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
송곳니를 윗단추로 쓰는 사자는 완고한 재단사임에 틀림없다. 물소는 조여드는 오늘을 벗어버리고 싶다. 치수를 재는 앞발과 거부하는 뒷발이 가위표로 재단된다. 쌀자루나 풍선처럼 어떤 것들은 한사코 채우면 터지는 법이다. 늘 목을 내놓고 다니기 버릇해 온 물소가 단추를 풀기 위해 용을 쓰느라 눈 속의 실핏줄이 터져 뇌우(雷雨)가 쏟아질 기세다.
들판 가득 수 놓인 색색의 꽃들이나 산중의 아름드리나무, 망망대해 곳곳에 박힌 섬들 또한 하나하나 채워 풍경을 여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깨 짚어 시침질하는 속 깊은 궁량. 하늘이 겉옷이라면 숲은 어긋난 바람을 단속하는 방한조끼쯤 되려나. 아무리 어두워도 새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나무를 나누어 채우는 저 수많은 단추들은 이유없이 흔들리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차라리 지퍼처럼 단순하면 어떨까. 사자는 단추를 끝까지 채우려 들겠지만 물소는 마지막 남은 단추를 채움으로 새끼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빗물에 반지하방 문이 잠긴 것, 거기 사는 일가족이 수장된 건 억지로 채워진 것이다. 치수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이곳에도 노회한 재단사가 많다. 마치 열렬한 사랑처럼 물소를 부둥켜안는 자세를 곧잘 흉내 내곤 한다.
떨어져 나간 단추와 같은 단추가 없어 다른 단추들마저 버려진다. 버려진 단추들은 그때 비로소 눈을 뜬다. 실밥을 부둥켜안고 운다.
허공
허공으로 허공을 그릴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다
검은지빠귀가 날개를 편 모습만으로는 활공인지 착륙인지 알 수 없다
허공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 허물 수 있다
허공은 나태하여 소멸을 불러오지만 공허를 채근하여
전에 없던 생명을 조립하기도 한다
허공을 배경으로만 다루는 건 허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이다
허공은 빈 창고가 아니라 둥글게 쌓여 가는 돌무더기에 가깝다
더러 돌 틈에서 뱀이 기어 나오거나 나비가 날아오를 때
그때 비로소 누군가는 희망을 타전하거나 세기말의 자화상을 그려본다
허공이 품은 것은 은하의 별만큼이나 많아서
우리가 가진 것은 실은 허공이 본연의 모습을 잠시 잃을 때이다
허공이 정신을 차릴 때야말로 가장 가난할 때이다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한 줌 허공과 바꾸었을 때
그때 허공은 자신이 떼 준 살점의 수천수만 배를 청구한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
무너지는 것에는 더 많은 허공이 필요하고
어떤 것들은 메워질 수 없는 부피를 얻는다는 걸
허공은 제 몸을 허물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한곳을 향해 파도처럼 걸어가는 것도
꽃대궁처럼 좁은 골목에 포개어 넘어지는 것도
막무가내로 허공을 허무는 것이다
부피가 사라진 곳을 메우는 건 허공이지만
허공을 메우는 건 부피가 일정하지 않은 마음이라서
허공이 유일하게 몸을 바꾸지 않는 건
호환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진공의 슬픔 따위
사람들의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캄캄한 속이다
천지간 제일 부자인 허공이 가장 가난하다고 느낄 때이다
기울어진다는 것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자전하는 건 달 때문이야
햇빛이 골목을 찾기 좋게끔 수그린다는 것
조수 간만의 차로 조개 낙지가 개펄을 경작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사계의 색깔이 당신과 나
빛바랜 마음을 때맞춰 갈아입힌다는 것
장대 끝을 쥔 달의 손, 은근한 악력 덕분이야
장대가 꺾이고 출렁, 달이 떨어져 나간다면
자전축이 바뀌고 지구의 혈압이 급상승할 거야
개펄은 마르고 열대와 혹한을 오가는 폭풍도 생기겠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찻집 같은 지대가 없다는 것
낮과 밤, 계절의 얼굴도 그게 그거여서 화가나 시인들은
자신의 얼굴을 이젤에 걸거나 원고지 칸에 가두고 말 거야
언젠가부터 당신은 달을 동경하고 또 달의 힘을 믿었던 거야
그윽한 시선으로 그들의 심중(心中)을 떠받치고 있었던 거지
당신은 태생적으로 삼엄한 직각의 자세가 불편한 사람
그들의 각도가 가파른 층계를 만들 때에도
당신은 웃음으로 각의 기울기를 유도하지, 그것은
허리를 굽혀 층계를 내려오거나
최소한 어깨를 낮춰 악수를 청할 때 생기는 자세
알면서도 썰물로 드러나는 속내를 들킬까, 주저하는 자세
그들이 당신의 인력(引力)에 서서히 끌리면서 일정한 궤도가 생겼어
23.5도 비스듬한 번지와 번지를 잇는 산책로가 생긴 거야
마음의 기슭에 찰랑찰랑 물결이 마르지 않고 미풍이 불어오는 것도
기울어진다는 것, 그들이 갓 볶은 커피 향을 맡으며 대화를 나눌 때
어느 시인은 비로소 아름다운 사계의 풍경을 원고지에 담기 시작해
펜을 든 시인이 찍는 잉크가 달의 몸에 고인 크레이터라는
사실을 마침내 그들이 믿게 된 거야
크레이터 : 달은 지구로 오는 운석을 막아준다. 크레이터는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깊은 웅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