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1: 8 애통하며 애곡하고 - 미 1: 9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 1 )
2. 상처가 유다와 예루살렘에도 미치다 ( 1: 8 – 16 )
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3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15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어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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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1: 8 애통하며 애곡하고 -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
이스라엘과 유다가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므로 선지자는 애통하며 애곡할 것이다.
미가는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애통할 것이고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할 것이다.
1]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이는 미가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앞에 놓인 운명을 바라보고 애통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시 죄인이나 노예는 허리에 동여매는 옷만을 입었을 뿐 신발은 신지 못했다.
미가는 벌거벗은 몸으로 상징적인 행동을 취하여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앞으로 당할 운명, 곧 앗수르의 포로 생활을 암시하였다(Smith).
2]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들개’라는 원어(탄)는 ‘재칼’(jackal, 여우와 늑대의 중간) 이라는 뜻이다(BDB, KB).
선지자는 자신이 재칼이나 타조 같은 들짐승이 외로이 혹은 고통스레 우는 것처럼 울겠다고 말한다.
미가가 애곡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칠 수 없는 상처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미 1: 9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
1]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본 절은 미가가 그토록 애곡하며 애통해하던 이유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사마리아의 죄가 더 이상 치유될 가능성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사마리아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유다, 곧 예루살렘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가의 심정
미 1: 8-9
요즘 우리나라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다.
국제사회에 외교적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우리 주변에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국내 상황도 총체적인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정치적으로는 국가 지도자와 각 부처 리더들의 역량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각 분야에서 이기주의적 압력 행사로 갈등이 반복되고 있어, 경제적으로 IMF 이후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다.
기업이나 가게는 문을 닫고 집값이 올라가고 물가가 올라가고 개인의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가고 있다. 가정 경제의 파탄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인도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환경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미가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신앙 상황도 비슷하였다. 그는 B.C 8세기경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때에 사역하던 선지자였다.
당시는 앗수르(앗시리아)가 팔레스틴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을 받아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으며, 남 유다도 앗수르의 위협으로 외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던 때였다 (왕하 15-20장).
그런데도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은 모두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심히 타락한 가운데 있었다. 하물며 유다 예루살렘까지 범죄하므로 점점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본문은 절망적 상태에 처한 그들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심정이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책망하였다.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해 교훈하며,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을 친다고 했다 (3: 5, 11).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타락하였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일했고 하나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욕망을 채웠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채웠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일반 백성들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 4-7).
2: 6에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 도다"고 했다. 그 예언대로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의 예언을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아예 선지자에게 이상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예루살렘이 무더기가 된 것처럼 황폐화된다고 했다 (3: 6, 12).
영적인 징계와 육체적인 징계가 함께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치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누른다고 했다.
* 암 2: 12-13 - 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으로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하는구나"라고 했기 때문에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말씀하신다고 했다.
* 사 28: 10-11 -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싫어하므로 다른 민족을 보내어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안 들으니 다른 말을 하는 이민족을 보내어 정복하게 하므로 깨닫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어느 때에나 하나님을 청종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말씀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영적 육적 징계를 받게 된다.
* 렘 17: 5-6 -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혹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백성은 살 수 없다.
말씀을 들으나 깨달음이 없고 기도를 하나 감동이 없고 찬송을 하나 기쁨이 없을 때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사고와 질병과 가난 등의 고통이 있을 때 범죄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실제가 아니라도 위기가 예견될 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돌이켜야 한다.
* 시 51: 17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람들은 큰 죄보다 작은 죄 때문에 오히려 회개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이러한 비유가 있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에게 교인 두 사람이 찾아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데, 한 여인은 자기의 지은 죄를 뉘우치고 울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한 여인은 신부에게 하는 말이, “내가 죄인인 것은 분명한데 큰 죄를 지은 것은 없고 그렇다고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별로 크게 기억할 만한 죄는 없지만 고해성사를 하러 왔다”라고 무성의한 죄의 고백을 했다. 그러니까 그 신부는 각각 그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했다.
큰 죄를 범했다고 자백하는 여인에게 “당신이 들고 올 수 있는 큰 돌을 찾아서 들고 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얼마 후에 곧 자기가 들고 올 수 있는 큰 돌을 발견하여 땀을 흘리고 가져와서 신부 앞에 놓았다. 그러자 신부의 하는 말이 “다시 그 자리에 갖다 놓아라”고 했다.
그런 다음, 자기는 큰 죄를 지은 것 같지 않다고 했던 여인에게는, “당신은 가서 자그마한 돌을 많이 가져 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치마폭에 가득 돌을 담아 가지고 왔다. 그 신부는 “당신은 이 돌들을 주워 온 곳에 다시 갖다 놓아라”고 명령했다.
그 때 여자는 대답했다. “내가 어디에서 주워 왔는지 다 기억을 못합니다.
그때 신부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저 여인은 자기가 주워 온 곳을 분명히 알고 다시 갖다 놓았는데 당신은 어디서 주워 온 것을 모를 만큼 작은 돌을 많이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내가 그대에게 말하노니, 이제 그대는 어디에서 무슨 죄를 범했는지 분명히 밝혀서 하나님 앞에 바른 회개를 하라”고 했다.
우리는 작은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한다.
회개할 때 참된 기쁨과 회복이 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