어릴 때 그런 경험도 있잖아요. 이걸 풍경을 마주할 때만 그런 경험이 있는 게 아니고요. 혼자 심심함을 못 버티면서 집에서 혼자 골방에 엄마 아빠는 일 가시고 집에 혼자 있을 때 너무너무 심심해서 할 게 없는데 자꾸 생각이 자꾸 올라와요. 그럼 자기 생각을 바라보는 경험 없나요? 자기 생각을 바라보면서 이건 뭐지. 왜 잠깐 이렇게 올라오지. 이 생각을 바라보면서 되게 신기했던 경험들이 있어요. 그리고 생각을 보고 있다라는 얘기 또 신기하고 그러면서 문득 그런 느낌 없었나요? 생각이 막 올라오는 걸 이렇게 보면서 그냥 생각해. 마구잡이로 이렇게 올라오는데 다만 이럴까? 엄마 나 누나나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그런데 뭉뚱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올라오는 니 생각 이게 나만 이러는가 이게 뇌가 이걸 이렇게 하는 걸까? 누나는 이거 똑같지 않을까? 같은 같은 같은 게 올라오는 게 아닐까 약간 이런 느낌이랄까요? 이게 어떻게 다를 수가 있지? 올라오는 생각에 내용물은 다르지만 콜라오는 그 자리가 어떻게 다를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마주하더라도 몸을 있는 그대로 경험을 하든. 느낌을 느껴요. 어떤 느껴지는 느낌이 느껴질 때 이 불교 입과사는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 지난 우리 BTN 촬영 때도 얘기를 했는데 어 수행하던 중에 혹은 마음 공부하는 중에 혹은 일상생활 중에 오 계란 해가지고 우리 중생심 분별심을 뒤덮어 버리는 탐욕심이라든지 뭐 의심이라든지 졸림이라든지 막 들뜸이라든지 이런 5 가지 우리 번뇌 망상이 막 올라올 때 그것과 함께 허용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허용한지 바라보라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벗네. 망상이 많아 하고 욕하지 말고 그냥 경험하라는 거예요. 판단 분변하지 않고 그걸 법념철하래요 오계를 관찰한다. 나를 뒤덮는 탐진지 삼독같은 그런 나를 뒤덮는 안 좋은 요소들이지만 그걸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그것에서 법을 본단 말이에요. 아 이거는 진작 아니구나. 왔다 가는 거구나. 실체가 아니구나. 무상과 고아 무화를 깨닫는단 말이에요. 그거에 진실을 거기서 본단 말이죠? 동등하게 나를 뒤덮는 어떤 나쁜 요소들 있잖아요. 번대망상 같은 나쁜 요소인 옥외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그게 법이 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칠각지라고 부르는 수행하다가 마음껏 하다가 고요한 마음의 고요한 상태의 어떤 환희심이 느껴지는 상태에 어떤 체험적 기쁨이 올라오는 상태 고요한 상태 이런 어떤 또 좋은 요소들의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어요? 그 또한 해석하거나 규정해서 야 내가 수행이 잘 되나봐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내버려두고 그냥 그걸 관할 뿐 직관 생각해서 판단을 멈추고 그냥 볼 뿐이란 말이죠? 그랬을 때 그것이 법이 된다는 거예요. 4년째 법령처가 된다. 봄이 된다. 또 5원과 18개를 관할하래요. 5원은 뭐냐면 내가 나라고 여기는 몸 느낌 생각 의지의식 이걸 그냥 있는 그대로 관할하는 거 보라는 거거든요. 거기 있으라는 거거든요. 세상 육군과 육경 육군으로 눈으로 보는 세상 귀에 들리는 소리 코에 맡아지는 냄새 몸에 느껴지는 감촉 내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들 그 모든 것을 그냥. 마주하고 그냥 알아차리고 그냥 경험하라는 거예요. 나와 세계를 그냥 통찰하라는 거예요. 다른거 할 게 없다. 그거 하면 거기서 법이 확인된다. 그게 4년차 법령 저 윗바산하거든요. 수많은 분들이 이제 여러분 그게 신기하지 않나요? 그 수많은 분들이 5만 가지 괴로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을 가지고 이제 저한테서 얘기를 하겠죠. 어떤 분은 뭐 강박 장애가 있고 우울증이 있고 외로움이 있고 질투가 있고 막 성님이 있고 화가 나고 욕심이 있고 막 온갖 게 있겠죠. 근데 샌들을 어떻게 그렇게 모든 문제를 지네들이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전문가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다 얘기해줄까요? 그 왜 가능할까요? 내용물은 다른데 구조가 똑같단 말이에요. 분들의 내용물은 다 다르잖아요. 전부 다 망상이잖아요. 그게 다 자기 생각이잖아요. 자 다 분들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치유가 되겠어요? 마음속에서 이건 좋아 이러고 집착하고요 이건 싫어. 이러고 버리려고 하잖아요. 그것만 하지 말라는 것밖에 없어요. 제가 와봐요. 용병은 재주가 없어요. 제가 다른 얘기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거기 직면하는 거예요? 거기에 싫다 좋다. 해석하지 않고 그냥 올라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거기 그것과 같이 잠시 있어주는 거예요. 판단 무별하지 않고 그냥 허용한 채 모든 게 똑같다니까요. 여러분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에 힘들고 괴로운 모든 문제들을 이렇게 해결할 수 있다니까요. 다추사 간택이니까 구워서 집 밖에서 가지려고 하거나 싫어서 버리려고 하는 것밖에 더 있어요. 전부 다 그 문제예요. 그러니까 너무나도 단순한 얼마나 단순해요. 가장 위대한 치유의 약은요. 가장 단순한 거예요. 가장 위대한 약은 가장 간순한 거니까요. 저 무슨 뭐 하버드 의대 최고 가는 교수님들이 막 10명 20명 모여가지고 이 사람 병을 나 깨주자 해가지고 아니면 이 사람의 심리적 문제를 고쳐주자 한다고 되겠어요. 우울증 걸린 사람을 하버드 교수 10명이 와가지고 막 고치려고 한다고 되겠죠. 당연히 되죠 되는데 그것도 다 돼요. 뭐든지 다 되는데 분별을 가지고 하는 방법과 이 무분별지로 곧장 들어가는 방법이 우리 생각에는. 내가 그래도 아빠한테 교수 10명이 와가지고 나를 이렇게 알려주고 하면 그게 훨씬 더 큰 치유가 되겠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니까요. 정말 그럴 수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그분들을 무시하는 말투가 말이 아니라 각자 자기에게 있는 자기 부처가 하버드대 교수 1000명보다 낮다니까요. 자기 자기 부처가 자기가 본래 붙여서 본래 법이고 폴리그 진리를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게 승이거든요. 나는 난 진리답게 나의 본래로 가고 싶어. 본래 나에게는 그 진실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그 마음 그게 청정한 승부예요. 승보 스님 머리 깎은 사람이 스님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잖아요. 이 청정은 불법성 3 부를 다 자기에게 갖추고 있어요. 자성 삼보라고 해서 이 자성 삼보는 내가 내 마음만 굳이 아는 게 아니라 인류를 구제해 줄 수 있어요? 아 위대한 교수님이 논문 써 가지고 인류를 구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능하다니까요. 우리는 가능합니다. 자기가 가능해요. 진짜 자기의 눈을 뜨는 이것이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에요. 이거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 정범 스님 법문을 들어보니까 그러시대요. 이 얘기를 하시다가 말고 아이고 참 나 이거 아 이거 참 이게 이게 이렇게 얘기할 얘기가 아닌데 이게 혼자만 그냥 혼잣말을 하세요, 그 이해가 돼요. 이게 지금 이런 이렇게 지금 작은 법당에서 이렇게 우리끼리 그냥 어느 남들이 보면 모르겠어. 야 저 뭐 어디 저 저래? 저리 장사가 잘 되네. 이러면서 아니, 마을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마을 종교가 없으시니까? 우리 와가지고 앞 얘기가. 여기 이렇게 이 치고도 이렇게 해놓으면 손님이 오겠어요. 장사가 되겠어요. 막 이러는 거예요. 이제 그런 그런 작은 장사가 아니거든요. 이게 지금 이렇게 근데 이게 참 아 이거를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도 이게 참 놀라운 공부예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