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 주님이 나타나시는 때
바다나 큰 호수 위에 떠 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불안한 일이다. 거기에 풍랑이 거세지면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그래서 인생이나 공동체가 항해하는 배에 비유되는 거 같다. 제자들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 뜻밖의 큰 행사를 치르고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배에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5) 예수님은 산에서 홀로 기도하셨다.(마태 14,23; 마르 6,46)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그렇게 큰 행사를 치렀으니 나 같으면 맥주 한 잔 마시며 풀어졌을 텐데, 예수님은 제자들도 떠나보내시고 홀로 기도하러 가셨다. 산은 하느님과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어떻게 얼마나 하셨다기보다는 그분은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과만 함께 계셨다는 보도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게 쉼이고 나는 풀어지는 게 쉼이다. 그분과 나는 참 다르다. 질적으로 다르다.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풍랑 위로, 그 풍랑을 밟고서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풍랑에 흔들리는 작은 무동력 배, 그 안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혼란, 혼돈, 두려움 그 자체였을 거다. 창세기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상황이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는 그곳, 내가 상황을 해결하거나 바로잡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바로 그런 때가 역설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시간이다. 어둠 속의 빛처럼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느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당신 이름, ‘있는 나’(탈출 3,14)를 기억나게 하는 말씀이다. 전화기에 발신자 표시가 없던 시절,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이,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정하게, 친밀하게 다가오신다.
제자들은 그전에도 이런 일을 겪었다. 그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 그런데 그분은 주무시고 계셨다. 배에 물이 들어와 거의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그분은 아무것도 안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하며 불평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나, 안 계시나 제자들은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거다. 그분이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거다. 순교의 시간이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이다. 순교하게 해달라고 청한 선조들이 있었을까? 순교의 칼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는 있었어도 그렇게 죽게 해달라고 청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옥 밖에 있는 다른 교우들은 당연하고 그분들도 풀려나기를 기도했을 거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순교의 영광을 주시려고 구하지 않으신 게 아닐 거다. 하느님은 그들을 구하지 못하셨을 거다. 그 대신 그들과 함께, 그들을 안고 계셨을 거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며 그들 하나 하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을 듣는다고 육체적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예수님도 매 맞으셨을 때,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나 마음은 평화로우셨을 거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바른길을 갈 때 육체적으로는 힘들어도 마음은 편한 게 뭔지 잘 안다. 주님은 그렇게 당신을 나에게 드러내신다.
예수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그러고는 불안하게 물 위를 걸어보지만, 몇 발짝 못 가서 곧 물속으로, 혼란과 걱정과 두려움 속으로 다시 빠지고 맙니다. 믿음이 약한 저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제 앞에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울부짖을 수 있고 실컷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