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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양철북을 던져 버려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의 명작 <양철북>을 영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3살 나이로 성장이 멈추어버린
오스카라는 한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자신의 가족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모조리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책의 처음부터 수배자였던 할아버지를 넓은 스커트 밑에 숨겨주었던 일 때문에 어머니가 태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오스카는 매우 어리지만 어린 이상의 냉철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 부조리한 장면을 볼 때마다 북을 치며 유리가 깨어질 정도로 큰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며 지하실에서 떨어져 그 나이로 멈추어 살게 됩니다.
심지어는 왜 이런 더럽고 부조리한 세상을 보고만 있느냐며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자신의 북을 걸어주며 쳐보라고까지 합니다.
이 이야기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장면 하나가 장어를 먹는 장면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사촌 오빠와 오스카는 해변으로 놀러나갑니다.
여기서 장어잡이를 만나는데 그는 죽은 말의 머리를 잘라 그것을 줄에 매어 바다에 던져놓고는
장어들이 그 머릿속으로 들어와 썩은 고기를 뜯어먹고 있을 때 그것을 다시 끌어 올려 그 속에 든 장어들을 빼내어 팔고 있었습니다.
입에서도 빼 내고 귀에서도 장어를 빼내는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합니다.
그런데 요리사인 남편이 그 장어를 사서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해 줍니다.
아내는 그 장어가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성의가 무시당한 분노로 남편은 집기를 부수고 소리를 지릅니다.
아내는 울며불며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어머니의 사촌 오빠 얀은 어머니를 위로하겠다며 방으로 쫓아 들어가고
장롱 안에 오스카가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어머니와 사랑을 나눕니다.
둘은 처음부터 내연관계였던 것입니다.
오스카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의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두 아버지 후보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어머니는 남편이 해 준 장어요리를 마구 먹기 시작합니다.
이는 오스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세상을 판단하며 경종을 울리기 위해 침묵하기만 하시는 예수님 대신으로 비명과 양철북을 두드리던 오스카는
결국 자신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스카 자신 때문에 ‘어머니’와 ‘두 아버지 후보들’이 죽음을 맞게 되고
자신도 성적 욕망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임을 삶으로 깨닫게 됩니다.
아내가 남편이 해 주는 장어가 역겨운 이유는 장어가 역겹기보다는 남편이 역겨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남편이 있는 가운데 외도를 하고 있는 썩은 말고기를 먹고 사는 장어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장어보다 못한 존재임을 느끼면서는 상대의 더러운 면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스카도 자신이 비판만 했지 절대 자신이 비판했던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고 북을 집어던지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다시 몸이 성장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탁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건전한 삶 때문에 당연히 더 나은 취급을 받아야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윗자리는 비단 식탁에서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며 스스로를 윗자리에 앉히는 사람들입니다.
각자가 양철북을 들고 세상과 하느님까지 판단하는 가운데
정작 성장이 멈추어버린 자신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자선까지도 자신을 높이는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할 때도 그 사람들로부터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 초대합니다.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웃들의 매우 역겨운 것들을 사랑이라는 위장으로 억지로 먹어주는 척 합니다.
주님은 이런 위선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우리도 가장 큰 죄인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오스카의 어머니처럼 죄를 지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금방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더더욱 타인을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립니다.
진정한 치료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 피를 내 자신이 흘리게 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강의에서 어떤 목사 지망생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중 고양이가 차 밑으로 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양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빨리 차를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안 운전기사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듯 그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청년은 고양이가 죽지 않기를 기도하며 뛰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자 피가 흥건하게 있는데 고양이는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피를 따라 가다보니 상자 밑에 고양이가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손짓을 해도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집어넣었는데 고양이가 손을 물어서 피가 줄줄 흐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집어넣으니 마구 할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양이를 살려야한다는 마음으로 고양이를 끌어냈습니다.
이미 허리 밑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고양이를 피가 나는 손으로 안고 근처 동물병원으로 뛰었습니다.
동물병원 의사는 그 고양이는 곧 죽을 거라고 했고 검은 봉지에 넣어주었습니다.
매우 슬픈 마음으로 고양이를 들고 오는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고양이가 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죄에서 끌어내려 했는데 네가 나를 물고 할퀴어 상처를 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어쩌면 자신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생명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하느님께 더욱 아픔을 드렸던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비로소 양철북을 내던지게 됩니다.
윗자리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적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윗자리에 앉지 맙시다.
주님은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고 비천한 이를 끌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이미 높은 자리에 있는 이는 낮추시고, 부요한 자를 내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높이 있기를 좋아하는 내 자아를 발밑까지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나를 윗자리를 끌어올리는 양철북을 제발 버리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밟혀도 당연한 상태가 되고 모든 것을 잃어도 욥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지막의 베드로처럼 누구의 말에라도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주님은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깊은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와 참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옵시다.
양철북을 내어 던집시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서공석 세례자 요한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서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며 사람들을 가르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되어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어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그날 초대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교훈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집주인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후일 언젠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조의금을 낼 때,
우리는 혼주(婚主)나 상주(喪主)로부터 과거에 받았던 것, 혹은 후에 우리가 받을 것을 고려하여 액수를 정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일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가 되도록 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이 행복한 우리 이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이 권하는 실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이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대우를 받고,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자 합니다.
입은 옷으로, 가진 자격증으로, 주어진 지위로, 혹은 가진 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것이 손해 보지 않고 현명하게 사는 우리의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정을 고려하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보려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행동방식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이웃의 입장에서 이웃을 보고 그를 이해하며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인간은 소신껏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그분의 노예, 혹은 그분을 위한 기쁨조가 되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동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북한 동포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자기 스스로를 과대포장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찾으시면, 우리에게는 자유도, 소신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기쁨조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대들은 나의 벗” (요한 15, 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은 벗을 자유롭게 해주고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실천하는 사랑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과 행복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가능합니다.
순종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일은 오늘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하느님이 그 중심에 살아계십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고, 이웃을 지배하고 순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은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맹수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씁쓸함과 살벌함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생명들을 짓밟고 죽여 버린, 씁쓸함입니다.
우리는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이 나는 일에는 관대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도 나 한 사람 잘 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돈을 바치는 이를 좋아하고, 바친 만큼 은혜를 베푸신다고 착각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람들도 돈을 바쳐야 하느님이 더 잘 고쳐주신다고 말합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치유된다고도 말합니다.
어느 특정의 곳에 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모두가 이해타산(利害打算) 하는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根性)에서 해방된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한 번 깨달아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무릅쓰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많은 실패를 겪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 준만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의 살과 피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는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 부신교구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갑곶성지에서의 오후 미사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있었던 미사가 아니라 제가 올해 이곳에 부임하면서 새롭게 만든 미사이다보니 참석하시는 신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미사는 많은 분들의 요청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지에서 먼 곳에서 사시는 분들이 11시 미사에 참석하기 힘들다면서 오후 미사가 꼭 있었으면 한다는 요청이 있었지요.
그래서 오후 미사를 만들었지만 그 숫자는 아주 미비합니다.
며칠 전에는 미사를 시작하려는데 딱 세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분이 미안한 마음이 드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셋 밖에 없는데도 미사해요?
죄송합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혼자 미사할 뻔 했는데 같이 미사하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세 분 덕분에 혼자 하는 미사가 아니라 함께 하는 미사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사람이 별로 없으니 미사 반주나 해설 봉사자들께 오시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기타를 잡고서 미사 성가 반주를 하고, ‘앉으세요. 일어나세요.’등의 말을 하면서 해설까지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오후 미사 때에 깜빡 잊고서 기타 조율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사 직전에 미리 조율을 해 놓는데, 어제 기타를 치고서 만지지 않았으니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을까요?
음이 전혀 맞지 않아서 기타 반주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기타로 인해 곤란을 겪고 난 뒤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매번 조율을 해야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매번 조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조율되지 않은 기타도 분명히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소리, 즉 깨끗하고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조율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겠지요.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과 반대의 삶을, 그리고 깨끗하고 좋은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삶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까요?
내 맘대로 조율하면 그만일까요?
기타 조율은 정해진 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냥 내 마음대로 맞췄다가는 이상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될 것입니다.
내 삶 역시 내 뜻대로 조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에 맞출 때 제대로 된 삶, 깨끗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십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낮아지는 자리를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자리는 낮은 자리이므로
이 낮은 곳에서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잔치를 베풀 때에는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이 역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답 받지 않을 생각으로 잔치를 베풀면
주님께서 대신 보상해주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나의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맞춰 조율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끝자리에 앉아라.>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세속에서의 처세술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윗자리’는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뜻합니다.
주인이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그런 자리에 앉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자기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에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은 결코 성인품에 오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를 뜻하고, 초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귀한 이’도 없고, 남들보다 ‘더 천한 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더 귀한 이가 와서 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은
교만의 결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으로 해석됩니다.
또 하느님 나라에는 더 높은 자리도 없고 더 낮은 자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여기서 ‘끝자리’는 앞에 나왔던 ‘끝자리’ 라는 말과는 다르게,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를 뜻합니다.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또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제대로 앉는 것입니다.
만일에 속마음으로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낮은 자리에(끝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거짓 겸손’은 ‘위선’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윗자리로 올라앉으라는 말을 들으려고 일부러 낮은 자리에(끝자리에) 앉은 것이라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 겸손’이라는 함정에 빠집니다.
자기를 무조건 낮추기만 하면 다 겸손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면서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들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초대한 이가 와서 앞자리로 올라앉으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든지 못 들어가든지 간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말해도 안 되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겸손하게 간청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의 모범이 되는 인물로 바오로 사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칠삭둥이’ 라고 표현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코린 15,8-9)
만일에 이 말이 속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자기의 겸손을 과시하려고 한 말이라면,
바오로 사도의 겸손은 ‘거짓 겸손’이고, 그는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믿고 있고,
그를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7)
그는 자기가 사도로서 다른 이를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사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필리 3,12)
이 말은,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은 그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낮추고 비우고 작아지는 겸손의 아름다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만하고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을 염두에 두고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이의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하십니다(14.8-10).
또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14,11).
집회서의 저자 또한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3,18-20)
고 권고합니다.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요, 신앙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피조물이요, 주님 사랑의 도구임을 명백히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인식하는 것이요,
그에 따라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의식하는 것을 뜻합니다.
겸손(humilitas)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은
부드러운 부식토를 뜻하는 후무스(humus)입니다.
겸손의 덕은 부식토처럼 온갖 것을 받아들여 썩는 과정을 거침 다음 생명을 싹틔울 수 있는 받아들임의 준비를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부식토처럼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자세가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아름다운 조가비나 조약돌을 주우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듯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물, 영원한 생명, 참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하느님의 사랑도 낮은 곳에 있는 우리를 향하여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 없이 의무감이나 다른 이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써 낮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겸손이요 열등감과 자기 비하로 드러나는 교만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겸손은 자신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참 겸손은 낮추는 데서 더 나아가 작아지고 비워야 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작은 자는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인식할 뿐 아니라 남들을 자기보다 더 낫다고 여깁니다.
작은 자는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서슴지 않고 자신을 맨 끝자리에 놓습니다.
겸손한 자는 가난한 마음으로 시간과 물질, 덕행과 재능 등 온갖 선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에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 때문에 감사하며 기뻐할 줄 압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며 누구를 먼저 선택하셨는지를 알아 그대로 행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줄 압니다(14,12-14).
오늘도 낮추고 비우며 작아지는 겸손한 태도로 불의와 불평등, 빈곤과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함으로써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진정으로 행복을 맛보는 우리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이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 진리의 연인(戀)>
어제 8,27일은 성녀 모니카 축일이었고,
오늘 8.28일 주일이 아니었더라면 성녀 모니카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했을 것입니다.
마침 어제 읽은 경향신문의 ‘내 인생의 책’이란 제하의 성염 교수의 글 일부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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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에 그 진리를 발견하고는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죽을 때까지 후회한 철학자가 또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번역·주석하는 작업에 40여년 종사한 나는
이 교부를 ‘진리의 연인’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시인 사제 최민순 신부의 유려한 번역본(1965)을 읽어오다 이번에 원문 번역을 감행하면서 <고백록>을 정독했다.
‘인간이라는 위대한 심연’을 들여다보다 “인간이란 사랑이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간다”는 고백에 새삼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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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없이 강론 제목은 ‘이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진리의 연인’으로 택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호칭인지요.
참 욕심나는 사람이 ‘진리의 연인’입니다.
‘인간은 사랑이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고 내가 끌려간다.’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깨달은 성인의 고백입니다.
진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진리의 연인은 하느님의 연인이란 말과도 그대로 통합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필생의 목표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 하느님의 연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하느님을 항구히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닮아갈 때 비로소 진리의 연인, 하느님의 연인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연인’을 세 측면에 걸쳐 묵상했습니다.
첫째, 온유(溫柔)한 사람입니다.
온유(溫柔), 온화(溫和), 온후(溫厚)하다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진정 이런 사람이 진리의 연인,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역시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집회서의 서두 말씀도 온유하라는 권고입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분노와 대척점에 있는 게 온유입니다.
에바그리우스 수도교부가 강조한 덕도 온유입니다.
어제 읽은 한 단락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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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는 “프락티케의 꽃”이며,
그 토대는 “계명 준수”(프락티코스, 81장)로 이루어집니다.
온유는 ‘인식의 어머니’입니다.
관상가의 탁월한 덕은 ‘분노의 부재’, 곧 ‘온유’입니다.
이 두 가지 덕은 영성생활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실상 “기도는 분노의 부재와 온유의 싹”(기도론, 14장)입니다.
어떤 덕도 온유만큼 지혜를 낳지 못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온유를 ‘강한 자의 덕’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온유는 모세와 다윗, 그리고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습을 특징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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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진정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유한 자가 강한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한 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내면 무조간 집니다.
궁극의 승리는 온유한 자에게 있습니다.
월요일 3시경의 성경소구는 늘 읽어도 공감이 갑니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혀를 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셈이니 그의 신앙생활은 결국 헛것이 됩니다.”
(야고1,19ㄴ-20.26)
분노는 불과 같습니다.
온갖 선행의 업적들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산불같이 온 산을 태워버리는 분노라면
생명의 빛으로 온 산을 살리는 햇볕같은 온유입니다.
평생 온유의 수련자가 되어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둘째,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진리의 연인, 하느님의 연인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흙(humus)을 닮은 겸손(humilitas)이요, 흙같아 사람(homo)입니다.
겸손도 사람도 같은 어원 흙에서 기인합니다.
오늘 제 1독서 집회서도 온유에 이어 겸손을 권합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온유의 적이 분노였듯이,
겸손의 적은 교만입니다.
모든 악덕의 뿌리가 교만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교만과 탐욕입니다.
역시 다음 집회서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냄으로 비로소 교만과 탐욕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합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도 겸손하라는 권고입니다.
겸손이 지혜요 교만이 어리석음임이 단박 드러납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높아지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겸손한 자 의를 따라 걷게 하시고, 겸손한 자 주님의 도를 배우게 하십니다.’(시편 25,9).
예수성심의 사랑도 온유와 겸손으로 요약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에서 메모해둔 글도 생각납니다.
“마음이 겸손한 자들이야말로 당신께서 머무시는 집입니다.”
겸손은 비굴도, 자기 비하도 아닌,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아는 지혜요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입니다.
위장이나 위선, 허식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참 나의, 참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셋째, 환대하는 사람입니다.
환대하는 사람이 진리의 연인, 하느님의 연인입니다.
주님 역시 언제나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하십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입니다.
정주생활을 하는 분도수도자들의 핵심적 영성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는 환대의 영성입니다.
잘 난 사람을, 가진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누구도 합니다.
진정한 환대에는 차별이나 무시가 없습니다.
없는 이들에 대한 환대가 정말 하느님다운 환대입니다.
주님은 특히 다음 같은 이들을 환대하라 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아니 이런 이들을 차별없이, 무시함 없이 환대한다면 이미 지금 여기서 하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환대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가이없는 사랑입니다.
한결같은 환대의 사람을 소개합니다.
제가 춘천에 갈 때마다 시간을 내어 환대해 주시는 한 교수 자매입니다.
때로 동행한 분들이 있을 때 그분들에게 대하는 것이나 저에게 대하는 것이나 한결같이 똑같습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전혀 차별이 없이 있는 그대로 순수한 마음으로의 환대입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이자 형제자매로 맞이하는 환대의 자매입니다.
참 화통하고 자유롭고 똑똑하고 용기있는 한 교수 자매입니다.
참 환대의 사랑은 순수요 자유요 용기임을 깨닫습니다.
30여년간 대학 교수로 있지만 교수티는 전혀 없는 분입니다.
자기가 교수라는 것도 잊은 듯이 보이는 그런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기도 합니다.
만날 때마다 참 사람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진리의 연인, 이런 사람으로 살 수는 없을까?
오늘 연중 제22주일에 주님은 그 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온유한 사람, 2. 겸손한 사람, 3. 환대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히브리서 말씀 그대로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시온 산의 행복을, 천상 예루살렘을 사는 이들입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연중 이런 진리를 앞당겨 체험케 하시고,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온유와 겸손, 환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시편 31,20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예수님께서는 초대받거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겸손하게 행동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것은 나에게 건네시는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함이며,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지요.
겸손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남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자신 안에 잠재된 사심과 계산적인 마음을 버리기를 촉구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행위의 순수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구에게 선물하고, 누구를 초대하는 그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나도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게 되고, 상대방이 보답을 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질 수도 있지요.
만일 이렇게 된다면 내가 베푼 선행의 순수성을 잃게 될 위험마저 있지 않습니까?
둘째, 예수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도록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외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마음이 피폐해 영혼이 가난한 것이지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풍요해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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