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년 여름에는 콩과 옥수수를 그처럼 열심히 심지 말고
씨앗만 있으면 성실, 진리, 소박, 믿음, 순수 등의 씨앗을 심어,
적은 노력과 거름을 주더라도 그것들이 이 땅에서 자라나
나의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인지를 지켜보자.
------- (中略) ------
왜 우리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곡물이나 감자, 건초와 과수원에만 그처럼 신경을 쓰고
다른 수확물은 가꾸지 않는가?
왜 우리는 종자용 콩에는 그처럼 관심을 쏟으면서
새로운 인간 세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가?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말한 여러 가지 미덕들이
(우리는 모두 미덕들을 다른 산물보다 더 큰 자랑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바람에 날리는 씨앗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 안에 뿌리를 박고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진실로 그로부터 정신적인 자양(滋養)과 위안을 얻지 않겠는가?
< Henry Throeau. Walden. 강승영 옮김. 247-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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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 애완견과 같이 나온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옷도 입히고, 신발 신긴 강아지도 보았습니다.
과연 개의 입장에서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이 좋을까?
또,
병든 부모를 휠췌어에 태워서라도 산책 시켜 드린 적이 있을까?
매일 한 번씩은 고사하더라도 일주일에 힌 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같이 안 산다면, 안부전화는?
本末顚倒란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