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의 방식
하늘이 허전할 때 문득 생각나는 존재다 처마는
지은 지 너무 오래된 다닥다닥 어깨가 붙은 집들
언젠가 옆집 친구 여동생에게 들창문으로 쪽지를 건넬 때
볕이 드는 그 아이의 얼굴도 이쪽 그늘 반은 가져갔다
사랑을 잃고나서 이유 없이 먼산을 볼 때마다
머리 위에 처마를 드리우던 꽃들은 또 어땠나
피는 자세와 떨어지는 자세의 차이점에 대해
낙화한 자리의 그늘이 실은 빛의 구간이라는 것
서까래도 처마도 없는 풍경에 발맞춰 마음들도
그늘이 없는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고개를 들면 때없이 추락하는 표정도 애써 환하다
에두르기를 좋아하는 낭만은 뒷주머니에 구겨진
모자챙이 되어 가끔 식탁을 닦곤 한다
봤듯이 처마 또한 탈부착이 가능한 눈치가 되었다
품고 있던 사표를 찢은 것도 처마 아래서였다
장대비쯤은 그리운 노랫가락으로 변주하는 함석 처마
내 가난을 오래 보듬어 준 애인처럼 정겨웠다
거세게 쏟아지는 가시 돋친 말마저 꽃무늬 빗방울로
기운 만큼의 깊이로 속정을 그려 보이던 처마 같은 사람
내가 오늘 다 젖어 어느 허름한 처마 아래 선 까닭은
오래 전 내 발끝에 리듬을 맞추던 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마와 이마를 맞대면 살가운 웃음이 생기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오던 노숙자가 문득 허리를 구부릴 때
계단에 닿을 듯한 이마 틈새로 보이는 풀잎 하나
우린 언제든 펼칠 수 있는 처마를 가졌지만 귀찮아서
혹은 규격이 다르다고 한 발짝 비켜선다. 눈맞춤을 피하는 건
처마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극지의 사랑
- 북양(北洋)으로 가는 쇄빙선에서
쇄빙선의 포말은 꽃보다 뿌리에 가깝습니다.
빙판은 견고하지만 항행을 막을 수 없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유빙을 볼 때마다
저만치 흘러간 우리 사랑을 떠올린다면
내가 얼음처럼 결빙되기 쉬운 슬픔을,
쉬 금이 가는 기쁨을 가졌다 하실 건지요.
거대한 고래가 지나간 길을 빙하가 지우고
빙하를 지운 배는 극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빙벽을 지날 때면 브리지에 올라
빙하로 뒤덮인 바다를 굽어봅니다.
배가 흩뜨린 빙하의 과거는 곧 다시 붙겠지만
더 추운 그날이 올 때까지 내내 일그러져 있겠지요.
나에게 당신은 가장 먼 극지입니다.
한때 우리가 기댄 밤의 등성이 위로
오로라의 광휘가 번득이곤 합니다.
홀연 나타났다 사라지는 하늘의 꽃떨기처럼
흔적은 마음을 지루해합니다.
당신의 오랜 흔적인 나는
그러나 북극성처럼 좀 더 외로워야 합니다.
별빛이 차가운 건
빙산이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혹한의 계절에도 그리움은 얼지 않습니다.
두 개의 스크루가 밀어내는 건
남도(南道)의 홍매화뿐만이 아닙니다.
극지의 비밀을 탐사한다는 건
당신과의 소소한 이야기
어깨에 떨어지던 붉은 봄과의 거리를
아이스나이프로 절개해 간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내게서 멀어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얼음에 갇히는 꿈은 더 이상 악몽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도 빙하가 있었던가요.
쇄빙선의 존재 이유가 극지를 사랑하는 조건이라면
당신, 부서져 나가는 포말을 꽃이라 여기실 수 있겠는지요.
사랑의 습관
사랑은 울었다. 사랑이 달랬다. 사랑이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사랑이 보이지 않으면 사랑은 또 울었다. 사랑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사랑의 사랑스런 손길에 사랑은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사랑이 사랑에게 이럴 거면 합치자고 했다. 사랑은 좋아서 사랑의 목을 껴안았다. 한 몸이 된 사랑은 웃음과 울음을 함께했다. 슬픔에 겨운 사랑이 고뇌할 때 기쁨에 벅찬 사랑이 환호할 때 사랑은 한쪽이 출렁거리거나 반대쪽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비 오는 밤이나 멀리서 종소리 사운거리다 갈 때 사랑은 사랑에 들키지 않고 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웃을 수도 없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뒤섞이고 엉켰으므로 티눈과 우주만큼이나 사랑은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친 사랑이 침묵할 때 그 사랑의 등에 기댄 사랑이 노래를 불렀다. 지나간 사랑을,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운 순간들을. 사랑의 진실이 스며든 사랑이 노래를 따라 부르자 비로소 사랑의 몸이 분리되었다. 이제 사랑은 혼자서 마음 놓고 운다. 다른 사랑마저 운다면 달래줄 사랑이 없다는 걸 안다. 사랑은 혼자 있을 때 사랑의 의미를 알 나이가 되었다. 멀리서 사랑이 아파할 때 사랑의 심장 박동 소리는 가장 크다. 사랑이 웃어도 그게 온전한 웃음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랑은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사랑과 놀다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사랑 속에 무덤을 썼기에 남은 사랑은 혼자서 웃거나 울어도 외롭지 않다. 남은 사랑마저 세상을 떠나고 어느 날 사랑은 눈이 되어 내린다. 가장 맑고 선연한 빛으로 다시 한 몸이 된 눈이 소복이 쌓인다. 첫눈, 환한 웃음으로 혹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눈을 뭉쳐 던지는 저 행위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아는 사랑이다. 알아서 해보는 투정이다. 오래도록 전해오는 사랑의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