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危機)의 서막(序幕) -
기주성에 입성한 뒤 조조의 첫 번째 대외 행사는 원소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조조는 그 자리에서 수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 옛날 낙양에서 둘이 환담할 때 원소는 하북을 근거로 남쪽을 도모하겠다고 하였고 나는 신인을 규합하여 시대의 혁신책을 쓰겠노라 웃으며 말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원소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리고 조조는 승장(勝將)의 도량으로 원소를 섬기던 문무백관들을 너그럽게 등용하는 동시에 원소가 보관하고 있던 조조 자신의 부하이지만 원소의 첩자 노릇을 한 간자(間者:간첩)들이 보낸 서찰을 개봉하지 않고 그대로 불태워 버리도록 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점령지 백성들에게는 특별히 일정 기간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기주 목(冀州牧)이 되었다. 그로 인해 민심이 조조에게 집중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조조는 원소의 측근을 비롯한 자신의 측근에 대한 적폐를 청산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묻어두었다.
조조는 원소가 가꾸어온 궁궐 곳곳을 측근들과 함께 돌아보며 감탄했다.
"좋군! 대단해! 기주 부가 정말 의리의리 하구나! 그 옛날 낙양보다 더 뛰어난 곳이야. 이게 원소의 땅이었다니 아쉬울 따름이로다."
그러자 측근에 있던 아들 조비가.
"원소가 기주 부를 지을 때 황궁을 염두에 두고 지었다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조조가,
"많은 현사(賢士) 들과 문인(文人)들이 왜 원소를 따랐는지 이제야 알겠군, 집이 무척 컸으니까!" 하고 말하자 측근의 수행원 모두가 한바탕 웃어졌었다.
이렇게 승자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어느 날 조비는 중국 천하의 세력 분포도를 기주 부에 펼쳐 놓고 아버지 조조에게,
"보세요! 천하의 절반이 아버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유표, 유장, 손권 등입죠." 하고 말하였다.
조조가 중국의 천하 세력도를 천천히 살펴보며 입을 연다.
"형주의 유표는 성만 지키는 영감이라 조만간 우리가 출정하면 쉽게 접수될 것이고 유장도 마찬가지 손권은 어린놈이 군사도 적으니 염려할 것 없고 그러나 형주의 유표에게 투항한 유비는 반드시 제거해야 해!"
조조가 그렇게 힘주어 말하자 조비가 신야를 가리키며,
"유비는 요 작은 신야에 있습지요. 신야 성은 형주 성에서 백리 떨어져 있고 군사라고는 겨우 삼천도 안되어 표시도 안 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조조가,
"유비를 남겨두면 평생 후환이 된다." 하고 말을 하니 조비가 유비의 삼천 군사는 별것이 아니라는 듯이 조조의 군사의 규모를 나열한다.
"아버님, 원 씨 일문을 전멸시키고 우리 군사는 그 수가 크게 불어 보병 삼십만에 마병 십오만, 수군 이십만까지 모두 육십오만에 이릅니다. 그러니 아직 우리가 점령하지 못한 군(郡)의 보유 병사 모두를 합한다 하더라도 우리 절반이 못되니 염려하실 바는 아닙니다."
아들 조비의 말을 듣고 조조가 결론을 내리듯 말한다.
"앞으로 일 년간 삼군을 정비하여 군사를 정예화 시켜 전쟁 준비를 하고 군량과 무기를 생산하고 비축해 단숨에 천하를 통일하겠노라."
"네, 알겠습니다."
한편, 신야성 성루에 올라 지난날을 회상하며 상념에 잠겨있는 유비에게 모사(謨士) 간웅이 다가와 조조와 원소 간의 전투 현황을 보고한다.
"주공! 조조가 재차 원소군을 대파하자 원소는 피를 토하며 죽었고 그 아들 원담과 원상은 전쟁 중에도 세자 자리를 다투니 조조가 그 틈에 공격해 결국 수십만 원소 군이 조조에게 전멸했다고 합니다.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으나 태수 공손강이 죽였고, 그 목을 조조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조는 기주, 청주, 병주와 유주를 얻어 천하의 절반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듣고만 있던 유비가 한탄조의 입을 연다.
"온통 조조의 세상이로세...."
이때 병사 하나가 이들 앞으로 다가와 아뢴다.
"주공! 유표의 전갈이온데 형주에서 단오절을 함께 보내자고 하십니다."
한참 상념에 잠겨 있던 유비가 천천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알았네."
단옷날 점심 즈음 유비는 단신으로 유표를 만나기 위해 형주성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유표의 집정 전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시녀를 대동하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유비는 그 귀부인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하여 잠시 발길을 멈추고 길을 비켜주고 있는데 부인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넨다.
"혹시 유황숙이신지요?"
유비도 상대방에 맞춰 인사를 하며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채 씨이옵니다." 부인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부인이 유표의 후실 부인임을 알아채고,
"형수님, 결례 했습니다." 하고 조금 전과는 다르게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정중히 굽혀 인사를 하였다.
"괜찮습니다. 형주가 좋으세요?" 채 씨 부인은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유비는 미소를 띠며 대답하였다.
"네, 아주 좋습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러면 좀 더 머무르세요." 채 씨 부인은 이렇게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유비는 채 씨를 보내고 난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지?.. 떠나라는 소리인가?..."
이러는 가운데 유표의 측근 시종이 나와서 안내한다.
"황숙! 들어가세요. 주공께서 기다리십니다."
유비는 그를 따라 들어가 유표와 함께 자리하였다.
유표가 유비를 보고 덕담을 건넨다.
"현덕! 살이 올랐어. 기운도 가득해 보이고.."
그 말을 듣고 유비가 처량해 보이는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한탄하듯 대답한다.
"소인이 이제 곧 오십이온데 세운 공도, 가진 땅도 없이 나잇살만 늘어가고, 하는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내며 늙기만 합니다."
"이보게 현덕! 자넨 오십도 안 되어 늙었다고 한탄하는데 예순넷이나 먹은 난 어떻겠나,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나의 오랜 고충이 있어 의논하려 하니 자네 생각을 말해 주길 바라네."
유표가 새삼스레 자신의 나이 얘기를 하니 먼저 말을 꺼낸 유비는 대단히 송구해졌다. 그리하여 묵묵히 유표의 말을 듣고 있다가 유표의 질문이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하문하십시오." 하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유표는 잠시 주위를 돌아보며 혹시라도 엿듣는 사람이 없는가 확인한다.
그리고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네도 알다시피 내겐 아들이 둘이 있네 장남 유기는 전처소생으로 어질고 착하긴 하나 연약한 성품이라 내 뒤를 잇긴 어렵다고 보이고, 둘째 유종은 채 씨 소생으로 영민하여 내가 총애를 하고 있지, 채 씨는 집안을 주관하고 처남 채모는 형주의 상장군으로 그 둘은 둘째를 세자로 책봉하라며 내게 조르는 형편이라 내가 아주 난처하다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신야에 나가 있던 유비가 돌연 형주에 들어와서 유표를 만나러 온 것이 못내 궁금했던 채 씨 부인은 살며시 뒷문으로 나타나서 유표의 근정전에서 두 사람이 하고 있는 대화를 아무도 모르게 문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가 유표의 질문에 되묻는다.
"명공! 원소가 왜 패망한지 아십니까?"
"그야 세상이 다 아는 게 아닌가? 조조에게 패하지 않았는가?" 유표는 당연한 사안을 묻는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고개를 흔들며,
"조조의 용병술 외에 원소에게 내환이 있었는데 그의 세 아들이 세자 자리를 다투느라 전쟁 중에도 서로 이해득실을 따져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서도 구해주지 않아 결국은 조조에게 대패한 겁니다. 하오니 명공! 외람되오나 차남을 세자로 옹립하시는 것은 도리에도 어긋나니 고려하셔야 합니다. 하물며 장남은 어질다면서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유표는 이와 연관 지어 또 다른 고민을 털어놓는다.
"음!... 그러나 내가 세자를 첫째인 유기로 정한다 한들 채 씨 가문은 형주의 세력가로 그들이 원치 않으면 내란이 일어날지 모르네.."
유표가 여기까지 말을 하였을 때 유비는 문득 문밖의 인기척을 느끼고 술잔을 들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명공! 오늘은 단오절이니 한잔 올리지요. 가족이 화목하시고 형주도 태평하시길 빕니다." 유표는 유비가 엉뚱한 대답을 하자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곧 어떤 낌새를 알아채고 한동안 두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을 하며 술잔을 마주하였다.
이윽고 어둠이 내려 술자리가 파하게 되자 유표는 문밖까지 나와 유비를 환송하였다.
"현덕! 오늘은 늦었으니 돌아가지 말고 객사에 머물게나. 내일 한잔 더 하고 돌아가게."
"네." 유비는 순순히 대답을 하고 문밖으로 나오며 뒤따라 듣는 자가 없는지 확인하였다.
그런 뒤에 유표의 곁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명공 아까는 말씀을 못 드렸지만 세자 책봉은 중차대 한 일이오니 명공 혼자 결정하셔야지 누가 개입해선 안됩니다. 채 씨 가문의 권력이 염려되면 없앨 계획을 세우세요. 누가 형주의 주인입니까?"
그러자 유표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유비는 짐짓 유표의 배웅을 받는 듯이 큰소리로,
"술 잘 마셨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하고 유표 앞을 물러나 객사로 향했다.
유비를 배웅하고 돌아온 유표의 앞에는 채 씨 부인이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야심한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유표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채 부인은 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주공! 두렵사옵니다."
"뭐가 두렵다는 건가?" 유표는 채 씨의 느닷없는 눈물을 보고 이유가 궁금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러나 채 씨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유비가 형주를 강탈하고 채 씨 가문이 몰락할까 봐요."
그러나 채 씨는 울먹이며,
"유비가 유기와 벌써 손을 잡았어요. 유비가 형주에 온 것은 유기의 초청이었고, 유기는 유비를 이용해 세자에 오르려 하며, 유비는 그 틈에 형주를 탐하려 하겠지요. 그러니 유비를 없애지 않으면 큰 재앙을 부르게 될 겁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유표는 일언지하에,
"허튼소리야!" 하고 말하며 돌아섰다.
그러자 채 씨는,
"주공! 괜한 걱정일지 모르오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소첩의 말이 전혀 가능성이 없나요? 그들에게 전혀 그런 사심이 없을까요? 제 말이 허튼소리라 해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해두셔야지요." 하고 눈물을 지으며 호소하듯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유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상념에 잠겼다.
내실로 돌아온 채 씨 부인은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동생 채모 장군을 불렀다.
"누님, 부르셨습니까?"
문을 뒤로하고 앉아 있던 채 씨 부인은 인사에 대꾸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앉은 채 본론부터 말한다.
"지금 손을 안 쓰면 기회가 없을 듯하다."
그러자 채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한다.
"무슨 일이 있으셨소?"
"오늘 주공이 유비 하나만을 불러서 형주의 세자 책봉 의견을 물었는데 유비는 차남이 세자라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며 원소가 멸망한 이유도 세자 자리다툼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말했다."
"간 큰 놈이오. 감히 형주 정사에 간섭하다니!"
"생각해 봐 이건 유비가 형주를 뺏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어. 그를 없애지 않으면 채 씨 가문에 재앙이 될 거야."
"유비가 지금 어딨소?"
"주공께서 오늘은 객사에 머물라고 했지."
"당장 병사를 몰고 가 후환을 없애겠소. 그 후에 주공께 자백하리다."
"일 처리만 신경 써라. 유비의 죽음을 주공이 안다면 크게 화를 내겠지만 네 죄는 묻지 않게 할 테니."
"어떻게요."
채 씨는 그제서야 채모에게 돌아서며 말한다.
"네가 자백할 즈음이면 나와 유종이도 네 옆에서 무릎을 꿇고 함께 하소연할 테니.. 주공도 잘 알게야. 형주의 대부분 군사가 채 씨 가문에 있으니 죽이고 싶어도 너와 나를 못 죽일 테고 당신 아들 유종은 더 못 죽이지 또 당신은 지금은 나이가 들어 새로 기댈 곳도 없고 너와 내게 의지해 형주를 이끌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니 결국은 받아들이게 돼있어."
"전부 계획하고 있었군요." 채모가 감탄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이어서,
"당장 유비를 처치하겠소." 하고 말하자,
채 씨가 한마디 더한다.
"조심해라! 유비 수하에 있는 맹장들, 유비가 죽으면 그자들이 복수하려 들 테니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걱정 마시오. 관우, 장비, 조운이 용맹한들, 형주 병사도 떨거지는 아니오. 십수만 대군으로 그깟 삼천도 안 되는 군사를 못 없애겠소? 유비가 죽고 나면 군심도 흔들릴 것이니 나머지 놈들은 식은 죽 먹기요."
"그래! 어서 없애버려라!"
"하오! "
삼국지 - 153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