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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31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방한했다. 동남아6개국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에서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존슨 대통령은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고 3군 및 해병대의장대를 사열했다. 그 당시는 우리가 동남아보다 못한 나라였으며 , 필리핀은 당시 선진국으로 우리에게 장충체육관을 지어주기도 하고 통일벼를 만드는데 협력도 한 나라였다.
부인 버드여사와 러스크 국무장관을 비롯한 81명의 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시청앞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숙소인 워커힐로 향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2일 박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이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담은 약3천자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2개항으로 된 이 공동성명은 한국의 경제, 사회 및 과학분야발전을 위해 미국이 계속 지원할 것과 주한미군을 현재선 이하로 줄이지 않으며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때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천명했다. 그 방한을 통해 한미관계의 전통적인 우호를 재확인했다.
얼마나 공들여 우리를 찾게 한 미국대통령이었던가. 원조라는 말이 박힌 성명서를 보고 다들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든든한 빽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74년 포드 대통령이 방한 할 때는 나도 환영의 물결속에 껴 있었다. 그들이 오면 기념우표를 만들고 환영이라는 대형문구가 곳곳에 펼쳐지곤 했다. 그런 미국 땅은 당연 선망의 대상이고 지상의 낙원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을 가고싶은 열망들이 그 어느때보다 그득한 그 시절 우리나라 이민 역사는 보폭을 넓히고 그 이전과는 양상도 달랐다.
1965년 이후로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계층은 중산층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1965년 전체 한인들 중 미국으로 입국할 때 세관에서 직업을 보고한 사람들 가운데 84%가 한국에서 전문직, 관리직, 판매직, 사무직 등과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아버지 친구들도 이민을 많이 갔다. 수의학을 전공한 만큼 미국이나 호주나 카나다로 가면 유리하다고 판단 한 것이다. 그 바람에 아버지 친구는 자신의 땅을 헐값으로 우리집에 넘겨주었다.
고구마 밭으로 버티다 교회에 팔려간 그 땅은 우리집 3남매 결혼 때 아주 긴요하게 쓰인 고마운 땅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이민이 만들어준 한 집안의 로또였다. 이후 75년도를 넘어서 노동직, 기능직, 서비스직, 농업 등의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점차로 증가하여 한인 이민사회는 갈수록 더욱 이질적이고 복잡해졌고 한인 이민사회의 문제들도 더욱 다양해졌다.
실제 광복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한미군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미군정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 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많은 수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이에 따라 많은 한인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1954년 전쟁고아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입양이 시작되었다. 해외입양은 2002년 말 현재 2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약 10만 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양인의 수는 전체 재미한인(200만 명)의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들에 앞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일부 대도시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던 것에 반해 전후의 국제결혼 여성들이나 입양인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미국인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이 시기 한인 이민의 또 다른 흐름은 유학생들이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그런 이민의 경향이 달라진 것은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부터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 궤도에 올라서 연 30,000명 가량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5,000명의 한인들이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나는 코메리칸의 낯과 밤이라는 연재 글을 본 적이 있다. 낯 설고 땅 설은 이국땅에서 억척으로 사는 그들의 삶을 보고 역시 굴하지 않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한국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세탁소를 한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평등하다는 생각도 했다. 흔히 미국 속의 한국인은 아리안 족의 우수한 머리에 유태인의 악착같은 근면성이 혼합된 민족이라며 다른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실제 신 학문을 터득하고 들어와 우리의 발전에 일조한 사람들이 당시 유학을 간 사람들이며 지금도 학계 정계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다.
어느덧 한국인의 이민사는 1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동안 한국의 국력도 이전과는 달리 선진국의 대열에 다가가고 있어 한국인들의 우수성을 미국뿐만아니라 전 세계에 날로 입증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이민이 점차 어려워지기 때문에 취업이민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사람들은 그보다 손쉽게 영주권을 획득 할 수 있는 방편인 투자이민을 선호하는 추세이며, 그 수도 현격히 증가하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자녀 교육문제로 이러한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또 보다 풍요로운 나라에서 여유를 갖고 생활하고자 이민을 가기도 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이자 세계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은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시에 있는 코리아타운이다. 캘리포니아주는 로스앤젤레스시 이외에도 샌프란시스코시, 오렌지 카운티등의 여러중소도시에는 다수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동부의 뉴욕주에도 뉴욕시 맨해튼과 퀸즈 등에 대규모 한국인 공동체가 있고 그외에도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시,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 뉴저지주 버겐 카운티, 버지니아주 애난데일과 센터빌,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근교,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근교, 텍사스주 댈러스시, 콜로라도주 덴버시등에도 상당한 규모의 코리아타운들이 있다.
모든 삶에 우여곡절은 있기 마련이지만 고국땅을 떠난 사람들, 그 고통과 아픔은 떠나 본 자들만이 제대로 알리라. 알찬 터전과 복지를 누리는데는 말로도 표현 못할 남다른 각고의 노력이 뒤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코메리칸은 행복한 이민사이다. 기회도 많은 잘 사는 나라에서 지유롭게 생활을 영위하며 값진 생의 가치와 보람을 얻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나는 안산시 원곡동의 우즈벡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TV로 본적이 있다.갈 곳이 없어 돌아온 그들은 일용직의 척박한 삶임에도 웃음을 잃지않으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이들은 모두 지금 드높아진 태극기의 위용 속에 한 많은 지난날의 삶을 딛고 굳건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민족의 후예들이다.이들은 다른 나라의 이민족과는 태생적으로 존립 이유가 다르다.700만 동포들은 비운의 역사에 빠진 나라의 빈곤과 억압과 맺힌 한을 품고 해외에 나간 조상들의 후손들이다.우즈베키스탄의 동포들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스탈린이 강제 이주시킨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지난 1930년대 스탈린이 러시아 혁명을 할 때 하바롱스키에 살았던 2만 명의 한민족을 기차에 싣고 가서 중앙아시아 한 벌판인 시베리아 인근에 갖다 버렸다. 이른바 러시아 혁명을 위하여 소수민족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한 달 치 식량을 주면서 그곳에서 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먹지 않고 꽁꽁 언 얼음 땅을 깨서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짓고 악착같이 살아남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고 우리를 만나면 손을 꼭 잡고 "다시 오세요, 다시 오세요." 말을 한다.
그런 슬픈 사연을 지닌 동포들이 20만 명이나 그곳에 살고 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역사의 기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가 해야 할 도리가 무엇일까. 그런데 지금 그 동포들이 국경을 넘어서 조국으로 오려고 하는데 조국인 대한민국은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지금은 모스크바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도 서울에 오고, 세계 사람들이 모두들 자유로이 서울에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 동포들만이 자기 나라에 오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외국 사람들에게 어떻게도 변명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서툰 말로 그들이 말한다. "나와 너희는 피를 나눈 동포인데 왜 너희들은 같은 동포는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외국인 노동자는 그렇게 자유로이 데려다가 일하게 하느냐?" 원곡동에 모인 우즈벡 동포들, 비록 가난하지만 일이 있어 고맙고 돈을 벌어 좋다고 했다. 막노동을 팽개치는 이쯤 장비를 챙기는 그 뒷모습이 향기롭기 까지 하다. 삶은 환경이 중요하다. 마음먹기도 중요하다.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를 지닌 그러한 이민 세대의 2, 3세들이 지금 한민족 중심의 문화를 새로 쓰고 있다.
과거의 슬픈 역사를 통해 한민족의 굴하지 않는 신념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5대양 6대주의 700만 한민족 후예들이 엮어가는 문화. 경제. 사회의 모든 활동이 하나로 거듭난 결과가 바로 오늘날 한류 열풍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쯤 세계화 속의 한민족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세계시장을 우리 나라의 생산기지로 만들고 우리 국력을 세계의 국력으로 이끌어야 한다. 세계에 흩여져 있는 한민족이 우리의 국력이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700만 명의 동포들이 바로 한민족의 힘이고 한민족의 시장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국력이다.
그 국력에다 우리 문화를 현지화하고 공장을 건설하고 해외동포에 대한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커가는 국력이란 없다. 평화봉사단과 경영기술봉사단을 조직하여 국가적으로 지원해 현지에서 한국시장을 개척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우리는 새로운 역사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고 우리 조국이 어떤 위상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나는 원곡동 우즈벡 동포들을 진정으로 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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