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4~25
◈ 새번역 ◈
14 "이스라엘이 노예냐? 집에서 태어난 종이냐? 그런데 어찌하여 잡혀 가서, 원수들의 노예가 되었느냐?
15 원수들이 그를 잡아 놓고, 젊은 사자처럼 그에게 으르렁거리며, 큰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이스라엘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성읍들은 불에 타서, 아무도 살지 않는다.
16 멤피스와 다바네스의 자손도 너의 머리에 상처를 주었다.
1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
18 그런데도 이제 네가 시홀 강 물을 마시려고 이집트로 달려가니, 그것이 무슨 일이며, 유프라테스 강 물을 마시려고 앗시리아로 달려가니, 이 또한 무슨 일이냐?
19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너 스스로 나에게서 돌아섰으니, 그 배신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고서 깨달아라.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
20 "참으로 너는 옛적부터, 너의 멍에를 부러뜨리고, 너를 묶은 줄을 모두 끊어 버리면서 '나는 신을 섬기지 않겠다' 하고 큰소리를 치더니, 오히려 높은 언덕마다 찾아 다니며 음행을 하고, 또 푸른 나무 밑에서마다 너의 몸을 눕히고, 음행을 하면서 신들을 섬겼다.
21 나는 너를 종자가 아주 좋은, 제일 좋은 포도나무로 심었는데, 어떻게 하여 네가 엉뚱하게 들포도나무로 바뀌었느냐?
22 네가 잿물로 몸을 씻고, 비누로 아무리 몸을 닦아도, 너의 더러운 죄악은 여전히 내 앞에 남아 있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23 네가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 신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 네가 골짜기에서 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네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아라. 너는 이리저리 날뛰는, 발이 빠른 암낙타와 같았다.
24 너는 사막에 익숙한 야생 암나귀와 같았다. 암내만 나면 헐떡이는 그 짐승, 그 짐승이 발정하면 누가 그것을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그런 암컷을 찾아 다니는 수컷은 어느 것이나 힘들이지 않고서도 발정기가 된 암컷을 만나게 된다.
25 너는 너의 발을 돌보아, 맨발로 다니지 말고, 너의 목을 돌보아, 목타게 다니지 말라고 일렀건만, 너는 말하였다. '아닙니다. 공연한 말씀이십니다. 오히려 나는 이방 신들이 좋으니, 그들을 쫓아다녀야 하겠습니다.'"
◈ 묵상 Point ◈
(출처 : 묵상과 설교 / 성서유니온)
1) 이스라엘이 자초한 심판
이스라엘의 심판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무자비의 결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초한 일이다. 그들이 여호와 대신에 앗수르를 의지했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버렸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악인지를 알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의지한 것을 심판의 수단으로 삼으실 것이다. 여호와가 받은 멸시를 수치로 돌려주실 것이다.
2) 뻔뻔한 우상숭배
이스라엘은 구원하신 은혜를 배반하고 언약 관계를 끊은채(멍에와 결박을 끊고) 바알의 종이 되기로 한다. 그 죄는 잿물과 비누로 씻을 수 없는 녹이나 얼룩 같다. 그런데도 대놓고 "나는 순종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러고도 "나는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자신했고, “나는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고 발뺌하였다. 심각한 자아분열 상태다. 하나님께서 "네 길을 보라"고 호소하실 정도였다. 자신을 모르니 누구의 말도 안 들렸다. 그냥 욕망 덩어리일 뿐이었다.
3) 태연한 우상숭배
태연하게 책망에 반항하고 우상숭배를 부정하였다. 하지만 이미 죄악에 중독되어 발정기의 암낙타처럼, 성욕에 눈먼 야생 나귀처럼 욕망이 이끄는 대로 바알의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돌아서라는 호소를 거부하고 “이방신을 사랑하니 그를 따라 가겠다”고 한다. 생각 없이 하고 있는 것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머릿속의 지식이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입술로는 ‘바알을 좇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도 발걸음은 ‘푸른 나무’ 아래로 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 설교1 /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 나아가자 ◈ 예레미야 2:9~15
(출처 : 생명의 삶 플러스 / 두란노)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자손들을 향해 다시 싸우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9절). 그 옛날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했던 씨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창 32:24). 우리도 때로 하나님 앞에 고집부리고 있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려주실 때, 하나님과 다투고 겨루는 것을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우상이라도 발견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이 끝나야 걱정과 염려의 강을 담대히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깃딤 섬과 게달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추궁하십니다. 어느 나라 백성이 자신들의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의 영광이신 하나님을 무익한 것과 바꾸는 일을 저질렀습니다(10~11절). 귀한 것을 쓸모없는 것과 바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향해 이 일을 보고 놀라고 심히 떨며 두려워하라고 명하십니다(12절).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두 가지였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입니다(13절).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만으로도 죽음을 자초하는 일인데, 스스로 밑 빠진 독과 같은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노예와 포로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원하는 것을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일부 얻을지라도 우상에 지배당하는 노예와 포로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이제 사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부르짖고, 그 땅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성읍이 불타고 주민들은 없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했던 애굽의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정수리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15~16절).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는 이처럼 비참합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목말라 죽는 것처럼, 수많은 우상 속에서 스스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버리고 떠나 스스로 재앙의 길로 간 것입니다(17절).
세상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들이 판치는 세상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싸움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생명을 걸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 길을 따르십시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3:18).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또 다른 우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앗수르에게서 갈급하게 물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18절). 죄가 따로 있고, 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 악이 너를 징계하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 곧 악과 고통입니다(19절). 우리 인생에 야곱의 씨름은 끝나고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날마다 있기를 바랍니다.
◈ 설교2 /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께 구하라 ◈ 예레미야 2:20~28
(출처 : 생명의 삶 플러스 / 두란노)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은 옛적부터 스스로 멍에와 결박을 끊으며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라고 선언하고 높은 산 위와 푸른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 행음했습니다(20절). 하나님께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우상에게는 몸을 굽혀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인생은 다른 것들을 주인으로 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가시는 곳마다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진짜 주인이 임하시니까 가짜 주인들이 나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참주인이 누구십니까? 문제와 사람이 아니라, 우리 구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순전한 참종자,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지만, 이스라엘은 잡종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습니다(21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악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형편이나 사람 때문에 악하게 되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습니다. 세상과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잿물로 씻고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죄악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22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어떤 선한 사람도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아무리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아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바알을 섬기지 않았다고 주장해도, 그 길이 골짜기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23절). 예수님은 이런 구제불능인 우리에게 오셔서 죗값을 대신 치르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 죄를 씻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나아가 회개함으로 죄 씻음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변명해도 이스라엘은 발 빠른 암낙타가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광야의 암나귀들이 발정기에 헐떡거리는 것과 같았습니다(23~24절). 굳이 사탄이 애쓰지 않고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찾아 헤매는 음녀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성경의 이런 표현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민망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감추고 범하는 모든 죄는 더 부끄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속히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가장 빠른 회복의 길입니다.
자식이 벗은 발로 다니고 목마르게 다니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하고 이방 신들을 따라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25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와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마치 붙잡힌 도둑과 같이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26절). 죄가 깊어질수록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무를 향해 아버지라 부르고 돌을 향해 어머니라 부르며 섬기다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우스꽝스러운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그 성읍의 숫자만큼 많은 우상들에게 나아가 도움을 구하라고 조롱하듯 말씀하십니다(27~28절). 사람에게 여러 아버지가 있을 수 없듯이, 참아버지는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 됨이 얼마나 큰 복이고 은혜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