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기 79년 80년 그때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 대한민국 전체가 지진강도 9를 능가하는 파괴력으로 순식간 외지끈 무너진 그 무렵 나역시도 겉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겨우 목숨을 부지 한 것만 같다.어디서부터 말문을 열어야 할까.지진 흙더미에 머리를 파묻은 양 난산한 그 시절처럼 지금도 여전히 정리가 안된다. 갖은 스트레스에 지쳐 더 이상은 방도가 없는 대한민국이었다.그 무렵 정치적 이슈는 너무 많았다. 그 중에 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라 할 것이었다. 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른다.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 민심이 떠나서 배반함) 현상이 표출 된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나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책을 찾지를 못했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시켰고 그해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YH노조의 여공들은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한다.
YH사태는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러자 그 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폭발한다. 1979년 10월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알다시피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다.그리고 끝내 10.26사태가 발생한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우리나라는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휩쌓인다. 12·12 군사 반란 또는 12·12 사태 발생.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다.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했다.
당시는 대통령의 권한으로서 특별히 취할 수 있다는 특별조치, 긴급조치란 게 있었다. 살벌한 긴급조치 9호는 그중 제일 악랄했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나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등에 대해서는 엄격히 처벌을 한다는 조항인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격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든 처벌이 가능한 무소불위의 초법적 조치였다.
나는 1979년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는데 내 주위에 많은 친구들이 긴급조치위반으로 잡혀 들어가 징역을 산 친구들도 있고 경미한 가담자는 바로 군에 입대해 일선에 배치되었다. 그해 봄 부터 시작한 데모는 여름을 지나자 더욱 극렬해져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기던 그 무렵이었다. 뉴스위크잡지를 들고 다니며 이를 파는 척 하며 정보를 수집하던 형사들이 무더기로 보이더니만 예상대로 휴교령이 떨어졌는데 생각지도 않은 10. 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중앙청 앞에 느닷없는 탱크가 나타난 12.12가 터져 정국의 앞날은 그야말로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유신독재가 종언을 고하였으니 마음 한 편으로는 그 다음 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를 하였는데 3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이 기지개를 피던 80년 민주화의 봄은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한 사람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한 사람은 제주 감귤농장을 빼앗기고 또 한 사람은 5 18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몰려 사형을 언도 받으며 정치의 장에서 모두 멀어져야 했다. 12.12 쿠테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1980년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그해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80년 봄 군부독재 정권타도를 외치는 데모는 한껏 가열찼는 데 광주에서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난 것 같다는 말들이 시중에 돌기 시작했다. 동네 친구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연락이 안되자 다급해진 그애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쩌든 소식 좀 알아보라 했었다. 누군가는 가는 길목이 차단되어 광주 진입이 어렵다고도 했다. 당시 외신보드를 보고 하는 소리였다. 겨우 전화 연결이 되기는 했는데 잘 있다는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총소리가 들리고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그로 더욱 애가 타고 걱정이 되던 4대 독자인 그 친구였는데 다행히 그 친구는 무사하였지만 나도 잘 아는 하숙 집 옆방 친구는 그때 죽고 말았다.
무참한 광풍이 몰고간 광주를 비롯한 대한민국, 그 격변의 세월 1년( 79년 여름 부터 해서 80년 여름 까지 )나는 거의 강의를 받지 못했다. 모든 것은 레포트로 대체가 되고 휴교령이 떨어져 빈둥빈둥 놀다가 졸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갑자기 80년 봄 과외공부를 폐지시키는 바람에 늘 하던 용돈 벌이도 끊기고 우울하기 그지 없는 나날이었는데 아버지는 부정 공무원 숙정이라는 명목으로 25년 다닌 직장을 80년 7월 졸지에 그만 두게 되어 그야말로 우리 집은 당시의 시국만큼이나 을씨년스런 초상집 같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러 외국으로 나가겠다던 꿈을 접었다. 취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 잔인한 80년도에는 어느 회사도 사람을 뽑지 않았다. 그래도 전년도 까지는 000명이란 숫자가 분명히 찍힌 채용공고 활자체를 신문에서 쉽게 보았는데 아예 모집공고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정치가 엉망이라서도 그러하지만 이에는 그 시대에 합당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야기는 박통의 정권 몰락과도 유관하다싶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어늘한 그 얼룩진 터널을 어쩔 수없이 다시 들여다 보아야 할 모양이다. 격동의 시기 7980은에 나오는 유명 인물들은 모두 한 결같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렇겠지만 그 모두는 또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같이 세상은 이중성을 지녔으며 권력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민심에게 달려 있으며 민심이 곧 하늘의 뜻임을 나는 그로 잘 알고도 있다.
첫댓글 나도 그시절에는 학생이였답니다
양갈래 곱게 따서 묶은 학생 ...지금은 아휴 ,,,
머물다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