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 나의 기업] 성심당 대표 임영진 요셉, 김미진 아녜스 부부
| ▲ 성심당 대표 임영진(왼쪽)·김미진(오른쪽)씨 부부가 직원과 함께 성심당 대표 메뉴 튀김 소보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
70년 전 해방 당시 함경도 함주에서 과수원을 하던 임길순(암브로시오)씨.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종교 탄압이 갈수록 심해졌다. 전쟁이 터졌다. 1ㆍ4후퇴 때 임씨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가기로 작정했다. 보따리를 꾸리고 아내와 어린 네 자녀를 데리고 나섰다. 도처에 미군들이 막고 있었지만 묵주를 보여주고 통과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흥남 부두에 도착해 배를 탈 수 있었다. 교우들만 탄 배였다. 임씨는 ‘가족과 함께 무사히 살아난다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예수 성심께 봉헌했다.
전쟁 후 인근 진해에서 한동안 지내던 임씨는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서울에 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정착한 곳이 대전이었다. 임씨는 대전 역 앞에서 노점상처럼 천막을 치고 찐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56년이었다. 임씨는 예수 성심(聖心)을 기린다는 뜻에서 빵집 이름을 ‘성심당’이라고 지었다.
그로부터 5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성심당은 대전을 대표하는 향토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빵으로, 건강한 기업 문화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공유 경제로, 어려운 이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사랑과 나눔으로, 그리고…. -----------------------------------------------
| ▲ 김미진(왼쪽)씨가 남편 임영진씨에게 빵을 먹여주며 즐거워 하고 있다. |
대전의 중심인 중구 은행동 로데오거리. 주교좌 대흥동성당이 길 건너 한 눈에 보이는 곳에 4층 건물 성심당(성심당 신관)이 있다. 1층은 케이크 전문 매장인 케익부띠끄, 2층은 이탈리아식 전문 레스토랑 플라잉팬이다.
“성심당이 여기로 옮겨온 것은 1970년이었습니다. 성당 십자가가 보이고 성당 종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아버지께서는 이곳을 택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성당에는 먼저 갔다와야 한다고 여기신 거지요. 그런데 이곳 지번이 153이랍니다.”
임길순(1997년 선종) 창업주에 이어 1980년부터 성심당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아들 임영진(요셉, 61) 대표의 말이다. 153이란,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물을 치자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잡혔다는 요한복음 21장 11절에 나오는 숫자다.
마르타와 마리아
“빵집을 열면서 아버지께서는 피란길에 결심하셨던 것을 바로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역 주변의 배고픈 이들을 찾아 빵을 나눠주기 시작하신 거지요. 빵을 파는 것도 좋지만 많이 만들어서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빵을 나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을 통해 나오는 옷가지 등 구호물품들도 함께 나눴다. 어머니(한순덕 마르가리타, 2012년 선종)는 빵을 만들어 팔고, 아버지는 빵과 옷가지를 싸들고 굶주린 이들과 입을 것 없는 이들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빵 재료를 사기 위해 모아둔 돈마저도 갖고 나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다.
“아버지의 이런 삶을 보고 어머니는 ‘천당엔 혼자만 가려고 하느냐?’고 다투기도 하셨지요. 두 분은 마치 마르타와 마리아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빵을 만들어 파는 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예수 성심을 기리며 하는 일이었다. 봉사와 나눔은 계속됐고, 성심당은 번창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이런 나눔이 못마땅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베풀면 백 배으상을 받을 것이라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아버지를 이어 성심당 경영에 뛰어든 임 대표는 아버지의 사랑 나눔을 이어가면서 빵을 만드는 재료에서 제조법, 포장, 서비스까지 새롭게 바꿨다. 성심당의 명물 ‘튀김 소보로’를 비롯해 포장 빙수, 판타롱 부추빵 같은 핵심 제품들이 속속 개발됐다.
아내와 함께 알게 된 ‘포콜라레’는 여기에 불을 지폈다. 지금까지는 부친의 뜻을 이어 나눔을 실천하면 ‘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포콜라레는 복음을 생활로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후원하는 것보다 그 과정마다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지요.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빵을 만들어 판매하더라도 억지로 하는 것과 즐겁게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고객은 이를 느끼지요.” 임 대표의 아내 김미진(아녜스, 56) 이사의 말이다. 포콜라레 영성인 사랑과 일치의 정신을 성심당 경영에 접목시켜 나가면서 임 대표 부부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성심당 본관(은행동 145번지)에 1992년 국내 최초로 베이커리 레스토랑(테라스키친)을 연 것이다. 대성공이었다 외식업 진출은 플라잉팬, 피아토 개점으로 이어졌다. 성심당은 국내 제빵제과업의 아이콘이 됐다. 투명 경영과 공유 경제
2000년 부부가 함께 필리핀에서 열린 포콜라레 운동의 사회학교에 참석한 것은 새로운 전기가 됐다. 투명 경영, 공유 경제 같은 개념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부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귀국한 후 부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포콜라레 창시자 끼아라 루빅에게 편지를 썼고, 얼마 후 답신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 12,17).
이때부터 부부는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모든 것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고객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직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객과 직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고민했다. 매장 인테리어 하나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을 모두 생각했다. 너무 화려해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기를 꺼리지 않도록, 또 너무 초라해서 있는 이들이 외면하는 매장이 되지 않도록 했다. 회사 사훈도 ‘모든 이가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로 바꿨다.
투명 경영을 도입, 법인을 설립했다. 주식회사로 바꾸고 부부는 월급쟁이 사장과 이사가 됐다. 매출을 공개하고, 직원들과 함께 결산하고, 100% 정직한 납세를 했다. 공유 경제 기업 정신을 경영에 반영한 것도 이때부터다. 포콜라레 창시자 키아라 루빅(1920~2008)이 주창한 공유 경제 개념은 기업 수익의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으로, 3분의 1은 재투자에(회사와 직원을 위한 재투자뿐 아니라 사회 인력 양성을 위한 재투자도 포함),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임직원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업 문화를 소유 중심에서 나눔 중심으로, 경제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공유 경제를 실천하면서 회사는 직원 1명분의 임금을 매달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는 일도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이에게 좋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희 부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화하고 나누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회사로서는 어려운 때였지요.”
신도시가 생겨나면서 상권이 옮겨갔다. 시내 중심의 생활은 주거지 중심의 생활로 바뀌고, 각종 프랜차이즈 사업이 생겨나면서 경쟁업체도 많아졌다. 회사 매출은 자꾸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2005년 1월 본관에 불이 나 전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제 성심당은 끝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직원들이 먼저 달려와서 복구 작업에 앞장서더군요. 그해 말 결산을 해보았더니 전년도에 비해 매출이 30%나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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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족 신문과 무지개 프로젝트 임 대표 부부는 기도하고 대화했다. 하느님께서 성심당을 일으켜 세워주셨으니 거기에는 분명 뜻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성심당의 정체성을, 존재 이유를 찾고자 했다.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이에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성심당은 단지 빵을 만들어 파는 곳이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빵으로 기업 분위기를 바꾸고 고객을 바꿀 뿐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성심당의 존재 이유였다.
이를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실행에 옮겼다. 소통을 위한 ‘한가족 신문’이 그 하나였다. 매주 발행하는 한가족 신문은 각 부서마다 명예기자를 두어 부서 소식을 알리면서 회사의 사정을 공유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나누는 소중한 소통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소통을 위해 직원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시행했다. 원하는 직원에 한해서 그 직원의 가정을 방문, 집안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임직원들이 서로 알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사랑의 챔피언’도 시작했다. 사랑의 챔피언은 한 해 동안 사랑을 많이 실천한 직원을 승진시키는 것이다.
2010년 성심당은 무지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개인과 회사와 사회의 변화를 위한 일곱 가지를 설정, 실행에 옮겨 나갔다(표 참조).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들도 있고, 부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성심당은 사랑의 무지개를 활짝 띄울 때까지 이 프로젝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대전 성심당에는 빵을 사러오는 고객 외에도 견학 오는 외부 손님들로 연일 붐빈다. 성심당 제공 |
생명과 사랑의 빵이 되고자
내년이면 60주년이 되는 성심당은 일반 기업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추진하는 두 가지를 여지껏 하지 않고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성심당의 존재 이유는 단지 돈을 벌고 이름을 얻고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끼아라 루빅이 주창하는 포콜라레 정신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대전을 떠나지 않는다. 2011년 대전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후 서울에서도 거듭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대전 시민의 사랑 속에 성장했으니, 대전의 기업으로 계속 머무르기 위해서다.
“성심당 빵이 인기 있다고 서울에서 영업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전에 오지 않습니다. 대전 성심당을 찾지 않지요. 성심당은 빵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빵을 통해서 경영주와 직원이, 직원 서로가, 직원과 고객이, 회사와 지역 사회가 더불어 사랑의 문화, 나눔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프랜차이즈를 하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덕분인지, 한때는 신도시 상권에 밀려 공동화되어 가던 은행동 일대도 활기가 넘친다. 성심당 때문만은 아니지만 성심당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빵을 사러 오는 고객들 외에도 견학 오는 외부 손님들로 연일 붐비는 현장이 이를 말해준다.
성심당은 2012년에는 빵집을 시작한 대전역에 입점, 59년 전 예수 성심께 찬미를 드리며 시작한 자리를 감격스럽게 되찾았다. 성심당의 변화는 예수 성심의 사랑의 불이 지역 사회에 활활 타오르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임영진 김미진 부부는 이것이 성심당을 통해 자신들이 수행하는 또 수행해야 하는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여긴다. 성심당은 지금도 매월 4000만원 어치의 빵을 후원한다. 지난 4월 네팔 지진 사태 때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3일 만에 700만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다. 성심당 직원은 현재 정규직 290여 명을 포함 해 410여 명이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포콜라레(Focolare) : 1943년 이탈리아의 키아라 루빅이 창시한 사랑과 일치의 공동체 영성 운동. 한국을 포함해 82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서울가톨릭경제인회는 ‘나의 신앙, 나의 기업’에 소개할 교우 기업인들을 추천받습니다. 아울러 경제인회 활동에 함께할 교우 기업인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문의 : 02-755-7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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