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양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그 맛이 절밥 道 닦는 중이 절밥이 좋아서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 아니라 다만 도를 닦기 위한 생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무학산(회원)
<어디 자랑할 게 없어 밥맛 자랑을 하노> 해마다 이맘 때면 밥맛이 싹 가신다. ‘사찰 음식’ ‘사찰 음식’ 해쌓기 때문이다. 오늘도 조선일보 등등이 그랬다. 대한민국 사람 치고 이른바 사찰 음식 곧 절밥 한번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생 듣는 소리를 또 듣게 되는 것이다. 거룩하게 말해서 사찰 음식이고 그냥 하는 말로는 절밥이다. 절밥을 먹어보니 평생 자랑할만한 밥맛이던가? 매양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그 맛이다. 그런데도 똑같은 말을 주구장창하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도 닦는 중이 절밥이 좋아서 머리 깎고 중이 된 것이 아니라 절밥은 다만 도를 닦기 위한 생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물건을 갖고 사찰 음식. 사찰 음식이라 해대면서 밥맛이 좋다느니 그저 그만이라느니 세계에 대고 나팔을 불면, 외경심이 일만큼 불도에만 오로지 하는 승려와 그 수도(修道)를 헌 양말 취급하는 게 왜 아니겠나. 마치 절밥이 좋아서 수도승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전에는 사찰 음식이란 용어조차도 없었다. 그저 질박하고 편하게 절밥이라 했다. 절밥을 마치 거룩한 무엇인 양 함으로써 자기네의 식당 밥장사에 이용코자 거룩화한 것이다. 하여간 그렇다치고 그래 절밥을 먹어보니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던가? 거듭 말하지만 늘상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그 맛이다 또한 그 나물이란 게 죄다 중국산일 수 있음에랴. 그것도 이전처럼 공양간의 승려가 사부대중을 먹이기 위해 불을 때서 정성으로 지은 밥이 아니고 앞 동네 아지매와 뒷동네 할매가 파출부로 와서 지은 밥이다. 어째서 이전의 그 밥맛이겠나? 게다가 이전에는 배가 고팠지 않았나. 지금은 사찰 음식이라 하여 별스레 맛이 좋을 턱이 없는 것이다. 물론 서양 코쟁이들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니 칭찬 삼아 꿀맛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을 절밥의 주인인 우리가 덩달아 맛있다고 하면 주체성이 없잖아. 거룩한 부처님을 모신 절간에서 오죽 자랑할 것이 없으면 밥맛을 자랑하겠나? 이렇게 생각했을 때 사찰 음식 사찰 음식 해싸면 승려를 욕보이는 것인기라. 그러느니 차라리 승려의 염불 소리를 자랑해라. 운문사 여승들의 새벽 예불 소리를 한번 들어보라는 말이 있어서 나도 한번 들어보기로 작정. 운문사 근처에서 민박을 하고 첫새벽에 운문사에 간 적이 있었다. 과연 들을 만했다. 그 소리가 나에게 “너. 중노릇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답했다. “에이. 이보소. 그런 소리랑 마소. 사람이 산에 가면 중이 되고 싶고 강에 가면 어부가 되고 싶다지 않았소. 나는 그저 저 거룩하고 아름다운 예불 소리만 가슴에 담고 가겠오” 했다. 그래도 자꾸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 “나는 불자가 될 자격도 없으니 그저 운문의 초적이나 할라요.” 하며 자유를 위해 만적처럼 일어섰다가 이름도 없이 스려져간 운문의 초적들을 기리며 돌아왔다. 그날 이후 어느 승려의 염불 소리도 내 귀에는 천상의 화음으로 들렸다. 이런 걸 세계에 자랑해야지 어디 내놓을 게 없어서 밥맛 자랑을 하나. 그래. 도야지 눈에는 밥만 비는 기라. ========================= 초적: 산악지대에서 오랫동안 항거하던 사람들을 지배자들은 초적이라 했다 비는: '보이는'의 경상도 사투리 운문: 고려 시대 밀양. 청도 일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