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의 등줄기 태백 산맥이 동해안을 타고 내려오다가 대관령 삽답령을 지나 두리봉(1.033m 강릉 ㅡ 정선 경계)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은 만덕봉(1.035m)을 이루고 만덕봉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 그 북쪽능선이 피래산(753.9m)으로 이어진다. 피래산에서 다시 나뉜 산자락은 북쪽으로는 괘방산(掛榜山 339.2m) 동쪽으로는 기마봉(383m)을 빚어놓았다. 특히, 기마봉을 중심으로 해안으로 악착같이 뻗은 북동쪽 일대 100 여 만 평은 동해안에서는 유일하게 해안 절벽 고원지대를 이루어 동해안 해안단구를 형성하고 있다.
그 깍아지르는 듯한 절벽 남쪽에 붙어 있는 것이 금진항이고 북쪽 언덕 밑으로 비스듬히 정동진 해변을 이룬다. 금진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기마봉 능선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옥계해변과 그리고 움푹파인 금진만에서 조금 벗어나면 망상해변 그리고 어달리를 거쳐 묵호항이 나타난다. 정동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괘방산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해안절벽 도로가 이어지고 그 끝이 안인진이다. 안인진을 지나 7 번국도를 타고 계속 올라가면 강릉시내가 나온다. 금진항과 정동진 사이의 작은 계곡 틈바구니를 겨우 비집고 들어간 것이 심곡항이다. 심곡항은 이곳 토박이 들이 집필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6. 25 전쟁 당시 인민군들은 그곳에 마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고, 마을 사람들도 전쟁이 끝나서야 알았다고 할 정도로 몇 년 전까지 오지였다.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심곡항과 금진항이 몇 년 전 해안도로로 이어졌는데, 그 이름이 헌화로이다. 삼국유사의 믿지 못할 설화 한 토막에서 유래된 헌화가에서, 모 지방대학 국문과 교수의 학자로서의 명성에 힘입어 강릉시 도로 명칭 공모에서 덜컥 걸려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신라시대의 귀족이신 순정공께서 자신의 아내였던 공주병 환자라고 의심이 되는 수로부인을 모시고 길도 없었던 그 위험한 절벽길을 걸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하지만, 기왕 그렇게 이름 지어진 이상 이름 값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실제로 헌화로는 아름다운 짓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 선에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고, 더구나 그 길은 제주 올레길 만큼 유명한 강릉 바우길의 9 구간으로도 선택이 되었다. 하여간, 1000 년 전 바람둥이 수로부인 덕분에 산길로만 겨우 다니던 심곡항과 금진항 사람들이 드디어 쉽게 소통을 하게 되었고, 관광객들이 슬슬 몰려드는 것으로 고마울 따름이라는 것이다.
잠시 1000 년 전 신라 시대 성덕왕 시절로 돌아가 보자.
신라의 귀족 순정공께서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길이었다. 순정공 일행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해안가에 자리를 펴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사실 이 부분이 의심이 된다. 순정공이 바닷가에서 동네사람들을 모아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해룡에게 아내를 돌려달라고 거북이에게 애원했다는 곳이 지금으로 말하면 삼척 임해정으로 전해지는데, 모 대학 국문과 교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슬쩍 눈감아 버리고 조금 북쪽으로 끌어 왔을 뿐이다. 그 음모에 물론 강릉시에서 선정한 심사위원들께서도 동참을 했고, 그 사실이 거짓말인지 뻔히 아는 시민들도 굳이 그걸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수로부인의 위력은 그만큼 컸던 것일까. 각설하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그때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순정공의 부인께서 뭇 남성들을 시험하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녀의 바람기를 표출하는 추파에 다름 아니었다. 칼처럼 뾰족한 절벽 위에 핀 철쭉꽃을 자기에게 꺽어 바칠 사람이 없냐며 아리따운 눈을 슬며시 내리깐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세미녀의 유혹이라 해도 목숨을 내걸고서 절벽 위로 올라갈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수로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실망어린 표정을 날렸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보건대 수로부인은 대단한 공주병 환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공주병 환자에게는 그를 떠받드는 멍청한 사람이 꼭 한 명 있기 마련이다. 살로메의 치명적인 춤에 넘어가 요한의 목을 자른 헤롯왕이나 서시의 요염한 자태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오나라 왕 부차처럼. 수로부인이 실망한 척 동해의 옥색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중에 지나가던 노인네가 있었다. 노인네는 손에 임신한 암소를 끌고 있었는데, 수로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주저 없이 절벽 위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는 붉은 철쭉꽃을 한 아름 따서 그녀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노래도 지어 바쳤다. 사내의 바람기는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라는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양이다.
자줏빛 바위 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진댄/제 꽃 꺽어 바치오리다.
노인은 <헌화가>라는 이 노래를 부른 후, 한숨도 미련도 없이 수로부인 곁을 떠났다. 요즘말로 하면 진짜 ‘쿨’한 사람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행위는 성적인 행위를 하고 싶다는 의사표시이다. 꽃은 처녀를 상징하는 것이며 꽃을 꺽는 행위는 처녀성을 정복하고 싶다는 심리적 표현이다. 결국 헌화가를 부른 노인은 수로부인에게 강한 성적 메시지를 전달한 후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그녀의 바람기가 드디어 성공을 한 셈이다.
수로부인은 미모 때문에 처용의 아내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납치를 대단히 많이 겪었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역신과 용, 괴물들이 주야로 나타나 그녀를 납치하곤 했으니 말이다. 순정공 일행이 다시 움직여서 어느 바닷가에 당도했는데, 갑자기 사나운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물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일행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역시 한 노인이 나타나 여러 입으로 떠들자고 선동하였단다. 백성들을 불러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항의의 노래를 부르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역사에는 이곳이 삼척 임해정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강릉으로 부임하는 일행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다는데서 또 한 번 의심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 내 놓아라’ 라고 협박하였고 마침내 용이 수로부인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거북이는 수로부인의 미모를 탐하는 남성의 성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삼국유사 수로부인의 헌화가는 성적인 상징과 암시가 곳곳에 배어 있는 노래였던 것이다.
몇 년 전 여름, 나는 허균에 대한 장편을 쓴다고 호언장담하고 강릉 시내에서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사실, 표면적인 이유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곳으로 숨어들었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 고향에서 사업을 시작하다가 실패를 했고, 그 사업 덕분에 집안은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스쿠버 강사를 취미 생활로 즐기다가 잠수 사고로 몸은 병신이 되어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몇 년 전에 문학과 만나게 되었고 그 문학이 그나마 허물어진 내 양심과 자존심을 어느 정도 세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상처 받은 심신을 달래기 위해 문학을 핑개 삼아 이곳 봉화 마을로 말 그대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유분방한 아나키스트인 내가 생활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자연 조건이었다.
금진항은 내 할머니 고향이라 친척들도 꽤 있다. 횟집을 하는 고모와 금진항에서 배를 타는 육촌 형님과 아저씨가 있다. 심곡항에도 역시 매운탕 집을 운영하시는 육촌 형님이 살고 계시다. 또한, 나의 생업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고 그것을 컨설팅 하는 일인데, 농수산물 쇼핑몰을 운영하는 나로서는 농산물과 수산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곳이 최적의 장소이다.
이렇게 나의 심신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자연 환경과 인적 인프라, 생업을 할 수 있는 더 없는 조건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숨어들다시피 한 이곳이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최고의 옳은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오 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 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이 이곳에서 정리가 되고, 이곳에서 내 인생을 마무리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수로부인의 바람기 때문에 생겨난 헌화가를 끌어들여 이름 지어진 헌화로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심곡항과 금진항에는 지극하고도 지독한 남녀상열지사가 널려있다. 나는 허균의 소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아내는 금진항 고모네 횟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나는 심곡항 산 밑의 작은 집에서, 망치 매운탕을 하는 시골식당 육촌 형님의 소개로, 돈 한푼 주지 않고 살게 되었다.
또, 내가 돈을 벌수 있는 유일한 재주인 인터넷 쇼핑몰로, 금진항에서 나는 대게와 옥계 벌판에서 재배한 해풍 맞은 배추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은 일 년에 육 개월만 하면 되었고, 그 이외의 날들은 백수건달 마냥 빈둥거리며 경치 좋은 헌화로를 제집처럼 들락거릴 수 있다. 아내의 일 때문에 우리 부부는 헌화로를 사이에 두고 금진항과 심곡항에 떨어져 있지만, 밥을 먹으러 수시로 횟집에 들린다. 횟집에 가서도 일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억척스런 고모 덕분에 그것 또한 여의치 않다. 설사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설픈 일솜씨 때문에 피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아내를 태우고 헌화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입에 게거품을 물고 헌화로 이름의 부당성을 바람둥이 수로부인을 섞어가며 떠들고 있었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늙으나 젊으나 똑 같아, 똑 같아....”
“무슨 소리야?”
남들이 들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을 수도 있는 나의 이야기에, 아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나는 잠시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가 이쁘면 얼마나 이쁘다고........”
“.................”
운전대를 잡은 내 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아내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일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이곳으로 숨어 들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 그녀와의 바람이 파국이 나고, 그녀와의 소문은 시내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한 번도 살아 본적이 없는 그녀는 딸아이를 따라 중국 훈춘으로 떠났고, 당사자인 그녀와 나보다 그 소문에 더욱 몸소리 치던 아내는 치를 떨며 통곡을 했고,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치다시피 숨어 든 것이다.
어쩌면 허균에 대한 소설은 나 같은 인간에게는 어림없는 지도 모른다. 나에게 어울리는 것은 금진항 심곡항 같은 어촌에 숨겨져 있는 삼류 신파 같은 사랑 이야기가 맞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절묘한 선택을 한 셈이다.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