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으로 돌아간 원봉 스님
가을이 돌아왔다. 옛 사람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았으면 늙어감이 서럽다. 초저녁 밖에서는 찬비가 내리고 어디선가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가 방 안에 들어와 운다. 중국 당나라 시대 왕유 거사의 시다.
가을 밤, 초저녁부터 문 밖에는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다. 마당 한 쪽에 있음직한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고 그 소리에 놀란 듯이 방 안 구석에서 귀뚜라미가 청승맞게 울어댄다. 깊은 산중이라 더욱 적막하고 외롭다. 이런 시각에 시인은 쓸쓸히 늙어감이 서럽다고 노래하고 있다.
수행자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라야 한다고 옛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깊어가는 가을 밤, 한 점의 애수가 없다면 어찌 도심인들 나오겠는가? 쓸쓸한 마음에 소식조차 알 수 없는 도반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수 년 얼굴을 대하지 못한 벗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면서 잠시 내 삶을 되돌아본다.
지난 봄이다. 지리산 천은사의 종태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며칠 후에 무명납자의 사십구재가 있으니 필히 참석하라는 것이다. 그 무명납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원봉 스님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종태 스님도 잘 모르는 스님이라고 했다. 나이는 사십 세 중반쯤 되었고 본사가 송광사이며 선방을 다녔던 운수객이라는 정도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라고 했다. 솔직히 나는 그 날 사십구재에 참석하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종태 스님이 보고 싶던 차에 전화까지 왔고 좋은 핑계가 생겼다 싶어 달려갔다.
내가 천은사에 도착했을 때는 재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법당 안에는 스님들이 삼사십 명은 되는 듯 했다. 무명납자의 재치고는 꽤 많은 스님들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단 앞에는 그 스님의 속가 유족인 듯한 사람들이 몇 있었고. 재물도 아주 많이 차려져 있었다. 제사상 위에는 위패만 있고 영전 사진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원봉 스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송광사의 현봉 스님이 참석한 스님들과 재를 준비해 주신 천은사 주지 스님께 정중한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재는 엄숙하고 장엄했다. 재의 규모가 어지간히 큰절 주지 스님 재보다 더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천은사 주지 스님이 정중하게 재를 참관하셨고, 공양 뒤에는 참석 대중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도 하시고 여비까지 주셨다. 송광사는 원봉 스님의 본사라고 해서 특히 많은 스님들이 오셨는데 사전 준비가 있었던 모양으로 법보시용 책도 돌렸다. 그렇게 원봉 스님의 재는 끝났다.
재가 끝나고 난 뒤에 참석했던 대중들도 모두 돌아가고 난 뒤였다. 종태 스님은 원봉 스님이 남긴 유서라고 하면서 흰 봉투에 든 글을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닌가. 그 글을 받아 읽고 서야 나는 왜 한 젊은 무명납자의 사십구재에 이렇게 많은 스님들이 참석했으며 정중하고 장엄했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우선 유서는 내용이 매우 간결했다. 그리고 유서를 읽고서야 나는 스님이 산 속에서 스스로 자진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종태 스님의 이야기로는 그 장소가 외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약초 캐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자진한 장소에 가 보았더니 주위에 있는 사방의 나뭇가지에다 흰 줄로 금단 줄을 쳐서 멀리서도 이내 발견할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두었더라는 것이다. 자기 삶에 철저했던 한 수행자가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태도가 어떠한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예다.
다음은 원봉 스님의 유서와 임종게다.
주지 스님.
허황되고 어리석은 한 중생의 마지막 몸부림이 스님의 주변을 어지럽게 해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스님께 경배하며 참회하는 바입니다. 지리산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발향시키지만 뭇 삶의 질곡과 고통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지혜의 땅, 그리하여 저의 육신은 지리산에 뿌리고자 합니다. 저는 오랜 지병이 암으로 발전하여 이미 그 뿌리가 고황에 들어 제 자신 스스로에게나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고통과 불편을 주는 거추장스러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과가 엄연하다면 제 스스로 저의 생명을 거두어 새로운 삶을 찾는 것이 마땅한 순리라고 생각됩니다. 스님. 불가의 인연을 너그럽게 살피시어 저의 혼백이 지리산 자락에 흩어지도록 도와주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원봉 올림
임종게. 영광보다 오욕이 많았던 삶. 끊일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치솟는 분노. 한도 끝도 없는 어리석은 영상. 이젠 편안해지고 싶다. 영광도 오욕도 없는 영원한 평등의 나라 분노의 불길은 꺼지고 적막하지만 그윽한 곳. 허상과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실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다.
원봉 스님의 유서는 일반 편지지 두 장에 쓰여 있었다. 앞장에는 유서였고 뒷장엔 게송이었다. 더 말이 없다. 여기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군더더기에 불과할 것이다.
재는 끝났다. 참석했던 대중들은 바쁜 길을 재촉하여 모두 떠났다. 나는 혼자 천은사 방장선원 마당에 서 있었다. 선원은 텅 비어 있었고 주위는 한없이 적막했다. 뻐꾸기 우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다가 이내 산을 넘어가고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빛에 흰 구름 한 조각이 무심히 흘러간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내려다보니 늦봄 기운을 타고 풀꽃들이 피어 있다. 천지가 다 적막하기만 한데 나의 가슴은 떨리고 눈에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나 자신이 수행자이며, 수행자라는 사실이 한없이 고독하게 느껴진다.
뒷날 들은 이야기인데 원봉 스님은 이미 출가하기 이전부터 남다른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승 보살의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노동운동을 위해서 직접 노동판에서 노동자 생활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식인으로서 편안하고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위하여 허위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가 이전부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스님은 출가 역시 그러한 삶의 연장선상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의 출가는 세속에서 찾지 못한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짧은 유서가 그것을 다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
스님이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구도자는 더욱 자기 삶에 치열하고 진지한 열성이 없이는 안 된다. 언제든지 자신을 안으로 점검하고 자신의 ‘마음 때‘인 허위와 허상을 벗어버리는 싸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 구도자는 겉으로 평온하고 안위한, 어찌 보며 평화로운 듯한 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그의 내명세계는 자신의 허상을 벗어던지기 위해 가열 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결구 나락으로 떨어지고 위선에 찬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자주 주의에서 위선에 찬 수행자를 만난다. 그들은 겉모양이 화려하다. 속은 허위에 차 있지만 겉모양은 매우 진지하고 우아하게 포장되어 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고 눈 어두운 사람들을 속인다. 세상은 의외로 이런 거짓된 무리들이 득실댄다. 이들은 매우 능숙한 말솜씨와 세련된 행동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진실한 수행자가 갈수록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저 거짓된 무리들이 청정해야 할, 수도 도량을 점유하고 자신들의 개인 소유로 하고 있다. 한국 불교의 가장 큰 장애는 사찰이 몇몇 기득권자의 개인 소유로 사유화되고 있다는데 있다.
지리산에도 가을이 왔다. 원봉 스님은 지리산을 ‘뭇 삶의 질곡과 고통을 말없이 받아들이는 지혜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발양시키는 땅’이라고 했다. 이 말속에는 지리산이 우리 민족역사 속에서의 의미와 아울러 지리라는 말이 내포하는 수행자의 도량을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인생의 짦은 삶을 살고 갔지만 그는 지리산을 알고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이 가을도 영원한 수행자의 도량인 지리산은 지혜의 땅답게 말없이, 그러나 장중하게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배울진저. 배울진저. 지리산을 배울진저.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