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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思春期)
인생에 찾아오는 단 한 번의 봄.
모든 생명에 자비로운 그 따뜻한 봄날이 내게는 어찌 그리 혹독하고 매서웠던지,
더 이상 순수한 소녀가 아닌 지금에도 나는 그 봄의 기억에 눈물이 난다.
[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스물네번째 이야기]
"응, 거기서 일자로 여기까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아, 이젠 알것 같....아악!!!!!!"
열심히 언니 단이에게서 자수 지도를 받으며 이제는 좀 자신감이 붙었다는 듯
언니를 올려다 보며 웃던 륜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륜은 재빨리 아래에서 수틀을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내었다.
끔찍스럽게도, 방금 륜이 꽂아넣은 바늘이 왼손의 약지에 꽂혀서 따라나왔다.
륜은 신음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바늘을 뽑았다.
그러자 붉은 피가 뽑은 자리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를 지켜보던 단은 혀를 끌끌 차며
조그만 병과 깨끗한 수건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게 그만 하라니까, 괜한 고집을 부려서.."
병 안에 들어있던 것은 증류주였다.
술을 적신 천으로 륜의 상처부위- 한 두 번 찔린 것이 아닌듯 온통 울긋불긋 피멍이 들어있는
손가락들을 닦아준 단은 다시 혀를 찼다.
"그냥 내가 놓은것을 네가 한것이라고 해,
어차피 남자들은 그런거 몰라,"
단은 똑같은 도안으로 수놓은 완벽한 자신의 자수를 집어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륜의 표정은 단호했다.
"싫어, 꼭 내가 해서 줄거야"
"이러다가 손가락에 구멍 나겠다"
언니는 반은 염려가 되어 장난스럽게 한 말이었는데 륜은 완벽한 산을 그리는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은 륜의 성난 눈빛에 어쩔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꽃에 피나 안묻게 잘 해,"
륜은 조심스럽게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노란색 국화 위의 파란 나비를 수 놓았다.
동생이 또 손을 찔리지나 않나 한참을 지켜보던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이 수놓은
륜과 똑같은, 그러나 완성된 자수를 들고 자수 부분만 오려 부채로 만들려 오려놓은 비단 천 위에
대고 꾀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단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다.
"참나, 그 놈의 샤오룬 도령인지 뭔지가 사람 잡겠네,
한 달 동안 서신 한 번 보내지 않는 놈이 뭐가 이쁘다고..."
륜은 그 말을 못 들은척 하였지만 그녀의 손 끝은 바르르 떨렸다.
회계에 있는 정혼녀의 생일에 참석하기 위해 간 샤오룬은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처음 두 주는 무덤덤하게 생각하던 륜은 점차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샤오룬이 정혼한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회계에 다녀오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대개는 일주일 안에
끝나는 짧은 방문이었거나 조금이라도 늦어질 경우라면 샤오룬은 늘 사람을 통해 그것을 알려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짧은 글 한 장 보내지 않았다.
샤오룬이 가기 전 냉담하게 대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륜은 샤오룬이 늦어도 이 주 안에는
오겠다 싶어 샤오룬이 떠난 날부터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자수에는 소질이 없던 륜의 솜씨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보다 늦어지는 샤오룬의
소식없는 귀환 때문인지, 자수는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수를 놓는
손끝은 더디어졌다.
륜은 수를 놓다말고 흘끗 단의 수틀을 쳐다보았다.
똑같은 도안으로 시작한 단의 것은 벌써 완성되어 마치 꽃과 나비가 살아 튀어나올 것만 같이 생생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 비교한 륜의 것은 도저히 똑같은 도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오기가 생긴 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자수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보, 내가 모른척 좀 했다고 지금 복수하는 거야, 뭐야"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다닌다.
얼굴도 모르는 회계의 의리의리한 대갓집에 살며 비단옷과 값비싼 보석 장신구들로 온 몸을 감싼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인 샤오룬의 정혼녀가 샤오룬이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일까?
륜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샤오룬은 진 대인에게 일정이 생각보다 늦어질 듯 하다고
서찰을 보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륜 못지않게 속이 답답했던 이화 부인이 진 대인 저택에 들어갔다
하녀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 날 이화 부인은 퍽이나 속이 상한 모습이었다.
"서찰 한 장 더 쓰는데 손이라도 부러졌다니,
아무리 바쁘시다지만... 그런 말을 하녀의 입을 통해 듣게 하신 대인 어르신도
참 야속하시구나,"
서용은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로 집에 들어왔다 밥상 머리에서 하소연 하듯 푸념하는
이화 부인을 보고는 혀를 차더니 그대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니, 왜, 더 잡수시지 않고요,
아직 손도 대지도 않았는데.."
"원, 어디 밥을 먹고 싶은 기분이 들어야지,
하루 종일 실컷 일하고 돌아왔더니 기다리고 있는게 고작 푸념거리나 늘어놓으며
남 얘기나 뒤에서 해대는 마누라니, 허! 참으로 그 밥 맛나겠구나!"
평상시에는 언성은 커녕 애처가로 유명한 서용의 갑작스러운 짜증과 호통에 놀란 것은
비단 이화 부인만이 아니었다. 부뚜막에서 쭈그리고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고 있던 륜과 단 역시
크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에이! 어디 집이 집 같아야지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마누라라고 있는 것이 나이는 먹어 진상 하는 짓이라고는 하루 왠종일 천박한 하녀들이랑
노닥거리며 남 험담이나 해대고, 남편이 와도 편하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하니!"
이화 부인과 서용이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몇십 년이 지나도록 서용이 이토록 역정을 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륜과 단은 아버지를 말리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 아버지. 아무일도 아닌걸 가지고 왜 이리 역정을 내세요"
서용은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말리는 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넌 도대체 언제까지 눌러앉아 있을게야?
한 번 출가한 아녀자가 시부모님과 남편과 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내일 해 뜨는 대로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
단은 아버지의 호통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륜이 최후의 수단으로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오늘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이에요, 그만 화 푸시고 어서 저녁 드세요,
저녁 드시고 목욕 하실래요? 제가 물 받아놓을게요..."
평상시에는 륜이 이처럼 눈웃음을 지으며 살살 녹는듯한 달콤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면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금새 못이겨 웃음을 짓던 서용이었다.
하지만 오늘 서용은 답답해 죽겠다는듯 인상을 찌푸리고 분노 어린 한숨을 쉬고는 륜의 팔을 뿌리쳤다.
"답답해, 허이구, 답답해 죽겠어!!
집이라고 있는게 어찌 이리 가시 방석보다 더 불편한지!!
내 답답해서 도무지 살 수가 없어!!"
소리를 내지르고는 서용은 뒤에서 붙잡는 이화 부인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그대로
집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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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식구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나온 서용이 발걸음을 돌린 곳은 최근 소흥 읍내에 들어선
객점이었다. 호화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까지도 변변찮은 주막 하나 없던 소흥에 있어서는
매우 획기적인 장소였다.
객점이라고는 하지만 외부인이 드문 고을에서 객점은 주로 마을 주민들에게 요리와 차, 또는 술을
제공하는 용도였다.
서용이 객점에 들어서자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술병과 단촐한 안주 한두 접시를 앞에 놓고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서용을 보고는 아는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서용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객점의 문을 지나 곧장 앞으로 가면 윗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
계단 뒤, 그림자에 가려 어두운 뒤에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곳에 구슬로 촘촘히 엮은 발을 드리운 입구 앞에 두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그 앞을 지키고 서있었다.
계단의 어두운 뒤라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았지만 혹여라도 멋모르는 누군가가 그 앞을 지나가다
호기심으로 발 너머의 안을 기웃거릴라 치면 앞에 버티고 서있던 사내들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앞을 가로막는다. 그런데 서용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것도 아닌듯 객점 안에 들어서자 마자
주저없이 이곳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보려 고개만 기울여도 정색을 하던 사내들이 어째서인지
서용이 들어가는 것을 순순히 내버려 두고 있는다.
게다가 한 명은 서용에게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우연히 들른 것이 아닌듯 서용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방 안으로 사라졌다.
하얀 등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그 아래 하루의 여독을 술 한 잔으로 달래며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바깥의 건전한 분위기와 방 안의 분위기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것치고는 무척이나 달랐다.
붉고 어두운 홍등 몇 개만이 곳곳에 걸려있을뿐 방안은 어두웠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앞에 또 다른 방 몇 개가 보였다.
문은 없었다. 입구와 같이 구슬로 엮은 촘촘한 발이 드리워져 있을뿐,
조명마저 어두운 그곳은 온통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서용은 한두 번 와본 곳이 아닌듯 익숙하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복도의 맨 끝방을 향해 걸어갔다.
지나가며 복도의 옆으로 보이는 방 안의 모습은 변변찮은 주막하나 없어 유희거리라고는 가끔 술 한잔
마시며 이야기나 하는것이 다인 건전한 소흥의 문화를 생각하면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어느 방에는 붉은 불빛 아래 남녀가 같은 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거의 반쯤은 벗은
모습으로 뒤엉켜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고, 다른 방안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우고 독한 술을 마시며
게게 풀린 초점 없는 붉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작패를 돌리고 있었다.
평소 서용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서용이 이런 곳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겁을 할 장소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용은 마치 제 집을 드나드는 것마냥 이런 주위의 모습에도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복도의 맨 끝 방에 도달한 서용은 구슬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조차 묶지 않은 봉두난발에 더러운 행색의 사내 셋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붉고 촛점 없는 눈으로 방금 방 안으로 들어온 서용을 쳐다보았다.
"돈은 갖고 왔소?"
세 사내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키가 큰 사내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서용은 말없이 주머니 춤에서 작은 가락지 하나를 꺼내어 사내에게 건넸다.
"못해도 금 열냥 값은 할것이오"
사내는 못미덥다는 듯한 시선을 서용에게 보낸뒤 밝은 불빛 아래에 가락지를
가져다 대고 살펴보았다.
사내의 붉은 눈이 커졌다.
초조하게 사내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서용은 사내의 반응에 만족한듯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난번에 하던 것을 마저 하도록 하지,
조건은 잊지 않았겠지"
서용은 자리에 앉으며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여전히 시선은 서용에게서 떼지 않은채 가락지를 탁자의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물론,"
세 사내 중 얼굴이 갸름하고 안색이 누르스름한 사내가 빠른 손놀림으로 패를 섞기 시작했다.
서용은 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부릅뜨고 마른 사내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판이 시작되었다.
세 사내 중 우두머리인 사내는 판에 참가하지 않고 탁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판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첫 판은 서용에게 무척이나 유리했다.
숫자와 문양이 새겨진 가느다란 나무 막대 여러개를 섞어 돌린 후 한 장씩 뽑아드는
다른 막대보다 자신이 가진 패의 숫자가 더 높으면 그것을 가져가고 나중에 여분의 패가
바닥이 났을 때 가장 많은 점수를 모은 자가 이기는 단순한 노름이었다.
첫판부터 세 판까지 서용은 내리 고지를 차지하며 연거푸 사내들의 돈을 자신쪽으로 끌어왔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어둡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서용은 단 세 판만에 자신 앞에
수북히 작은 산을 쌓은 돈무더기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서용은 겨우 동전 몇 닢에 정신이 팔려 그의 머리 위로 사내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 동무들의 운이 별로 따라주지 않는듯 하군요,
단 세 판만에 우리의 자금을 모두 끌어갔으니, 어디, 개평을 주는 셈치고
마지막으로 나와 한 판 해보지 않겠소?"
세상 만물의 법칙 중 이런것이 있다.
만약 당신이 길을 가다 우연치 않게 금화를 주웠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길을 조금 더 가다보니 또 다른 금화가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두 번째, 세 번째,
당신은 계속해서 금화를 발견한다. 당신은 이것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첫 번째, 두 번째는
우연으로 생각하며 우연한 이 행운의 기쁨을 감사히 받아들이던 당신은 세 번째에 도달하면
이것이 당신 자신의 운이라 생각하여 자만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행운이 세 번에서 끝날 것을 예상하고 그 이상의 욕심은 과욕이라는 것을
그리고 과욕은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 번째 금화까지는 세상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일지 몰라도 네 번째 금화를 줍기 위해 당신이
허리를 굽히는 순간 당신의 뒤에서는 당신의 주머니 뿐만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 노리는
위험한 도둑이 서있을테니까,
서용은 간만에 맛본 행운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그만 두었어야 한다.
그러나 동전 몇 닢의 달콤한 무게는 반 백년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살아온 그의 지혜의
눈조차 가려버리고 말았다.
다른 두 명과 달리 우두머리 사내의 실력은 범상치 않았다.
판돈을 아까의 한 판에 걸던 것보다 훨씬 적게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딴 돈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사내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이번에는 대형의 운보다 내 운이 더 좋았나 보군요,
어떡합니까, 제가 대형의 판돈을 모조리 도로 가져와 버렸으니"
서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빨리 남은 돈을 새어보았으나 다시 한 번 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서용은 쉽사리 물러날 수가 없었다.
동전 몇 닢만 남은 주머니를 더듬던 손에 아까의 그 가락지가 만져졌다.
서용은 망설였다, 그런 그의 눈을 본 사내는 음울한 눈으로 비웃으며 그를 턱끝으로 내려다 본다.
"그만 하시겠소?
거 보아하니 남은돈도 없는것 같은데..."
비아냥 거리는 듯한 사내의 말투는 서용을 은근슬쩍 떠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의도했던 대로 서용은 발끈하며 이성을 잃고 말았다.
서용은 가락지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가락지 걸고 마지막으로 한 판 더 합시다,
만일 내가 이기면 자네가 딴 내 돈 다 돌려주고 만일 자네가 이기면 이 가락지를 주겠소"
그러자 사내를 비롯해 뒤로 물러나 서용을 지켜보고 있던 두 사내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가락지, 혹 어디서 훔쳐온 장물 같은거 아니오?
보아하니 돈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귀한 물건이 났는지는 몰라도
그런 확실치 않은 물건을 받았다가 괜히 나만 피보는 거 아닌지..."
그 말에 서용은 발끈한다
"무슨 말이오, 장물이라니! 이건 우리 막내딸이 정혼한 도령에게서 받은 것이오"
"어이구, 그러면 더더욱 받을 수 없지!
딸이 정혼의 상징으로 받은 이런 귀한 물건을 받았다 나중에 와서 돌려달라
깽판 칠지 어찌 알고 내가 이런 것을 함부로 덥썩 받는단 말이오?"
사내의 말에 서용은 짐짓 거드름 피우는 듯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흥! 그까짓 가락지 하나 쯤!
내 딸의 정혼자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가 보구만, 내 딸의 정혼자는 바로 저 오양 진씨
가문의 차기 당주이신 샤오룬 도련님이라오, 그까짓 가락지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딴건 선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오, 도련님께서 그동안 내 여식에게 갖다 바친 보물이
얼마인데, 그것에 비하면 그 가락지 하나쯤은 새발의 피와 마찬가지인 하찮은 것이란 말이오!"
사내들은 짐짓 놀란척 한다.
"오양 진씨? 아니, 그런 귀족 가문이랑 대형 같은 평민이 사돈지간을 맺을
사이라니? 그걸 어떻게 믿어?"
서용의 거만한 미소는 더욱 더 커졌다.
"자네들 이곳에서 지내면서 한 번도 내 딸이 누구인지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로구만.
이 서용의 딸 이광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물고기가 헤엄을 치다 그 미모에 반해 헤엄치는 것도 잊고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침어(沈魚)의 미모를?"
"침어? 서이광?
아, 그렇다면 저잣거리에 소문이 자자한 그 절세미인이라던 서 소저가 바로
대형의 여식이었소이까?"
서용은 이제서야 뭔가 말이 통하는군, 이라는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딸에게 이딴 실가락지 하나쯤은 보석의 축에도 못 끼는 것이오,
샤오룬 도련님께서는 내 딸이 말만 하면 뭐든지 들어주시지, 그것이 꽃이던 옷이던 보석이던!
그 동안 도련님께서 내 여식에게 갖다 바친 것만 해도 회계에 고래등만한 기왓집을
사고도 남을 정도지! 자, 지금껏 잃은 돈은 아무것도 아니니 어서 패나 다시 돌리시오!"
"흠.....그렇다면야, "
우두머리 사내는 뒤의 다른 사내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신분도 확실하겠다, 돈을 떼일 염려도 없겠다...
그러면 다시 판을 이어가도 괜찮겠지.."
"당연하지!
내 딸이 누군데,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저 대단한 오양 진씨 가문의
마나님이 되실 분인데!"
큰소리를 떵떵 치는 서용을 보며 사내들은 음흉한 눈빛을 서로 교환하였다.
나뭇패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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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보다 훨씬 더 요란한 규모의 황대인 저택 안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인공 연못이 있었다.
회계산에서 끌어온 맑은 물을 풀어 놓은 이 연못을 파는 대만 몇 백명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고
주변을 귀하고 아름다운 흰 돌로 장식하고 그 위에 진귀한 푸른 돌로 다리를 만들어 놓는대만 금을 궤짝으로
몇 궤짝이 들어갔다.
황씨 집안 사람들은 날이 더운 날이면 종종 그 위에 백조 모형을 한 아름답고 커다란 배를 띄워
물놀이를 즐기곤 하였다.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오늘, 예인은 샤오룬에게 연못에 배를 띄우고 시를 지어봄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멀리서 보면 살아있는 거대한 백조와도 같은 배가 보슬비가 내리는 아름다운 연못위를 우아하게
떠다니고 배 안에서는 기녀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퍼졌다.
습기가 차 약간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공기 중에 향긋한 연꽃 향이 떠다녔다.
예인의 흰 손이 차갑고 맑은 수면을 스치고 기분이 좋은듯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보슬비가 내려 그런지 세상이 참 고요한 듯 합니다."
가만히 뱃전에 기대고 앉아 수천 개의 파문이 일어나가는 호수의 표면을 지켜보던
샤오룬이 무표정으로 예인을 돌아보았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이런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수 있다는 것이요,
세상에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 있을까요, 주나라 황궁에는 황제께서
황후를 위해 만든 커다란 산으로 둘러쌓인 정원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사슴과 공작 등
온갖 아름다운 동물과 새들로 가득한데다 사시사철 향기로운 향을 풍기는 아름다운 꽃들로
꾸며져 있답니다. 모든것이 너무나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도무지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지요,"
"사람의 손이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돈이 그리 만든 거겠지요,"
샤오룬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예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송구합니다, 별로 내켜하지 않으시는 데 제가 괜히 졸라 샤오룬님을 번거롭게 한것 같습니다"
샤오룬은 고개를 저으며 옆에 공손히 앉아있던 시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짧막한 대답 후 샤오룬은 시녀가 건네주는 담뱃대를 받아 입에 물었다.
흰 연기가 샤오룬의 입에서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예인은 무감정한 눈으로 고요한 호수 표면을 지켜보는 샤오룬을 안타깝게, 또는 애절한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켜보았다.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라니요,"
예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시녀가 바치는 재떨이에 재를 털어내며 샤오룬이 대답다.
그의 목소리 또한 그의 눈빛과 표정만큼이나 딱딱했다.
"제 기분을 풀어주시려 이곳에 이리 오래도록 남아 계신것 아닙니까,
굳이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좋아 하는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샤오룬의 짧막한 대답에 예인은 더이상 대꾸할 수가 없어 가만히 조용한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며 할 말을 찾았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그 아이에게 소식을 전한 적이 없다 들었습니다."
샤오룬의 입에서 한숨처럼 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만 내려가 보세요,
한 달이 넘도록 이리 소식도 없으면 걱정할 것이 아닙니까,"
"이해해 줄것입니다"
예인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마음을 모르시네요,
인내심 많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마냥
기다려 줄 정도로 인내심 많은 여인은 없다는 것을요,"
"그러면 예인은 여인이 아니란 말입니까?
예인은 그 동안 수도없이 인내해 왔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예인의 얼굴이 펴지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도 행복해하는 예인을 보며 샤오룬도 미소를 지었다.
다만 샤오룬의 미소는 쓰디쓴 마음을 담고 있다는게 예인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생일 이후 예인은 갑자기 몸져 누워 시름시름 앓았다.
생일 때의 일과 더불어 그동안 정혼자로서 홀대시 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샤오룬은
결국 소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회계에 남아 예인의 곁을 지키며 최대한 정혼자로서의 도리를
지키려 노력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예인의 병문안을 가는 것은 물론이요, 갈 때마다 자신이 직접 정원에서 꺾은 꽃들이나
자신이 직접 고른 선물을 들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고, 또 병약해진 예인이 혹여라도 다시 아프지나 않을까
가문의 의원까지 보내주는 등 정혼자로서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회계에서 지내는 동안 샤오룬은 그 어느때보다 예인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이나 점심 때 가서 그녀와 식사를 하고는 하루 종일 그녀의 옆에 앉아 예인이 하는
말들을 들어주거나 또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이 요즘 샤오룬의 하루 일과였다.
예인은 본래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샤오룬이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듯 하고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주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샤오룬의 옆에 있는 것이 전보다는 한결 편해진 듯 하루하루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인공 연못위 배 안의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샤오룬은 담뱃대를 물고 깊게 한 모금을 빨았다.
배의 가장 자리에 폭신한 보료를 댄 위에 반쯤 누운 자세로 기댄 샤오룬은
향기로운 담배를 피우며 나른한 눈으로 방울방울 파장이 이는 호수를 응시하였다.
예인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자기 자신도 모르게 샤오룬을 쳐다보고 있던 예인은 샤오룬의 눈이 자신과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예인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작 샤오룬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다시 눈길을 호수로 돌렸지만 말이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 말을 찾던 예인은 문득 궁금했던 것이 떠올라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우신 거에요?
한 번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샤오룬은 곁눈질로 흘끔 예인을 쳐다보았다.
"담배 연기가 싫으신 겁니까?"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니라...
샤오룬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게다가 흡연을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해서....."
웅얼거리며 말을 하던 중 예인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만 입을 다물어, 이 바보야!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성이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그에 대해 사사로운 것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다녔다는 것을 들키게 되잖아!
샤오룬은 담뱃대를 입에서 떼고 시녀에게 건네주어 물리게 하였다.
그리고 말을 하기 전 일부러 담배 연기를 예인이 있는 곳과 반대방향에 뱉는다.
"피운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귀족 남자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모두들 관습처럼 담배를 피우곤 했었다.
샤오룬의 사촌들 역시 열네 살이 넘으면 저마다 담뱃대 하나씩을 입에 물고 집안을 으스대며
활보하며 돌아다니고는 했는데, 샤오룬은 그 매캐한 냄새와 맛과 또 그것을 피우고 난 다음 날에
색이 검은 가래를 뱉곤 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샤오룬이 어느날 갑자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것은 그의 말처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보름도 안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샤오룬은 하루에 그 어느 흡연자들보다 더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아...그러셨군요,
......그런데 담배는 왜 피우시게 된거에요?
음... 바보같은 질문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저희 오라버니들이나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항상 궁금했거든요, 그것 참 맵기만 맵고 맛도 없는 것인데 항상
사내들은 마치 자랑인냥 담뱃대를 입에 물고 다니잖아요,"
우울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상사병인 것인지 오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샤오룬과의 어색함을
깨기 위해 예인은 일부러 밝은척 명랑하게 말을 했다.
그런데 무안스럽게도 샤오룬은 예인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하하...역시 바보같은 질문이었나요?"
샤오룬은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 없는 가면같은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 그 쓰고 매캐한 맛 때문에 피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맛있단 말씀이세요?"
예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번 호기심에 아버지의 담뱃대를 한모금 피워보았다가 된통 고생한 경험이
떠올라 예인은 몸서리를 쳤다.
남자와 여자는 입맛까지도 다른가...
"아니오,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코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는 그런 맛의 녀석이죠. 하지만..."
하지만...?
예인은 샤오룬의 말을 기다리며 속으로 물었다.
샤오룬은 말을 할 듯 말 듯 하며 호수 저 너머를 응시했다.
샤오룬의 마음속에 답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은 그와는 정반대의 말을 내뱉는다.
"쓰고 맵기 때문에 오히려 도전심을 자극시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원수처럼 다투다가는 나중에는 미운정이 드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담배를 계속해서 피우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인은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어째서 샤오룬이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하였는지.
누군가에게 죽도록 맞고 싶거나 스스로를 벌주고 싶을 때,
혹은 일시적이라도 머릿속의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을 때 그 독하고 쓴 맛이 제 역할을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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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쪽 원하시는 분들은 앞에 # 붙여주시면 되욤~
첫댓글 ♥
서용뭔가요....??안 그랬는데ㅠㅠㅠㅠ딸을 팔아 먹다니!!륜이한테 나중에 무슨일 날 것 같아요ㅜㅜ
언제나 지속적인(?) 댓글 감사합니다ㅎㅎ
서용이러다 타짜되는거아닌가...?
쪽지주셔서감사해요!★
타짜.. 좋은 생각인데요?ㅎㅎ 그거는 생각 안해봤는데 함 해봐야 겠세요
#
서용 뭥미! 갑자기 왜 그러지!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듯! 우리 샤오룬도 담배 피고 ㅜㅜ 전개가 좀 불안하게 되네요ㅜ 재밌어요!
요즘 분위기가 암울하게 전개되죠? 왜이러나 모르게쎄요-_-;; 나름 진지하고 알흠답게? 그려보고 싶었는데 그냥 암울할 뿐이고..
삭제된 댓글 입니다.
ㅎㅎ 요즘 좀 늘어지는것 같은가요? 소설 전개보다는 제가 게을러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것 같아요-_-;;; 얼렁 빠르게 진행시킬게욤
-0-서용씨 왜그러세열....;;;;
언제나 지속적인(?) 댓글 감사합니다~
#서용때문에 이광이한테 안좋은일이 일어날거같은예감,,,ㅠ
스포 될까봐 말은 못하겠지만 앞으로 이 일을 계기로 전개가 더 빨라질 예정이에요~
본격적인 판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