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라고 했다. 한 마을에 살며 서로 데면데면 하는 게 볼썽사나워 10여 년 전에 진 거금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 그런 제안을 했으면, 차라리 단 돈 10만원 그게 아니면 50년 가까이 있으며 단 한 번도 대접 못 받은 식사라도 한 끼 하자든가 그것도 부담이 된다면 흔해 빠진 사과 한 봉지라도 들고 와 죽을지도 모를 췌장암에 걸려 있으니 우리 이것으로 퉁 치자 했다면 듣는 순간은 속이 쓰리겠지만 어차피 갚을 생각 없는 그 돈 달라며 멱살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법에 호소를 하겠는가.
큰 처남이라는 놈이 그랬다. 어디서 사기를 해 처먹다 피신을 한 게 제주도에 처박혀 10여 년을 숨어살다가 어찌 탈출하여 육지로 나왔는데, 먹고살 길이 없다며 매달리기에 경상도 문경 땅에서 모종의 공사를 할 때 그곳 관리감독을 맡기고 그곳에 오미자 농장 5천 평을 5천만 원에 10년 장기임대(작년에 끝남) 해 준 것은 물론 허름한 농가 2천만 원에 사주며‘제발 말썽 좀 부리지 말고 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2년이 채 못돼 밀린 공사비 지급 해달라는 독촉장이 날아오고 심지어 내 소유의 땅에 무연고 묘가 3~4기 있기에 법적인 하자가 없도록 만전을 다 하라는 부탁을 했건만 충분히 경비를 지불해 주었음에도 제 맘대로 파묘를 하고 근처 공동묘지에 뿌렸다며 경찰서를 들락거리게 한 일이며....계산을 해 보니 이래저래 억대가 넘는 금액을 장난질 했던 것이다. 오미자 농사 5천 평을 지으며 그 액이나 열매를 단 한 병도 먹어보라며 주지 않기에(꼭 먹어서 맛이 아니라...) 지나는 말로‘참! 지독한 놈’이라고 했던 게 귀에 들어갔는지 제 어미 내가 이곳에서 모시고 있을 때 그래도 자식이라며 두어 번 찾을 때, 그 때 1.8L짜리 음료수병에 딱 한 병. 그렇지만 처음부터 돈을 받자고 그 자에게 그런 편의를 제공한 건 아니었다. 지금 대장암 말기라며 누워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털어 놓지만, 장인 장모 두 분 제삿날이 오면 그 집구석 인간들 꼬락서니 보기 싫어 마누라만 보낸다. 어떨 땐 그 자 집 앞에 마누라 내려주고 난 모텔에서 자기도 했다. 대장암 말기라며 다 죽어 간다지만 그 쪽은 바라보고 싶지 않다. 절대 돈 문제가 아니다.
3부의 마지막, 내가 그 돈을 꼭 받자는 것도 아니고 아니 준다고 법적으로 따질 일도 아니고 더구나 거금이 수중에 들어 왔으니 득달같이 달려가‘내 돈 내놔!’라며 엄포를 놓은 것도 아닐 진데...‘그 돈 없어도 산다?’아무리 병들고 수술을 했어도 개만도 못한 개 보다 못한 개 같은 년이라고 저런 년은 빨리 죽어야 인류의 평화가 온다고 악담까지 했던 것이다.
내가 1976 마누라와 결혼을 했으니 햇수로 45년이 됐다. 3년을 마누라와 연애를 하고 결혼 했으니 근 50년 전 처가와는 인연을 맺은 것인데, 마누라와 연애(사내 결혼)할 당시에도 큰 처남과 죽은 처형의 첫 남편은 직장으로 찾아와 술 사 달라 밥 사 달라 가끔은 꿔 달라고 했지만 단 한 번도 갚지 않는 돈.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한 죄가 이리 클 줄은 그 땐 정말 몰랐었다. 아무리 마누라가 귀여우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지만, 마누라 사랑한 그 죄 값을 나이 70이 넘도록 갚아야 하는 이 얄궂은 운명.
도스도예프스키 불후의 명작‘죄와 벌’을 몇 차례 시도했었다. 개략적 내용은 알고 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죄와 벌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죄 짓는 놈 따로 있고 벌 받는 놈 따로 있는 게 틀림없다. 일 저지르는 놈 그것을 수습하러 다니는 놈, 빚진 놈 있으면 그 뒤치다꺼리 하러 다니는 놈이 있는 것이다. 부모자식 간 일 수도 친구 간 일 수도....또 부부 간 일수도 있는 것이다. 처형과 나의 귀인(貴人) 엄 서방이 그런 사례일 것이다. 처형은 언제나 죄를 길 바닥에 흘릴 정도로 많이 짓고 다닌다면 엄 서방은 그 뒤 처리를 하며 다니는 것이다. 이런 게 ‘죄와 벌’의 본 모습 아닐까?
‘그 돈 없어도 산다.’라는 말을 전해들은 후부터 얼마나 괘씸한지 아예 그쪽으로 눈길조차도 안 돌렸다. 도로를 따라 건너편에 처형과 처제의 집이 있지만 오가며 절대 눈길을 주지 않을 정도로 매정하게 대하던 어느 이른 봄날, 엄 서방이 날 찾았다. 저희 집 앞 조그만 텃밭을 갈겠다며 관리기를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꼴도 보기 싫었으나 따지고 보면 그 놈이 무슨 죄. 그런데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얼마 전 잘 다를 줄 모르는 관리기를 내가 다루다 집안의 고목에 처박았는데 그 후로 꼼짝을 않는다. 조만간 수리공을 불러야겠다고 처박은 그 자리에 비 맞지 않게 비닐로 포장을 해 둔 그 때 그가 빌리러 온 것이었다.
지금 고장이 나 움직이지 않으니 다른 집에 가 빌리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했는데, 이 친구‘제가 한 번 살펴 볼 게요 형님!’, 그러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라고 난 내대로 볼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푸더더덩 텅텅텅..’관리기의 힘찬 발동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속으로 얼마나 반가운지...“ㅋㅋㅋ.. 절마 제법인데...선박(어선)의 기관장을 했다더니...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도 있다던데...”등등 이런 저런 생각에 쾌재(快哉)를 불렀었다.
기분이 째지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모른 척 하고 얼마 뒤 그가 관리기를 창고에 가져다 놓자 나는 다른 부탁을 그에게 하게 됐는데, 마침 그 때 뒤안 쪽의 나무들이 너무 무성하여 솎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용하던 엔진 톱이 시동도 안 걸리고 고장이 났던 것이다. 면(시내)으로 고치러 가긴 가야 하지만 그리 시급한 게 아니라 미루고 있던 차에 종류는 다르지만 혹시? 하고 엔진 톱 고장을 얘기하자 그 자리에서 시동을 걸어 보고 해체를 하더니 몇 가지 공구를 요구하기에 가져다주었는데 불과 10여 분 뒤에 톱은 고유의 굉음(轟音)을 내며 작동이 되는 것이었다.
순간. 그 환희(歡喜), 그 희열(喜悅)..... 그리고 바로 후회(後悔)....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내가 이런 인재를 핍박 했구나. 지가 지은 죄도 아님에도 이런 사람을 무시했구나. 엄 서방은 딱 한마디로‘마이다스의 손’이었다. 그 순간 솔직히 처형의 죄고 뭐고 간에 난 그에 대한 존경심까지 일어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