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언론인 만수르 자하니에 따르면, 저명한 이란 영화 및 연극 작가 겸 감독 바흐람 베이자이(Bahram Beizaie)가 전날 미국에서 암 합병증으로 87세 삶을 마쳤다고 할리우드 리포터가 27일(현지시간) 전했다. 세상을 등진 26일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다만 미국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말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유족들이 임종했는지 여부 등은 알리지 않았다.
베이자이의 1989년 영화 '바슈'(Bashu, the Little Stranger)는 올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클래식 최우수 복원 영화상을 수상했다.
동료 이란 감독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추모 메시지를 통해 "바흐람 베이자이, 나의 위대한 스승으로, 그의 작품과 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온 마음으로 따랐던 이 땅의 문화에 대한 사랑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나 망명했다"면서 "이 시대에 바흐람 베이자이보다 더 이란적인 사람을 진심으로 알지 못하며, 이란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가장 이란인다운 이란인이 먼 눈을 세상에 돌린 것이 얼마나 씁쓸한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1938년 12월 26일 테헤란에서 태어나 시인과 문학 학자 가정에서 자랐다. 10편의 장편영화, 4편의 단편영화, 14편의 연극을 연출한 것 외에도, 베이자이는 70권이 넘는 책, 단행본, 희곡,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이란 뉴웨이브 영화의 선두주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베이자이의 수상 경력 영화들, '바슈'를 비롯해 '폭우'(Downpour, 1972), 그리고 '광견병 사냥'(Killing Rabids, 2001)이 전 세계 영화제들에서 상영됐다. 그의 작품은 인도와 이란 신화와 역사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고대 이란 문학과 언어 연구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영화와 무대 프로젝트에서 이란의 토착 연극 형식을 재구성했다.
그의 첫 희곡 '아라쉬'(Arash)는 열아홉 살에 쓴 것으로 시아바쉬 카스라이의 '궁수 아라쉬'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는 '천일야화'(One Thousand and One Nights)의 기원과 페르시아 문학의 다른 주요 작품들과 연관성을 탐구하는 학술 저작들을 저술했다. 그의 단행본과 에세이는 인도, 중국, 일본의 공연 예술 전통을 탐구한다.
그의 1965년 저서 '이란의 연극'(Theatre in Iran)은 나칼리(이란 이야기), 케이메 샤브 바지(이란 인형극), 타지에(수난극), 루하우지(희극 민속극) 등 이란 연극 장르의 역사적 뿌리를 포괄적으로 연구했다.
베이자이는 이란 진보영화감독센터, 이란작가협회, 극작가 및 작곡가 협회의 창립 멤버였으며, 테헤란 대학 연극 예술학과장을 역임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베이자이는 테헤란 대학을 떠나야 했고, 그의 작품은 정부의 검열을 받거나 금지됐다. 그는 2010년 이란을 떠나 스탠퍼드 대학 이란학 강사로 합류했으며, 여러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이란 신화 워크숍을 진행했다.
베이자이는 미국 영화 아카데미 회원이었으며, 지난해 오스카 투표 위원회에 초대됐다.
다음 백과에 따르면, 베이자이는 학창 시절 영화를 보려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영화에 빠져들었다. 당시 대중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 강인한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루티(luti) 장르에 열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예술영화가 탄생하고 있기도 했다. 다리우스 메흐르지(Dariush Mehrjui)의 '소'(The Cow, 1969)로 촉발된 이란 뉴웨이브 영화는 사회적 리얼리즘 경향으로 현실을 반영했으며, 소설을 차용하거나 작가 출신의 인재들이 영화계로 유입되면서 문학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베이자이는 바로 이 시기에 자신이 쌓아온 문학 연구와 역사적 소양을 바탕으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이란 정부는 문화예술부를 통해 우수 영화와 어린이 교육용 영화제작을 지원했는데, 베이자이도 어린이지능개발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 '콧수염 삼촌'(Uncle Mustache, 1969)을 만들며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1971년 첫 장편영화 '폭우'를 완성했다. 이 영화는 테헤란 슬럼가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겪게 되는 우여곡절과 그런 와중에 가난하지만 성실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교사와 학생들이 벌이는 코믹한 사건들과 함께 빈민가의 일상, 이란의 교육환경을 사실적으로 담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1970년대 초 이란 뉴웨이브 영화 대표작이 됐다.
그 뒤 베이자이는 기억을 잃고 바닷가에 표류한 남자와 바다에 남편을 잃은 여인의 사랑, 그리고 어느 날 밤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들에 의해 주인공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두 번째 영화 '이방인과 안개'(Stranger and the Fog, 1974)를 내놓았다. 이 작품에서는 서사를 전개하는 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바다와 안개를 다루는 탁월한 영상미를 선보였다.
한편 1970년대 후반 이란 혁명은 영화에 엄격한 검열과 제작 방식의 제약을 가져와 베이자이의 영화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대 이란의 모습을 통해 과거 페르시아의 영광을 회고하고자 했던 '타라의 발라드'(Ballad of Tara, 1978)와 '야즈게르드의 죽음'(Death of Yazdgerd, 1982)은 차도르를 쓰지 않은 여인이 등장하고 여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역할로 설정된 점이 문제가 돼 상영 금지됐다. 그러나 이란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돼 불법판이 떠돌면서 컬트영화가 됐다. 베이자이는 혁명 후 문화재건에 대해 거침없는 주장을 펼쳐 서구문화의 배척을 강요하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비난을 샀다. '타라의 발라드' 등이 이란 정부의 허락 없이 서양의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됐다는 이유로 이란 내에서의 활동에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됐다.
"1980년대 이란 영화의 랜드마크"('Iranian Cinema')라 평가 받는 '바슈'는 전쟁으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남부지역 출신 소년이 폭격을 피해 북부지방의 한 농가로 흘러들고, 남편이 전쟁에 나간 농가의 안주인이 소년을 돌봐준다는 내용이다. 어린이 영화의 경향에 속하면서도 외모와 언어가 다른 바슈를 배척하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 사고에 대해 은유적인 비판을 가하고, 전쟁과 민족분쟁을 중지해야 한다는 평화와 관용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 영화는 1983년 제작이 완료됐지만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이란에서 상영 금지되었다가 1989년에야 여러 해외 영화제에 선보일 수 있었다.
"인간관계를 통해 전쟁의 상흔을 충격적이면서도 용감하게 묘사"('Iranian Cinema')했다거나 "작고 단순하며 매우 인상적인 영화"('뉴욕 타임스')란 상찬을 들었다. 이 작품은 또 앞서 선보인 '아마도 다른 때에'(Maybe Some Other Time, 1988)와 더불어 능동적으로 사고하는 여성상을 담은 베이자이 영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1992년에는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길을 떠난 언니가 결국 죽은 후에야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여행자'(Travelers)를 발표했다. 주인공은 영화 초반부에 카메라를 보며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감독은 이 장면을 비롯한 영화의 주제를 “죽음 앞에도 절망하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혼자 대항해 현실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이제껏 이란 사회와 검열에 맞서 온 감독의 태도와 통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각본가로 다른 뉴웨이브 영화 감독들의 영화에 참여했다. 소흐랍 사히드 살레스(Sohrab Shahid Sales), 파르비즈 키미아비(Parviz Kimiavi) 등과 더불어 이란 뉴웨이브 영화의 대표 주자이자, 혁명 후 검열과 맞서며 이란 예술영화의 부흥을 이끈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4년 이스탄불 국제영화제에서 예술공로상을 수상했다.
영국 BBC에 따르면, 이란 신문 1면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야당 목소리와 샤 시대를 애정 어린 시절로 회상하는 이들도 베이자이를 경의를 표했다. 이란 마지막 샤의 아들 레자 팔라비 왕자는 그의 별세를 "우리나라 예술과 문화에 큰 손실"이라고 표현했다. 베이자이의 후기 영화들은 1980년대 샤를 무너뜨린 이슬람 정권에 의해 금지됐지만, 현 정부의 여러 고위 인사들도 그의 이란 문화에 대한 공헌을 칭송했다.
현재 이란 영화 제작자 여럿이 그에게 빚을 졌다고 인정했으며, 올해 칸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자아파르 파나히는 그가 자신들에게 "망각에 맞서는 법을 가르쳐 줬다"고 말했다.
베이자이는 극작가이자 영화 감독으로서 직접적인 정치적 언급을 피했으며, 노골적인 메시지를 내놓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항상 말했다.
파나히는 추모사를 통해 "베이자이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몇 년의 배제와 침묵, 거리감을 견뎌냈지만, 자신의 언어와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에 이란을 떠나 미국에서 이란 문화를 가르치며 말년을 보냈다. 배우인 부인 모즈데 샴사이는 그가 '이란'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며, 조국의 새로운 문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