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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학교다’ 저자와의 만남은
전정일 선생님께 여쭈고 답을 듣는 시간으로 채웠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눕니다.
그전에요
여러분~! 양지마을로 이사 오셔요!
마을에서 함께 키워요!!
어느 집에든 우르르 가서 놀다가 되는 곳에서 밥 먹고 해지면 집 찾아 걸어와서 잠드는
그런 모습 그린다면
너무 꿈이 큰가요?
제가 다짐한 것은
1. 양지마을 신문에 (지금보다는) 자주 투고하기,
2. 마을에서 마주치는 분들께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 맑은샘학교 학부모입니다!" 인사하기 정도예요.
우리 아버지들 마을방범대도 조직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과 아버지들이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죠!
많은 예산이 공동체 사업에 쓰이고 있는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다면 훨씬 편안하고 즐겁게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한 순간도 아쉽지 않게 뽕~?! 뽑으며 살아봐용.
마을에 이사 온 지 4개월쯤 되었는데 마을공동체 느낌은 아직 못 느끼고 있다. 마을공동체 일 가운데 지켜나가야 할 게 무엇일까?
(책에 나온 보기: 마을신문, 마을방범대, 마을장터, 체육대회, 정월대보름행사, 마을 밥상, 마을 잔치, 과천 축제, 페미니즘 영화제, 마을음악회와 방바닥음악회, 여행계모임...)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마을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주하는 공간이 중심이지만 양지마을에 살지 않고 서울, 대전, 부산에 산다고 해도 양지마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하면 그 사람도 마을공동체라 여길 수 있다. 이사가 잦은 도시에서 마을은 정주하는 지역을 확장해 마을이 추구하는 공통의 철학과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마을이라 말할 수도 있다. 마을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니 당연히 사람이 중심이다. 아시다시피 마을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가 내가 지닌 가치를 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마을에서 더불어 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가치가 불편해질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만족하는 마을은 없다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가치와 철학을 지니고 있더라도 마을에서 가치를 이야기하려면 대단히 유연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가치에 동의하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상대를 비난하고 우습게 보는 것은 정말 좋지 않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숭고한 뜻이 있고 실제로 구현하고자 한다고 해도, 마을 사람들은 가치를 말하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마을에 얼마큼 이로운가를 생각하게 된다.
마을 주민 자치 영역, 마을 공동체 일은 많다. 자세히 보면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자치의 일들이다. 그런데 낮에는 돈 벌고 밤에도 모임이 있고 주말에는 가족과 모임의 자체 행사가 있는 게 우리네 도시인의 삶이다. 내 가족과 내가 속한 모임만 해도 벅찬 게 현실이라 마을 행사까지 참여할 여력이 안 나는 것도 맞다. 다만 교육을 인연으로 만난 교육공동체학교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곳이 마을이니 더 힘을 내서 마을을 가꾸고 마을공동체와 마을교육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우리 마을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다. 그분들과 연결되려면 마을 속에 맑은샘학교가 들어가야 마을 속 작은 학교가 된다. 우리 맑은샘학교는 마을의 그냥 일부다. 이 큰 마을의 일부일 뿐이다. 이 일부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고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기본으로는 겸손해야 하고 가서 봉사하고 먼저 나누어야 한다. 청소, 인사, 이게 시작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도 잘하고, 마을의 일을 돕고, 마을 장터 같은 가치와 필요가 담긴 일을 벌여내면 마을에 던지는 파장이 있는 법이다. 어디에서나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고)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 없다. 그게 의미 있음은 모두 동의한다. 원 주민이라 부르는 동네에서 오랜 살아온 나이 든 어른들이 보면 그런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이뻐 보인다.
마을공동체의 일부로서 쉽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보면 <마을이 학교다>에 쓴 것처럼 • 마을 청소 • 마을 주민과 인사 • 장터 열기 • 마을 신문들이었다. 우리가 재미나게 마을에서 펼치면 된다. 물건을 팔지 않아도 장터를 여는 마을 사람들이 있음을 흐뭇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다. 마을에 참여하는 교육공동체 구성원들은 학교 교육공동체가 통로가 되어 연결된다. 과천에서 동마다 하는 정월대보름 행사도 우리 세금으로 하는 거다. 정말 크게 한다. 그런데 가보면 정작 어르신들밖에 없다. 우리끼리 하는 재미도 있지만 사실 예산으로 보면 우리가 따로 기획하고 모을 필요가 없다. 동의 예산이 다 있는 거다. 교육공동체가 정월대보름 같은 마을 행사에 참여하려면 기획할 때부터 염두에 두면 좋다. 물론 행사 당일 참여만으로도 뜻이 있다. 올해 2월에도 과천동 정월대보름 잔치에 아이들과 같이 갔다. 행사 차례에 있는 세배하기에 참여했는데 아이들 왔다고 복돈을 아이마다 만 원씩 안겨주셨다. 그걸로 전교생이 새참으로 떡을 먹었다. 아이들로 보면 6년간 줄곧 반복해서 마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성장의 계기가 된다. 더욱이 우리나라 알기 교과와 연결되니 그 이상의 뜻이 있다.
10월에 과천시에서 여는 큰 체육대회가 있다. 예산도 많고 경품도 많다. 그런데 아쉽게도 자연속학교 기간, 방학 기간이라 참여를 못해왔다. 만약 일정이 맞아 맑은샘학교 식구들이 몸놀이한마당처럼 과천시 행사에서 즐기면 거기 먹을 거 우리가 다 먹고 기념품도 갖고 오고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행사 날을 잡는 게 우리 일정을 고려하지 않은 지라 사실 어렵다.
우리가 마을에서 살면서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있지만 학교 통해서 참여해 보면 느낌이 다르다. 페미니즘 영화제도 그렇고 마을 음악회(방바닥)도 그렇다. 방바닥 음악회의 시초는 숲 속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맑은샘 식구들과 시작한 마을음악회 ‘한여름밤의 꿈’이다. 마을에서 여행계도 만들었다. 여행 다녀온 것을 발표하고 서로 나누고 그런 게 참 재미있었다. 어른들이 마을에서 함께 하는 기쁨을 우리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같이 여행 가면 어때? 동네 사람들과 나누면 더 재밌지 않을까.” 싶은 거다. 새해 첫날 아이들이 세배하러 돌아다니면 동네가 떠들썩하다. 마을방범대를 하면서 네 해째 세배행사를 만들었다. 코로나가 터지고 중단되어 지금도 못하고 있다. 마을에서 재미나게 함께 하는 일을 만들어내고 꾸준히 함께 할 꼭지를 제안하고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자연스레 마을이 된다. 양지마을 안에 많은 소모임과 마을공동체 활동들이 꾸준하다. 참여할 꼭지가 대단히 많다.
질문 2: 지금은 밤 산책만 하는데, 다양한 곳에 참여하고 싶다.
마을에는 다양한 소모임이 많다.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활동도 많다. 책, 기타, 손끝활동, 환경모임, 음악회, 장터, 신문... 다양한 꼭지가 있다. 밤 산책하니 떠오른 게 마을방범대다. 마을방범대 소통방이 따로 있었다. 지난해 자율방범대 법률이 제정되는 걸 기점으로 우리 마을에서는 하반기부터 휴지기를 갖고 있어 최근에는 밤에 맑은샘학교 어린이들이 학교살이 때 마을을 도는 정도다. 그동안 마을방범대에서 여러 일들을 했다. 주민참여예산으로 제안하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든 마을소공원은 여름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데 방범대원들이 여름마다 모여 구슬땀을 흘리며 풀을 뽑고 관리하고 그랬다. 공원 청소도 하고 풀도 뽑고 했다. 코로나가 오면서부터는 과천시에 관리를 요청했고 지금도 그렇다.
2018년에 영국에 토트네스 전환마을을 다녀왔다. 우리나라로 보면 풀무학교가 있는 홍성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해외 연수로 가지만 실상 가보면 과천과 우리나라에서 훨씬 다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돌아올 때가 많았는데 역시 그때도 그랬다. 영국 토트네스 전환마을은 세계에서 유명한 방문지가 되어 많은 분들이 가고 있다. 홍성 풀무학교는 인가형 기술공민고등학교로 시작했는데 교육의 근현대사로 보면 (요즘으로 치면) 인가된 대안학교다. 인가된 법령에 따르지만 학교 철학이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교육이다. 덴마크 사상가 그룬트비 교육 철학이 한국과 연결된 학교다. 일제 강점기 오산학교를 만든 분들이 6/25 때 내려와 오산학교 교사와 학교 학생이었던 분들이 만든 곳이 풀무학교다. 대안교육사에도 그렇고, 한국 생협활동에도 의미가 크다. 그분들이 일구어낸 교육이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이념에 동의한 분들이 생협운동까지 확장하여 지금은 ‘홍성’하면 유기농의 메카로 불린다. 지금은 수많은 생협이 일어나 쉽게 마트처럼 주문하고 매장도 많지만, 초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가는 생협 운동이 중요했다. 도시 소비자들이 생산지를 방문하고 생산자의 땀과 가치를 함께 느끼도록 한 것이다. 마트 가서 물건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말고, 우리가 도시에 있지만 물건을 사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농민들에게 큰 힘이 되는지 함께 교류하면서 만들어 보자고 알렸던 것이다. 당시에는 한살림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었다. 슈타이너 생명역동농법을 실천하는 정농생협 기억도 난다. 지금은 그런 가치보다 매출액 확대에 더 신경 쓰는 거 아니냐는 비판은 꾸준하다. 어쨌든 풀무학교와 생협처럼 한국 사회에 그렇게 크게 메아리친 경우가 드물다. 영국 토트네스 전환마을을 갔을 때 자연스레 과천시와 우리 마을을 떠올렸다. 과천 품앗이, 대안 화폐, 대안 경제, 교육기관, 모든 영역마다 열정과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과천만 놓고 보더라도 활동가들이 사라지고 있다. 과천의 재건축 탓도 있고, 젊은 세대의 활동가가 배출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전환마을을 꿈꾸며 한동안 에너지 자립마을을 위해 고민한 적이 있다. 맑은샘학교는 녹색에너지 연구소에게 소개받아서 60만 원 넘는 돈을 들여 학교에 설치했다. 이 태양광발전기는 어린이들과 고물상에 일 년 반 동안 다닌 끝에 모은 돈으로 설치한 거라 아주 큰 의미가 들어있다. 서울시는 20만 원 대의 금액을 시에서 지원하고 있을 때다. 당시 미니 태양광 달기 예산이 과천시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때 우리 마을에서도 미니태양광발전기를 달자고 제안했고 여러 공동주택에서 참여했는데 설치비가 8만 원인가 9만 원이었다. 세월이 흐르니 값이 내려간 거다. 그런 에너지 자립마을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보기로 서울의 성대골 마을이 있다.
우리 맑은샘에서 에너지 공부로 여러 곳을 다닌 적이 있다. 통영 연대도에 배 타고 들어가서 2년 간 자연속학교를 열기도 했고, 부안시민발전소,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을 꾸준히 방문한 적도 있다. 풀무학교가 그런 것을 먼저 보여준 것이고, 성미산마을로 대표되는 도시 마을들이 전환의 이야기를 꺼내왔다. 올해 30주년 잔치를 채비하는 성미산마을은 마을을 가꾸다 보니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만들었다. 맑은샘으로 보면 거꾸로 학교를 세웠는데 마을이 중요한 거였다. 공동주택들이 만들어졌다. 먼저 자리 잡은 너른 마당도 있었지만, 용마골의 더불어 숲, 너나들이, 나무네, 소행주 주택이 차례로 지어졌고, 민간업체가 분양했는데 자연스럽게 공동주택이 된 곳 있다. 맑은샘학교가 양지마을에서 재개교한 2007년부터 쭉 마을을 봐왔으니 마을의 최근 변천사를 모든 아는 셈이다. 열리는 어린이집만 있을 때와는 달리 맑은샘학교는 큰 애들이 움직이니까 마을 골목길이 더 시끄러워서 티가 났다. 마을 속 작은 학교로 자리잡지 많으면 많은 민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을을 가꾸는 마을 속 교육과정이 있는 마을 속 작은 학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한 참 고민하고 본격으로 실행에 옮긴 때가 2014년 양지마을에 학교를 짓고부터다. 그 10년의 기록이 <마을이 학교다-생태전환교육과 마을교육공동체 이야기>에 일부 실린 것이다.
질문 3. 도시에서는 마을공동체 일을 하기가 어려운 거 같다. 올봄에 시골에 있는 전원형 기숙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와 학교 부모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마을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었다. 지역사회 소멸, 인구 감소가 우려인데 시골 마을에 학교가 들어오면 활력이 생기고 인구가 유입되고 지원도 들어오는데 도시는 어렵다. 도시의 대부분 인구가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에서 마을 공동체를 확장시켜나가고 싶은데 방법이 있나?
우리는 교육 운동하는 사람이고 그 영역 중에 대안교육이 있다. 사실 소수가 참여하는 셈이니 소수자 ‘운동’ 일 수 도 있다. 남들이 가지 않는 주류의 삶에서 벗어난 세계에서 주류의 변화를 꿈꾸며 살고 있다. 사실 마을공동체를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아파트다. 통장, 대표 뽑아서 자치 운영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다. 아파트 대표자 회의에 과천 마을 활동가가 들어가 아파트 문화를 바꿔보려는 활동을 했었다. 그런데 왜 전면화되지 않는가? 한국의 아파트에는 자본과 도시 문명의 극대화된 이기주의가 들어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일상을 가꾸려 해도 ‘아파트값’에 따라 수많은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다. “우리 아파트 값 떨어져.” 이 한마디에 모든 게 날아간다. 그 정점에 아파트가 서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조금 바꿔 생각하면 다 함께 사는 아파트는 공동체를 조직하기에는 최적의 조건 아닐까. 내 경우에도 아파트에서 12년을 살았는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공동체를 가꿔가는 활동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과천이라는 저층 주공아파트의 장점을 잘 살려 마을처럼 살았던 기억이 있다. 재건축 재개발로 많은 분들이 과천을 떠났고, 이제는 신도시 냄새가 물씬 나는 과천이다.
아파트 안에서 마을공동체 가꾸기를 시도하거나 아파트입주자회의에 참여해 변화를 도모하는 활동도 있었지만, 드디어 한국에서 협동조합으로 대규모 아파트를 지은 곳이 나타났다. 경기도 남양주시 위스테이별내사회적 협동조합 아파트다. (아파트 491세대, 커뮤니티 시설 약 1,000평(카페, 도서관, 공유부엌, 체육관, 창작소, 어린이집, 텃밭...), 24평형 / 29평형 / 34평형 ※17평형대 세대분리형 40여 세대 포함) 2017년 6월에 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해, 착공에 들어가 2020년에 입주한 곳이다. 한국의 아파트를 공동체화시켜서 사람을 모으고 조합원을 모아서 아파트를 지은 거다. 돈 규모가 다르다. 양지마을에서야 3층짜리 공동주택이었지만 491세대가 건강한 공동체를 통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을 누리고 삶의 가치를 높인다는 전망과 가치를 담아낸 사례다. 요즘은 여러 곳에 사례 발표하러 다니고 상을 받고 있다. 이런 특별한 아파트형 공동체를 가꾸는 곳 아니고서야 사실 아파트 입주자회의에서 노릇을 하려면, 아파트값 떠나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으면 어렵지 않을까.
아파트 내에 마을 공동체 리사이클링 운동 등을 하는 분들이 계시다. 과천시에서도 그걸 장려하고는 있다. 그런 게 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자본의 탐욕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가치, 뜻으로 내 돈을 포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장터도 아파트에 있다. 기업형으로도 있다. 직거래 장터가 열리는 곳이 많다. 기업형 장터 중에 뜻있게 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게 아파트마다 있다.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게 지역 상권에 영향을 주면 안 되어 입주자 대표들이 끈질기게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처받고 지속할 힘을 잃는다. 쑥스럽고 외롭고 그렇다. 내가 지치면 못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지속가능한 열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내가 꿈꾸어야 한 발씩 간다. 그런데 이런 열정을 뒷받침하는 사회 체제, 조직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과천시가 마을 공동체 사업 3천만 원으로 한다. 한 때 대공원 주차장에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하면 주차에도 낫고 생산된 에너지로 과천시 에너지 자립의 일부를 시도할 수 있겠다는 상상을 시민발전소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 정치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반대를 하기 시작했고, 끈질기게 태양광발전의 해로움을 말했다. 소위 양쪽 민원이 발생하니까 시에서는 민원을 피하자는 분위기로 한동안 태양광발전 이야기를 쉬쉬하게 되었다. 양지마을에서는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으로 9월 21일 태양광에너지 공부를 하는 제작교실이 열린다. 에너지자립의 영역은 마다 마을에서 꾸준히 이어가는데 과천시 전체로 하는 게 필요하다. 새로 짓는 학교, 아파트는 필수로 해야 된다. 아파트에서 우정과 환대의 마을공동체를 가꾸려면 지치지 않고 하는 게 중요하다. 그 동네에 오래 계속 사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앞서 ‘운동’이라 한 까닭이다.
질문 4. 아이, 학부모, 교사 3 위체가 함께 움직이는데 마을, 학교가 부흥하려면 (바깥에서 나와서 볼 때) 부모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부모 역할이 무엇이고 부모가 얼마나 발을 담그느냐에 달려있다. 기존 대안학교를 보면 부모들이 반만 걸친다. 아버지들이 쑥 들어와야 한다고 본다. 아버지들이 들어오면 마을스러워진다. 학교 행사 공사가 어머니가 나서는 것보다 아버지가 나서야 한다. 맑은샘학교 아버지들이 얼마나 참여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학교에 들어와야 그 학교가 부흥한다. 건강함은 어머니들이 책임지는데 부흥의 역할은 아버지들에게 책임이 많다. 그런데 아버지는 지켜보는 입장이 많다. 아버지 참여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서 만남, 추억, 이야기가 나올 거다. 그런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런 구성으로 가야 하지 않나… ‘마을이 학교다’ 이 책이 그런 지점에서 도움이 될 거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대안학교를 졸업하게 한 사람으로서 바깥에서 볼 때 그렇다.
말씀처럼 교육공동체는 양육과 교육을 부모가 함께 하듯이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교육은 학교와 가정에서 같이 가야 한다. 부모가 함께 실천해야 교육의 효과가 삶으로 연결된다. “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집에서도 나눠 하자. 이게 평등한 일 나누기야.” 그렇게 집에서 더해주는 순간 온전한 배움이 된다. 성 평등, 가사노동, 먹을거리 등을 가르치는데 가정에서 다르게 가르치면 일부만 취하게 된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학부모들이 갖는 어려움이 있다. 민간교육기관인 대안교육기관에서 교육시키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 생계 더하기가 있고, 직장 말고 또 하나의 교육공동체를 가꾸고 일궈나가기 위해서 시간과 품을 내야 한다. 그러나 다들 아시는 것처럼 학령기 아동의 부모가 회사에서도 가장 바쁠 때다. 그러니 늘 응원하고 격려하는 게 중요하다. 공동체를 꾸려가는 사람들은 뭐든지 의미를 넣고, 서로를 응원하는 행사를 열고 기념하며 서로 응원하고 격려해야 오래갈 수 있다. 얼마나 우리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고 당신이 하는 노릇이 정말로 중요한지 서로 들려줘야 한다. 아내 손에 이끌려 교육공동체 활동을 시작한 아버지들은 처음에는 일과 술자리로 시작해서 친목을 다지다가 자연스레 교육의 가치와 의미를 나누는 데로 확장된다. “우리 학교에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이 사래, 일꾼이래.” 교육공동체를 위해 먼저 나서서 일하고 헌신하는 아름다움이 자연스레 아이들에게 전달되는 한 보기일 뿐이지만, 모두를 위해서 더 시간과 품을 내고 정성을 다하는 어른들의 태도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교육이 되고 숨어있는 교육과정이 되는 이치다.
교육은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다. 부모가 학교에서 술을 먹는 데에 대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는 좋은 지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편으로 교육공동체 학부모들이 술을 먹을 때 문화를 보여주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 술 먹는 경우는 잔치, 일할 때다. 이렇게 부모가 땀 흘리고 곡차 한 잔 하며 어울려 사는 모습, 좋은 뒤풀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교육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나친 음주, 특히, 아이들을 방치해 놓고 먹는 것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땀 흘리고 가치 있는 시간 뒤에 보여주는 놀이 문화로 보았던 것일 뿐 술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것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학교에서 졸업잔치와 여는 잔치, 학교 생일잔칫날, 시설의 날 정도가 뒤풀이할 때 곡차를 마시는데 학교 규칙처럼 모든 행사는 6시에 정리하고 음주는 다른 마을 가게로 어른끼리 가는 식으로 하는 걸 지켜가야 한다.
질문5. 마을이 학교이듯 아이를 보내는 학교가 우리 학부모와 어른들에게도 일과 놀이로 자라는 학교살이기를 바랐다.
학부모들이 함께 텃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전통과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육은 교사, 부모의 뒤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어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배운다. 사실 생태 전환 교육, 마을교육공동체 이야기는 자본주의 도시 문명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다.
왜?
마을 주체가 되기에는 생계 꾸려가는 직장 일도 많고, 교육공동체 살이만 해도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너무 바쁘다.
생태?
불편한 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힘들어. 나 배달시켜 먹고 싶어. 자동차 없으면 힘들어.” 자본과 도시 문명이 주는 편안함에 길들어가는 세상이다.
그래도 이것을 끈질기게 놓지 말아야 할 까닭은 하나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앞날이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생태감수성, 공동체의식과 감성을 키워나가는 교육을 끈질기게 해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과 앞날에 희망이 있다. 그래야 파국으로 치닫는 인류 생존시대라는 절망 속에서 숨통이 트일 거라 생각한다. 기후를 바꾸지 말고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심각한 상황에도 정작 정부 정책에서 탄소배출 감소, 탄소중립, 탄소배출 제로 이야기가 공론화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 현실을 보면 절망스럽다. 우리 아이들이 방독면 없이는 바깥에 나갈 수 없는 날이 오고, 바닷가 물놀이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시골 가면 이미 아이들이 없는 세상이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의 인구 절반이 수도권 도시에 몰려 사는 세상이 익숙해져 가고, 대도시에 살며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들조차 내 삶과 직접 관련 없으면 모르쇠 하는 삶에 익숙해간다. 에어컨 속에서만 사니 바깥세상이 얼마나 더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과거에 물을 사 먹을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싶지만 산업화시대 폐해와 오염을 보며 그럴 날이 올 거라 말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수롭게 여길 뿐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미세먼지와 코로나 같은 전염병 시대에는 방독면을 쓰는 게 일상인 세상, 공기를 물처럼 담아 팔고 사 먹는 세상이 올 것이다.
지금 모두가 기후위기를 말하고 전환을 말하지만 정작 국가 단위, 세계 단위 인류 생존 계획으로 이어지지 않는 때에 생태전환, 마을교육공동체라는 주제로 인류문명의 전환을 추구하는 마을의 실천은 더 소중하다. 불편한 진실을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태도와 감성이 아주 중요하다. 교사도 부모도 몸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자본의 언어에 묻힌다. 이미 ‘환경’, ‘녹색‘, ‘생태’라는 언어는 자본의 소비 언어가 되어간다. 지구를 지키는 아름다운 석유화학회사라는 거짓말이 날마다 광고에 나온다. 진실로 가치 있는 정말 뜻있는 회사가 등장하고 있지만 미약하다. TV와 인터넷 매체 어디서나 소비자를 유혹하는 광고는 더욱더 섬세하고 그럴듯하게 더 많이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갈수록 교사, 부모가 혼자 교육하기는 힘든 세상이다. 그러니 마을, 교육공동체가 필요하다. 같이 하는 소모임이 중요하다. 학교 교육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들어오고 나가고는 삶에 따라 다르다. 그걸 품어 안는 게 마을교육공동체다. 어느 곳이든 앞장서서 헌신하고 사람들이 있어 조직은 굴러간다. 교육공동체학교도 그렇다. 더 많은 시간과 품을 내고 정성을 쏟는 사람들이 있어 미안하고 고마운 공동체 품이 만들어진다. 당연한 건 없다. 헌신의 삶은 희생이 아닌 스스로 좋아서 하는 열정이지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공동체는 꼭 문제가 생긴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는 태도와 열정을 보여주고 배워가는 공동체는 역량이 쌓이고 문화가 형성된다. 생태 이야기가 도시 사람들에게 불편한 거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자꾸 교육의 언어로 풀어내는 게 2022 개정교육과정의 총론이며 미래교육의 방향이다. 학교와 가정에서 배우고 익혀야 할 생태 감성과 버릇이 미래교육의 핵심이 아닐까.
그러려면 교사들의 생태와 생명존중 감수성이 올라가야 한다. 부모도 똑같다. 교육은 결국 감성과 버릇 이야기다. 인권, 평등 모두 감성과 버릇의 이야기이자 민주주의 이야기다. 학생 인권 조례와 교권이 왜 충돌하는가? 그게 어떻게 대립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대립을 부각해서 실제로는 누군가 존중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인권으로 생각하면 대립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공동체학교에서 교사들이 이 어려운 이야기를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들여다보면 부족한 게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훨씬 더 넓은 품으로 실수하는 것을 너그럽게 품어 안고 감싸 안아야 작은 공동체의 교훈이 되어 교육공동체의 품과 역량이 된다. 이 세상에서 공동체와 노동(일)은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공동체 갈등과 사례를 들여다보면 종교공동체 빼고는 거의 다 어려움을 겪는다. 맑은샘같은 교육공동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믿음으로 산다. 그러니 다 깨지고 배우고 깨지고 배우며 성장한다. 그 힘이 교육공동체의 살아있는 역량이다.
교사론도 그렇다. 부모라면 당연히 누구나 내 아이를 맡고 있는 교사가 훌륭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사도 역시 불완전한 인격체임을 안다. 교사 부모 사이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게 있다. 굳건한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아는 사람들이 부모와 교사다. 교사는 학교에서 학부모는 집에서 살아가는 처지이니 관점은 똑같을 수 없다. 전체 아이 속의 아이를 보는 눈과 내 아이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처지에서 관점은 분명히 다르다. 미혼자라서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 그건 아니다. 부모만큼 사랑하는 거다. 이 감성이 공동체에 필요하다. 교사에게 부모에게 서로 부족한 게 보인다. 교육공동체에서 함께 성장하는 방법으로 풀어나가야 그게 그대로 아이들 교육으로 간다. 우리는 교육을 인연으로 만난 공동체니까 교육이야기가 전부인 곳이다. 평일 저녁 교육공동체에서 교육에 참여할 때 아이들 돌봄 체계를 잘 갖춰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돌봐야 하니 한 사람만 참여하게 될 때가 많다. 옆지기가 전달해 주는 것과 직접 듣는 것은 다르다. 함께 공부하기 위해 교육공동체학교에서 채비할 것들을 찾아내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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