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제공 逸話
朝鮮
영조대왕의 치세기의 일입니다.
漢陽에 살던 채제민이란
靑年이 있었는데
名色이 兩班의 씨앗이었지만
일찌기 父母를 잃고
一家親戚도 없이 떠돌았습니다.
여러해 모아둔 돈으로
평양에 가서 장사를 시작하다가
失敗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宿所로 삼았던 집의 딸과
서로 눈이 맞았고,
身分上昇의 慾求:欲求가 많았던
집주인은
서울의 兩班집 아들인
채제민을 데릴사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할일없이 놀고 먹기만 하는 사위를
몹시 미워하게 된 丈人이
사위에게 失望하여
그를 내쫓으려고 할 무렵,
평양땅에 채제공이 평양監司로
赴任하게 되었습니다.
•蔡濟恭(1720~1799)
채제민의 丈人은 평양監司가 稀貴姓인 "채씨"였으며
돌림자도 가운데 제"자를 使用하고 있어서 사위의 姓이 같고
行列도 같았으므로
아마 一家라도
되나보다 생각하고
사위더러
“여보게, 이번 監司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혹시 아는 사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채제민은
“안다 뿐입니까.
제 四寸형님인데...”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사위를 내세우면
周邊에 名分도 서고 큰 利得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위에게
“그럼 봬러 가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혀 본적도 없는
채제공 監司를 안다고
큰소리를 친 채제민은 이 말에
“네, 봬러 가야지요,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서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衣冠도 準備하고
다른 人事치레도
準備를 해야 가지요”라며
옷을 만든다
무엇을 準備해야 한다면서
채제민은
평양監司를 만나러 가는 것을
此日彼日 미루었습니다.
及其也는
더이상은 監司를 만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채제민은
벌레 씹은 表情으로 官衙 앞에 나아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官員들이 다가와
그 緣由를 물었으나
監司를 直接 만나야만
對答을 하겠노라며
繼續
大聲痛哭을 하였습니다.
官營 밖의
이러한 소란을 전해들은
평양監司는 채제민을 官衙로
들게 하였습니다.
평양監司 앞에 앉은
채제민은 無條件
"저좀 살려주십시오"하며
席藁待罪를 하였는데
이에
당황한 監司는
“넌 어디서
온 누구인가?”라고 묻자
“한양에서 온
평강채씨 채제민입니다.””
"그래?
채제민이라~
허어~
나하고
본관과 行列이 같구나”
하였다.
이 말에 勇氣를 얻은 채제민은
우는 것을 그치고
“감사님의 姓과 본관이 같고
行列이 같기에
저의 丈人께 감사를 四寸형님이라
거짓말을 했으니
이 어찌
큰 罪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
하였다.
自初至終을 들은
평양감사는
"하하하!
“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너의 四寸兄이 되면 될게 아니냐.
좋다,
客地에서 동생하나 얻어서 좋고
너도
兄을 얻어서 좋고...”
監司는 사람을 시켜
自身의 婦人을
불러오게 하더니
婦人보고
“여보, 내 四寸동생이요”하고
人事시키고
그 아들들에게는
채제민을 작은 숙부뻘이 되는
아저씨라 인사시켰다.
그리고는
“여보게!자네의 丈人하고
함께 찾아오게나.
그래야
여기 있는 평양땅에서 지내는 동안에
처갓집으로부터
無視 당하지 않고 堂堂하고 편할 것 아닌가?”하니
채제민은 感激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丈人이
“그래 봽고 오느냐”하고
물으니
“네, 봽고 왔습니다.
監司께서 丈人도 봽자고 하니
빨리빨리 갑시다” 하며
급히 飮食과 膳物을
準備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평양감사 채제공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사돈 어서 오십시오”라는
人事를 하고는
“아우가
일찌기 父母님을 잃고
방황(彷徨)하더니 ~
집을
나간지가 오랜데
生死를 몰라서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사돈의 따님과
結婚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맙고 感謝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人事를 하였습니다.
그뒤로는
丈人은
一家 親戚은 물론이고
親舊들과 이웃에게 사위가 평양감사의 동생이 된다는 事實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재미에 빠져서
사위를
極盡히 對했다고 합니다
채제공이
평양감사 任期 동안에
항상 아우 채제민을
가까이 두더니
영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榮轉되어 漢陽으로 들어갈 때는
채제민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의 돈의동에다가
아래채, 위채 집을 짓고서는
위채는 채제민이 살고,
아래채는 채제공이 살아서
義를 두텁게 했다고 합니다.
"채씨 형제"간의 義理는
當時에 兄弟間 友愛의
表象이 될 정도로
關心을
끌었다고 합니다
채제공은 厚德한 人間愛는 물론이고
忠誠心도 남달랐습니다.
영ㆍ정조 時代는
朝鮮 後期
르네상스 시대라고도 합니다.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의 忠臣으로
記錄되고 있습니다.
英祖實錄에도
士官이 租孫間의 私的인 對話를
記錄으로 남겼으니~
영조가
세손(후에 정조대왕)에게
"眞實로 私心이 없는 나의 臣下이고
세손(정조)의 충신이다."
이는 일찍이 영조가 채제공을 일러
孫子인 정조에게 한 말입니다.
채제공은 정조가 王이 아닌
세손시절부터
朝廷에서 세손을 廢位시키려는
粗織的인 움직임을
앞장서서 막아냈으며
궁궐守備를 責任지며
세손을 殺害하려는
자격(刺擊)들을
막아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치세기에
채제공은
黨派에 치의치지 않으니
唯一하게 믿을 수 있는
신료중의 한 명이었으며
좌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漢字/無心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