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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 본연의 본성에 대하여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인간 본연의 본성입니다. 앞서의 문제 제기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초래한 지속가능하지 않은 경제 생태계를 논했습니다만, 사실 그 시스템은 우리 개인과 집단이 지닌 본연의 본성이 빚어낸 현상이자 결과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가 이토록 성공적으로 전세계에 퍼질 수 있었던 건 그 시스템이 전제한 인간 본연의 본성이 현실의 그것과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본성이란 것이 타고난 본능인지, 학습된 문화인지, 진화적 특성인지의 논란이 있습니다만 원활한 내용 전개를 위해 본성이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인간 고유의 본성을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가정합니다. 세상에 널린 수많은 자원들이 다수 대중의 수만 가지 욕구에 뒤얽혀 최적 균형 상태를 찾아가는 복잡 다단한 과정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정신활동과 사회적 역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굉장히 많은 경제 주체의 경제적 선택을 추적하고 계산할 연산 능력도 없었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는 공리를 세워 경제 참여자들 간 거래 동기의 균형점을 설명하였습니다. 개별 주체들의 각기 다른 상태를 일일이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인 하나의 인간 특성을 가정한 것이지요. 이 전제를 통해 사람들이 왜 그런 경제적 선택을 했는지 분석하고, 변화된 환경에서는 어떤 경제적 선택을 할지 예측할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 이론들은 근 2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세상의 근원적인 규칙에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옵니다. 때론 성공적으로 국부를 증진시켜 사람들을 풍요케 했지만, 어떨 때에는 예측의 실패로 가난과 전쟁 같은 큰 고통을 안겨주었지요. 확실한 점은 그 이론이 다소 불안정한 토대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인류 경제 활동의 꽤 많은 것을 설명하며 세계 질서를 다듬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합리성과 이기심’이 얼마나 빈약한 토대인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적인 경제 예측의 실패는 인간의 비합리적 선택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 주택담보대출의 부도율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그것을 엮은 합성 부채담보부증권은 건전하다는 뜻의 높은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썩은 합판으로 세운 나무집이 A급 안전진단을 받는 비합리적 상황이 난데없는 경제 위기를 촉발시킨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심리학, 뇌신경과학, 의료공학, 경영학, 조직학 등 통섭의 발달은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만도 않다는 것을 밝혀내기 시작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 사회적 동조, 손실 회피 편향, 앵커링 효과, 죄수의 딜레마 등은 사람이 비합리적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통계학, 컴퓨터공학, 정보통신기술, 매스컴퓨팅과 같은 거대 연산 시스템은 복잡하게 얽힌 사람들의 행동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이론을 실증했지요.
아울러 인터넷을 통해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이타적 행동에 기반한 비시장적 경제 활동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리눅스 토발즈는 자신이 공들여 개발해낸 리눅스 운영체제를 오픈소스로 공개하여 진화적 개발 생태계를 창조해냈습니다. 지미 웨일스는 위키피디아를 만들어 유저 참여형 거대 백과사전을 만들었지요. 그외 인디고고 같은 크라우드 펀딩에서는 선의에 기반한 적정 기술 사업에 사람들이 흔쾌히 자신의 자산을 기부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기적이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교환 경제가 사회 각 영역에 등장한 사건입니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예측 한계를 돌파하고자 등장한 현대 복잡계 경제학에서는 아예 기성의 이기적이기만 한 인간상을 부정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적 경쟁의 장으로 보았기에 사람들을 이기적 존재로 몰아간 것이었을뿐, 실제 인간 본연의 심성은 상호 협력을 전제한 조건부 이기성을 띈다는 주장입니다.
팃포탯(Tit for tat) 전략은 이기적 개인들이 상생을 이루는 진화된 협력 관계를 설명합니다. 기본적으로 인류는 협동을 통해 생존해 왔기에,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선의에 기반한 협력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의 선의를 믿고 협력한다면 혼자일때보다 강한 힘을 얻는 것이지요. 다만 상대가 선의를 배신하고 악용한다면 나는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에 필적하거나 더 가혹한 응징을 합니다. 상호 신뢰의 협력에서 나오는 장기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에릭 바인하커는 『부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저서에서, 단기적 손해를 입으면서도 배신자에게 처벌을 하는 비합리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행위를 ‘공정성을 지향하는 심성’이라 설명합니다. 경제적으로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부의 독점을 이유로 부자들에게 적대심을 갖고, 우파에 속하는 이들은 공정하지 않은 보상 - 소위 무임승차 행위를 요구하는 빈곤계층을 비난하는 데, 서로 대립되어 보이는 두 현상 이면엔 동일한 공정성의 원리가 들어있다는 것이지요.
자유시장 경제 질서의 실패가 참혹한 세계대전을 불러왔다고 비판한 칼 폴라니는 일생 동안 원시 경제 공동체에 존재했던 비시장 경제를 고찰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각자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행위에서 시장 경제가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폴라니는 이것이 근대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잘못 해석된 설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급자족하던 부족 공동체에서의 경제는 추장을 중심으로 한 허브 앤 스포크 구조를 띄었으며, 소유권이 불분명하던 시절이었기에 공유와 나눔을 기반한 공동체 질서 유지의 목적이 함께했다는 것이지요. 부족 구성원들이 사냥하고 농사지어 얻은 생산물을 추장에게 바치면, 추장은 이를 다시 부족원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눠줌으로써 자연스레 부족 서열이 정해지고 제도와 문화를 강화시켰다고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21세기 천재 통합 사상가로 주목받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화폐가 가치 기준 척도의 목적으로 탄생한 게 아니라, 생필품의 나눔에 대한 감사의 징표로 건네주던 상징적 물품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마을 안에 가장 사냥을 잘하는 전사로부터 받은 멧돼지 고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개껍데기 같은 물건을 건네주었고, 이는 위대한 전사로서 기리는 표식을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이 교환 방식은 우리가 마트에 가서 돈을 내고 돼지 고기를 사오는 것과 겉모습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른 문화 양상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돼지 고기를 사면서 그저 내가 소유한 돈의 가치와 맞바꾸었다 생각할 뿐입니다. 돼지를 키우거나 잡은 사람과 일면식도 없을 뿐더러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어떤 물품을 돈 주고 살때마다 그것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함께 느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우린 세상 대부분의 것들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공유와 나눔에 기초한 감사함의 거래 전통을 잃어버리고 근대적 물물교환의 개념이 절대 가치인양 살아가고 있을까요? 어디서부터 우리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을까요?
아이젠스타인은 사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화폐가 고마움의 상징 대신 실용적 교환 수단으로 변화되었을 거라 추정합니다. 한 마을 안에선 누가 가장 뛰어난 전사인지 누가 나에게 멧돼지 고기를 선물해 주었는지 알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모르는 개인이 되어버리기에 화폐의 실용 가치만 남았다는 것이지요. 점차 거대화된 사회 집단 간 경쟁이 일어나고 승리를 위한 분업이 촉진되며 화폐의 실용 가치는 더욱 증대됩니다. 나눔과 감사의 징표 대신 내가 응당 받아내야 할 소유의 가치로서 인식이 가속화된 것입니다.
이후 인클로저 운동으로 촉발된 토지 소유권의 확립과 근대적 시장의 탄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물조차 화폐 가치로 평가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조지스트들이 주장한대로 자본화할 수 없는 대상을 자본화한 행위로서 세상의 불균형을 초래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과 세상의 연결을 분리시켰습니다. 소유권의 정의를 위해 토지를 분할하고, 시간을 잘게 쪼갰으며, 인류 무형의 유산과 지식의 소유권을 분배하고,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해야 했습니다.
제가 쓴 책 『이기심의 종말』 도입부에서는 이 현상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블라인드 스팟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소유의 구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와 상대방을 선긋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경쟁하는 사이, 우리 마음 속 이기심이 가득차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치열한 경쟁이 불러온 고립과 결핍, 존재의 빈곤을 채우기 위해 나타난 과시형 소비는 사람들을 극단으로 내몰고 명예 척도로서의 돈에 집착하게 만들었지요. 이 과정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무의식 깊이 자리잡은 습성이며, 이른바 모든 것의 자본화가 가져온 인간 고유 본성의 변질이자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간 본성의 발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 고유의 본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협력을 위해 선의를 베풀고 나눠줌에 감사를 표했던 상호 호혜적 이타성을 어디에서 되살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사상가, 운동가들은 이미 그 답을 제시했습니다. 세계 유수의 선지자들은 내면의 경계를 허물고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한 공감 능력을 키우기를 주문합니다. 인간 고유의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확장된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이 세계의 병폐를 치유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허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현실의 생계에 갇힌 사람들은 쉽사리 자기 것을 놓지 못할뿐더러, 이 세계의 경제 메커니즘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타를 분리시키고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현실 세계의 경제 생태계 구동 방식의 변화가 절실합니다.
최근 우리는 현실 세계의 경제 생태계를 새롭게 디자인할 방법을 손에 넣었습니다. 에릭 바인하커는 그의 책 말미에서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 그리고 이를 조합한 실행 전략이 엮여 새로운 부를 창출해왔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비춰본다면 2009년 발표된 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은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언급했던 선물(Gift) 경제가 지리적 한계를 넘어설 물리적 기술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경영 기조로 떠오르기 시작한 홀라크라시, 청록색 조직의 사상은 블록체인 거버넌스가 인간 사회에 녹아들게 할 사회적 기술이 되어줄 것입니다.
남은 건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을 결합할 혁신가, 즉 앙뜨레프레너의 등장입니다. 블록체인 기술과 홀라크라시가 접목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아이디어는 우리 인류 사회의 실체적 변화이면서 동시에 인간 고유의 본성을 되찾게 할 의미있는 제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에 존재했으나 잊고 지냈던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에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첫댓글 인간의 본성은 "자주사상"
"나"를 기준으로 해서 가족.민족들의
"자주성"을 추구하는 것 입니다.
즉..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족과 민족이 "자주적 삶"을 살수있는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인간의 본성인 기본적 요구를 무시하고
분업화 대량생산 체계를 추구 함으로써
대다수 인간들은 본성을 억압받게 되고
소수의 인간들만 본능에 충실할수 있어
"계급적 대립"을 피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새로운? 경제시스템은
조선시대의 경제시스템 이였던
가족. 민족간 "자율경제 체계"가 정답.
단..
각 정부들이 "덕치"를 시행하며
인륜과 천륜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발본색원 하여 엄단하면 됨.
.^^.
갑자기 어려워지네요.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합쳐서 보면 본성을 설명하기가 난해하고 그러다보니 '고유한 본성'이란 용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본성과 고유한 본성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서구철학의 방식이 대체로 분석적인데 이 때문에 이기심과 이타심이란 구분이 발생합니다. 근본적인 부분을 합쳐서 본성과 욕망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현실적인 부분은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점이 혼란스럽습니다.
역사나무님께서 이야기한 자주성에 근본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만, 과연 조선시대의 경제시스템이 가족, 민족 간의 자율체계였느냐는
잘 모르겠고 또 이것이 정답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모색은 너무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다만 서구적 사유로는 답을 받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소이다..^^.
새로운? 경제시스템은..
개인이 힘들게 모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민들이 사상적으로 각성을 하면
그 인민들 스스로가 정답을 찾아가며
시행착오를 개선하는 과정이 필요할뿐.
자주사상으로 각성된 북조선이 이미
경제시스템의 시행착오를 개선 하면서
정답을 찾아가는 중 이기에..
세계 자주화가 완성이 되면
경제시스템 또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구촌 전체가 조선식 경제시스템으로
탈바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태.양키쉐이들이 싸질러논 똥들
수많은 오류와 왜곡된 이념의 잔재땜에
다소의 혼란은 불가피할 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생존과 도태가 결판나게 될것 입니다.
.^^.
본문 글 감사합니다.
새로운 접근과 분석, 대안 등 신선합니다
댓글 역사나무님,선비님 글도 동의, 공감합니다
저는 어렸을때 기억으로 어른들끼리라도 나누는 말씀에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ㅎ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이기적' 과 '이타적' 이라는 개념을 배워서 알게되었고... 뭐 나중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도 배우게 됩니다.
저는 막연히 다른사람들을 위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생각하다가... 개인주의는 나쁜게 아니라서 존중받아야된다고 해서 혼란스러웠던 기억과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도 나름은 '나쁘지않는 행동'이 아니라 '바람직한 행동'을 하며 살아야된다는 인식과 지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
철학이 해석고자하는 근본적인 화두
대표적으로 성선설,성악설...
이 두개로 해석하려니 막히는 건 당연한 것 같고...
욕망과 이기심은 사회체제와 규범, 교육으로 그런것을 기반으로 하는 '행동'은 어느정도 제어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인 식.의.주 해결 주체?문제가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옮겨가면서 이기심과 욕망은 더 커진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