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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창 18:16-21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 18:16-21 /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빌다] 그 손님들은 식사를 마치고 길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길 떠나는 손님들을 배웅하느라 함께 따라왔다. 17) 여호와께서는 속으로 생각하셨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을 아브라함에게는 숨길 필요가 없지. 18) 아브라함의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매우 크고 막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고, 또 아브라함을 통하여 내가 세상 모든 나라들에게 복을 내릴 터인데, 19) 내가 아브라함을 가려 뽑는 까닭도 이 사람이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내 말을 잘 따르라고 일러두어 저희가 올곧은 일만을 하고 올바른 일만을 하게 하려는 것 아닌가. 만일 저희 후손들이 그렇게 잘 따라 준다면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켜야겠다.' 20) 이렇게 생각하시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부르짖음이 너무나도 크구나. 그곳 사람들의 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병인 모양이구나. 21) 그래서 그들이 정말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지, 나에게까지 들려 오는 그 울부짖음이 사실인지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내가 지금 그곳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극진한 대접을 받은 하나님의 천사들은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 선포하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갑니다.
소돔으로 향하고(16-17) 16절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아브라함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친밀히 교제한 아브라함에게 모든 비밀스러운 일을 계시해 주셨습니다(17).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비밀까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지는 열쇠는 3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하는 믿음, 둘째, 언제나 교감하는 기도, 셋째,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는 교제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18-19) 하나님은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18). 아울러 그 자식과 권속에게 여호와의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다고 했습니다(19). 이 약속은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책임을 다 할 때 성취된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권속은 범위가 넓은 말로 부모와 자녀 그리고 먼 친척을 비롯하여 함께 일하는 일꾼까지 포함됩니다. 아브라함이 어른으로써 가문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가르치고, 성장시킬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은 사람은 영적인 아브라함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처럼 신앙적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20-21)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가서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알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라의 웃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도 들으셨습니다(21). 소돔과 고모라의 소리는 그들의 악행으로 희생된 자들의 피의 소리입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신 것처럼 그들의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누구나 고난을 당하면 원망합니다. 이런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당신은 고난당할 때 원망을 하나요? 아니면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나요?
당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하는 일만 힘들게 느껴지면 남들의 직업을 동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 어떤 일도 쉬운 일은 없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과거에도 반복되어 왔고 시간이 지난 후 지난 일을 돌아보면 과거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쉬운 것이 없고 현재 느끼는 감정이 가장 크게 다가올 뿐입니다. 가시에 찔려서 손바닥에 상처 나는 것이 두려워 장미꽃을 만지지 못하면 꽃을 예쁘게 포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고 팔수도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힘든 과정을 이겨낼 때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세상만사: 티스토리]
< 설 교 >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뜻은
창 18장 16~19절 / 이수영목사
본문 16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는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15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 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합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합니다. 또 9절에서도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물었다고 했는데 10절에서는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하며 주어가 복수인 “그들”에서 슬며시 단수인 “그”로 바뀐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대화하는 상대가 하나님에서 사람들로, 복수에서 단수로 번갈아 가며 바뀐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다는 말입니다. 세 사람의 모습으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13-14절에서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더 분명히 드러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은 어떤 형체로도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니 그러기에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자유자재로 나타나실 수 있으십니다. 때로는 천사처럼 나타나기도 하시고 때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신지 몰랐다가 천사나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야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셨음을 뒤늦게 깨닫곤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의 세 사람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거느리고 오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근거는 본문 16절에서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하는데, 17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속 남으셔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일을 두고 아브라함과 협상을 벌이시다 돌아가신 것으로 보여지고(창18:17-33), 창19:1에 보면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보니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본문 1-2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인지를 즉각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히고 말했습니다(본문 2절):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본문 3-5절).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네 말대로 그리하라”(본문 5절).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말하기를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는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어 급히 요리를 하게 해서 한 상 잘 차려 그들 앞에 가져다 그들로 먹게 했습니다(본문 6-8절).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일 년 후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고를 다시 들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물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네 차례나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신 바 있습니다(창12:1-3, 7, 13:14-16, 15:1-5, 18, 17:1-10, 15-21). 그 약속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의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자손이 번성하며 큰 민족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로 인해 많은 민족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약속이 이루어져야 그 다음 약속들도 이루어질 터인데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 때 처음 약속을 받은지 이십사 년이 지나 그의 나이 구십구 세가 되도록 첫 약속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왜 빨리 약속을 이루시지는 않고 자꾸 나타나셔서 약속의 반복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면서 인내를 기르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가 낙심하거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더욱 더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신앙생활 하다보면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말하고 있고 교역자들도 설교에서 되풀이하는 말씀인데도 아직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을 확실히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또 사라의 득남 예고를 마친 손님들이 일어나 아브라함의 전송을 받으며 소돔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본문 16절).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독백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17-1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 18절이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24년에 걸쳐서 여러 차례 약속하신 바로 그 일입니다. 그 약속을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실행에 옮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을 언제 이루시기 시작할지도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감추지 않고 확실하게 가르쳐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태어날 때를 비로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약속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사실입니다. 19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나이 100세의 남자와 90세의 여자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아마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을 일으키시려고 마음에 작정을 하시고 그 때까지 확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놀라운 일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행하시려는지 그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본문 18-19절 말씀을 다시 들어봅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해야 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과 택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8절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며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택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답은 19절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즉 그의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의와 공도를 행한다”는 것은 의롭고 바른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과 온 집안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은 18절 말씀에 이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에게 나이 백세에 아들을 갖게 하신 것은 그저 노년에 외롭지 않게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 하나를 주시려고 하신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과 집안사람들을 신앙적으로 잘 가르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그래서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을 사는 백성을 만들며, 그들 때문에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앎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모든 집안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을 살고, 나아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잘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임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며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왔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원칙이나 자녀교육의 원리나 가훈에서 몇 번째 자리를 차지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시류에 편승하고 불의한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더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는지,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보다는 출세하고 부자가 되며 명예와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에 유리한 일들을 찾아 행하는 데 더 열심을 내지 않았는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보다는 나와 내 사람들의 행복만이 유일한 관심사이고 목표인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자녀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든 남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알며 궂은일은 남보다 먼저 담당하려 하고 희생할 줄 알라고 얼마나 가르쳤는지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작든 크든 정직하지 않은 일을 행했을 때, 남에게 피해나 아픔이나 억울함을 안겨주는 부당한 일을 행했을 때 얼마나 엄중하게 훈계했는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든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정도를 걷게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인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기를 얼마나 힘썼는지도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주일에 자녀들을 교회에 데리고 나오기보다는 학원에 보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식들과 권속에게 명하고 가르쳐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함으로써 이 나라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우리로 인하여 복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다는 믿음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과 삶을 지배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여러모로 대단히 위태롭고 불안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난국에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할 일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의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솔선수범하여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에 정직하고 정의로우며 정도를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국민이 따라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도 행하신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어떤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어떤 난폭한 세력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게 막아주실 것입니다. 열강에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우리를 안온케 하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천하 만민을 위한 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신실한 백성으로 튼튼히 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의인의 중보기도
창 18장 16~33절 / 이기복목사(하늘문교회)
가을의 정취가 점점 무르익어 갑니다. 어느 유명한 기독 시인은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 기도하는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최대의 수단이고 최고의 권능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녀에게 주신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고 진솔하고 간절한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기도는 백지 수표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원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나 외에 타인이나 가족,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인류를 위하여 기도할 때 이것을 중보기도 또는 중재기도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중보기도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또 중보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8장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입니다. 창세기 18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1-8절).
2)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임신에 대한 확증적인 계시입니다(9-15절).
3)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계시입니다(16-21절).
4)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끈질긴 중보기도(22-33절)입니다.
창세기 18장 전체를 볼 때 아브라함은 중보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을 심판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예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갑자기 심판하지 않으시고 예고와 경고를 하십니다. 아모스 3:7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6장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먼저 의인 노아에게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눅 19:41-44절에 보면 예수님도 타락한 예루살렘의 심판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구약 예레미야서에 남 유다의 타락과 죄로 인하여 신흥제국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여러 번 예고하셨지만 듣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메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가정에 가장 크고 기쁜 소식입니다. 즉 10절과 14절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임신을 하여 내년 이맘때가 되면 아들을 얻게 된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비극적인 소식입니다. 20절에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의 양면성을 보여준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오심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기쁨이요, 축복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승리의 날이고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이나 나라와 민족에게는 멸망의 날 가장 불행한 날 비극적인 날입니다. 오늘 창세기 18장도 이 두 가지 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타락한 인간이나 도성이 멸망당하는 것을 당연시 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을 품고 하나님께 집요하리만큼 끈질기고 인간애가 넘치는 간절하고 애타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간절하게 중보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악으로 물든 도성을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와 민족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에 사는 조카 롯과 가정만 아니라 성 중의 모든 생명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비록 소돔을 불 심판으로 심판하는 중에도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사 롯과 두 딸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이웃을 위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믿음과 자세로 중보기도를 해야 할까요?
1. 심판당할 도성과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범죄하는 나라나 죄인들을 향하여 정죄(定罪)하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자리에 놓이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왜 저런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냐?”며 불평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는 북한의 악한 지도자의 믿는 자에 대한 극악무도한 죄악에 대하여 분노하고, 또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과 이슬람의 극렬단체인 IS에 대하여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바라고 난민들의 행렬이나 비참함을 보며 분노합니다.
시편의 기자들도 악인들이 더 번성하는 것을 볼 때 분노하며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지 절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일처럼 하나님께 매달려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일반적인 유대인들이나 선지자 요나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당시의 유대인들의 마음이나 행위를 대변하는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인은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서 이방나라인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러 가서도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늘 아래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간절한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마치 흥정을 하듯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십니까?”하면서 “만약 그 성에 의인 50인이 있을지라도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은 “의인 50인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만약 “의인 오십인 중에 5명이 부족하다면 그 5명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라고 하자 하나님은 “내가 거기서 의인 45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여 40인, 30인, 20인까지 내려왔습니다. 마지막으로 32절에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10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자 하나님은 “내가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최종적으로 말씀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아무리 타락하였어도 그 성에 롯의 가족을 포함하여 10명의 의인은 더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동족과 이웃을 향한 애절하고 진실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긍휼과 자비심은 성숙한 신앙인의 열매이자 특징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위에서 고통의 순간에도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그리고 옆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는 흉악한 강도의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여 달라”는 간구도 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이웃을 위해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모세도, 사도 바울도 자기의 동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진다하여도 원하는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추석명절을 맞으면서 가까이는 가족,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나의 마음에 가시와 같고 미운 사람이라도 구원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기도의 인내를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한 마디로 피말리는 기도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소돔성과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마치 자기가 멸망당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간절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50인-45인-30인-20인 그리고 10인까지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명수를 낮추어 기도할 때마다 “주여 노하지 마소서” “감히 내가 주께 아뢰리이다” “내가 이번만 아뢰리이다” 마치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간청하듯 애타게 간청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브라함의 그 애절한 마음과 하나님 앞에서 몸둘바를 찾지 못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듯 간청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그리고 나의 중보기도 생활을 반성하여 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기도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렘 5: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이 말씀은 의인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의인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벧후 3:9절에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고 인내하지 못하고 바로 응답되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평생을 기도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를 쉰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도중하차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가정에 믿지 않는 식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특히 부모형제가 믿지 않는다면 즉시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3. 의인의 기도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의인이 없음으로 나라가 망하고 가정이 망하고 개인이 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중요한 기준은 의인입니다. 죄악이 난무한 소돔성에 하나님께서는 유황불의 심판을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의 중보기도와 의인이 있다면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권세가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많으면 나라도 저절로 지켜지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없으면 아무리 부강한 나라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도 망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없었습니다.
특히 소돔성은 성적인 타락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소돔인을 가리키는 영어가 ‘Sodomite’(소도마이트)입니다. 이는 “남색(男色)하는 자”라는 뜻으로 소돔이 얼마나 성적 타락이 심하였는지를 한 눈에 알게 하는 단어입니다. 성적 타락은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세상 종말의 증후로 항상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인들은 성도착(性倒錯)이 극심하여 여기서부터 동성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착”이란 변태적인 성행위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성관계에서 벗어나 극도로 타락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내적인 위기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성적 타락의 극치입니다. 이제는 동성연애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백주에 버젓이 동성연애 축제공연을 하고 퍼레이드를 벌립니다. 대한민국의 성적 타락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정말 의인들의 중보기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우리 가정 하나, 나 하나, 우리교회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 의인을 기도를 들으시고 의인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 뿐 아니라 중보기도하는 성도가 됩시다. 특별히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핑계하거나 다음으로 미루지 맙시다.
소돔으로 가시는 하나님
창 18장 16~21절 / 지용수목사
중국 속담에 ‘하늘이라도 4월 하늘은 하늘 노릇하기 힘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4월이 오면 곤충이나 식물이나 사람이나 처한 형편에 따라 서로 다른 날씨를 원하니 하늘도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보리가 여물기 위해서는 선선한 날씨가 좋은데 벌레들은 따뜻한 날씨를 바라고, 나들이를 가는 사람이나 뽕따는 아가씨는 활짝 갠 날을 원하는데 농부들은 봄비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볼 때도 사람마다 보는 눈과 느낌이 다릅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품은 소원이나 생각도 다 다릅니다.
하늘은 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갖가지 소원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실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양곡교회는 정말 이런 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제가 교회를 위해 구하고 생각하는 그 온갖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을 주십니다. 이번에 새 성전을 짓는 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힘들 것을 각오하고 출발했는데 하나님께서 순적한 길을 열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높이 드는 그 소원의 잔을 오늘도 채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두 오른손을 들어 봅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간증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앞으로 지나가던 나그네가 하나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그 지역의 전통대로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대접을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달려가 나그네들을 겸손하게 맞이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가장 좋은 가루로 떡을 구워 최선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자신이 대접한 그 세 나그네 중 한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늘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실 때 아브라함은 그분이 하나님이신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던 그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양은 자기의 목자가 부를 때만 따라가지, 다른 사람이 부르면 따라가지 않습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양들을 본 일이 있는데, 제가 아무리 불러도 양들은 ‘어떤 멍청한 놈이 나를 오라고 하나?’ 하는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염소와는 달리 양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자도 양의 음성을 알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사람마다 음성의 칼라가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화할 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아내인지 어머니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신비롭게도 쌍둥이라도 그 음성을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압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에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 음성을 알고 듣습니다. 만일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인, 수상한 사람, 자신의 욕심으로 말하는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저건 아닌데…….’ 하고 느낌이 옵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목자의 음성을 아는 은혜를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 거하는 복도 누리게 됩니다.
신명기 33장 3절에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 내 인생의 앞길은 하나님께 있다!” 할렐루야!
자신이 늘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주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받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발은 교회의 강단인 줄 믿습니다. 주의 발 앞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는 정말 복 있는 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발 앞에 앉아 늘 말씀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큰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 할렐루야!
아브라함도 이런 복을 받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기뻐 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신 다음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숨기겠느냐? 소돔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너무 크다. 내가 가서 그 모든 것을 확인하고 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먼저 보내시고 아브라함과 말씀을 더 나누신 다음 소돔으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에는 기쁨으로 오셔서 사라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시고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가까운 친구처럼 대하시며 비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돔으로 가실 때는 무엇을 가지고 가십니까? 아브라함 집에는 축복을 갖고 오신 하나님께서 소돔에는 심판을 가지고 가십니다. 소돔을 멸하러 가실 때에는 어둡고 무거운 마음으로 가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시게 하는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집을 향하여 채찍을 드시고 ‘지금 칠까, 조금 뒤에 칠까?’ 고민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소돔 고모라와 같은 심판은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17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나에게 심판은 없다.”
우리에게 심판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I tell you the truth,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him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and will not be condemned;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라고 되어 있습니다. 'He has crossed over from death to life'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not condemned' 정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면 우리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에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
이제 우리는 죄와 사망, 지옥과 심판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징계는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때때로 자녀에게 채찍질을 합니다. 저도 제 아들이 주일 밤 예배에 나오지 않아서 몽둥이로 스무 대를 때린 일이 있습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저녁 예배에도 생명을 걸어야지. 예배보다 중한 일이 무엇이 있기에 예배에 빠졌느냐? 네가 주일을 범하면서 대통령이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꾸짖으며 제 아들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이것은 심판이 아니고 징계입니다.
욥기 5장 17절에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왜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징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돼지 치는 사람이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것은 돼지가 잘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을 두고 보시는 것은 어차피 악인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악인,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다 지옥에 가도록 이미 결정되었으니 사실 이 땅에서 굳이 심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해도 그냥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길에서 잠깐 만나는 청년들이 잘못하는 일에는 일일이 간섭을 하지 않지만 제 아들이 잘못할 때는 절대로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8절에도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을 했는데도, 계속 죄를 짓는데도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시지 않으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풍랑을 만났던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복 있는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데도 요나에게 풍랑이 없었다면 요나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임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징계는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심판은 없지만 징계는 있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기 31장 1절에서 3절에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목은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욥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욥이 처녀를 주목하여 하나님께서 욥의 짐승들을 죽게 하시거나 도둑을 맞게 하셨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 합시다
“내 눈과 언약을 세우자. 처녀에게 주목하지 말자. 총각에게 주목하지 말자.”
남편을 제외하고 주목해 보아야 하는 남자는 목사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눈, 얼굴, 입까지 모두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남편만 따라 합시다.
“나는 아내에게만 주목한다.”
이제 아내만 따라 합시다.
“나는 남편에게만 주목한다.”
자기 남편을 주목하지 않고 TV에 멋있는 남자 배우가 나오면 주목하는 아내들, TV에 예쁜 여자 탤런트가 나오면 아내에게 “당신도 저렇게 해봐.”라고 하는 남편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 여자도 화장을 다 지우고 나면 별로 예쁘지 않으니 속으면 안 됩니다.
욥은 눈과 서약을 해서 처녀를 주목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 욥은 계속 산업이 잘 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귀하고 올곧게 자라기를 바라시니 내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곁눈질한 그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사무엘하 11장, 12장에 보면 그 선한 다윗도 여자를 주목하니 시험에 듭니다.
여러분, 간음은 착한 사람도 자칫하면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도둑질은 못하는 사람이라도 간음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한 다윗도 간음했던 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어느 날 저녁 때 일어나 왕궁의 옥상을 산책하다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여자는 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 목욕을 하면 될 텐데 왜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때에 왜 마당에서 왕이 산책하는 시간에 목욕을 합니까? 나를 보는 사람에게 정욕을 불러일으키도록 행동하는 것도 죄입니다. 요즘은 ‘섹시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옷을 한 벌 입어도 다른 사람들이 ‘참 귀하다. 참 품위 있다. 참 고귀하다.’라고 생각하도록 입어야 합니다.
결국 다윗은 어리석게도 그 여인을 불러다 범하고 여인은 잉태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 장군에게 휴가를 주어 자신이 여자를 잉태시킨 일을 무마해 보려 했는데 장군이 집에 가지를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국경에서는 전쟁이 벌어져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모압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때에 우리아는 자신만 휴가를 즐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갖은 수를 다 써도 우리아가 자기 집에 가지 않자 다윗은 요압 장군에게 보내는 밀서를 우리아에게 줍니다. 그 편지에는 ‘최전방에 우리아 장군을 보내고 다른 군사들은 뒤로 빠져나와 우리아를 죽게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요압이 그대로 행해서 결국 우리아가 죽습니다. 다윗은 이제 편안하게 그 여자를 데리고 살게 되었고 그 여자에게서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에게 진노하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왕이여, 한 성에 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잣집에는 소, 양들이 가득했지만 가난한 집에는 암양 새끼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그 양을 귀히 여겨 잠도 함께 자고 먹을 때도 양과 함께 먹으며 양을 자신의 딸처럼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잣집에 손님이 오자 부자는 자기의 양을 대접하는 것이 아까워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화를 냅니다.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그런 놈은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양 새끼를 4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
“왕께서 바로 그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왕께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데 왜 우리아의 하나뿐인 아내를 빼앗아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하셨습니까?”
나단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다윗은 회개하며 눈물을 쏟습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징계는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일주일간 금식 기도를 해도 아들을 살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이 간음을 하고 우리아 장군을 죽이기까지 했고 이제 그 일을 세상이 다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냥 두시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의 아들을 죽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 중에서도, 어떤 죄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는 ‘아, 그런 죄를 짓더니 하나님께 채찍을 맞는구나!’ 하고 모든 사람이 알게 하십니다.
이런 징계를 받았던 다윗이 역대상 21장에서 또 흔들립니다. 다윗이 왜 흔들렸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부강해져 감히 쳐들어오는 적이 없으니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군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군사 수를 조사해보니 다윗의 군사는 유다에서 47만 명, 이스라엘에서 110만 명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와 레위 지파를 빼고도 157만 명이니 그들을 더하면 약 200만 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 숫자를 보고 ‘와! 내 군대가 크구나.’라고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다윗을 치십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괴로워 눈물을 흘립니다. 후회하고 있는 다윗에게 선지자 갓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왕께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나이다. 7년의 기근이 있게 하겠나이까? 왕이 대적들에게 쫓겨 석 달을 도망 다니겠나이까? 아니면 왕의 땅에 삼일 동안의 전염병이 있도록 하겠나이까?”
“나는 곤경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크신 분이니 내가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삼일 간 전염병이 퍼져 7만 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죄는 제가 지었는데 왜 이 백성들을 치십니까? 이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나와 내 집을 치소서.”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나가 예배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니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에게는 재앙을 멈추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어쨌든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라는 칭찬도 받았지만 채찍도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는 ‘정신 차려라. 이놈아!’하시며 채찍질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채찍 맞을 죄를 짓지 맙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과 또 하나님의 칭찬과 복만을 얻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어떤 집에는 축복을 갖고 가셔서 ‘자 받아라. 잘 되어라.’ ‘건강해라.’ ‘흥왕하거라.’ ‘자녀가 잘 되어라.’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집과 저의 집에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갖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에 채찍을 갖고 가셨듯이 어떤 집에 가실 때는 ‘안 되겠구나. 네가 너무 교만하다. 그러면 안 된다.’ ‘네가 곁눈질을 했구나. 너를 그냥 두면 안 되겠구나.’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빼앗아 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아, 너는 정말 내 마음에 드는구나.’라고 하나님께서 축복만 하시도록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어제 결혼식 주례를 하다가 신랑 덕분에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 때마다 신혼부부에게 아이를 몇 명이나 낳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둘 낳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 답답합니다. 셋 낳겠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래도 좀 낫습니다. ‘힘닿는 대로 낳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부부들도 있습니다. 재치 있는 대답에 웃기는 하지만 ‘힘닿는 대로’라는 것도 미지수입니다. 그런데 어제 그 신랑은 “일곱 명 낳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대답을 듣고 속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그 신혼부부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드리고 가느라 아직 신혼여행도 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 부부가 첫아기를 낳으면 상금으로 100만 원을 주겠다고 결혼식 때 약속했습니다.
저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84편 11절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히 행하는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링컨이 변호사로 일할 때, 한 고객이 “내가 돈을 많이 줄 테니 이 사건을 변호해 주시오.”라고 해도 링컨은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셔도 이 일은 맡을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변호하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저는 거짓말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런 링컨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께서도 늘 일하십니다.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게으르고 악한 자여, 악하고 게으른 자여.’라고 하십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회사 일에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0장 4절에서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22장 29절에는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한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카네기에게 신문 기자가 “당신의 성공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분야에 최고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그렇게 됩니다. 저는 12살 때 공장에서 실을 감는 직공으로 일하면서 ‘나는 비록 실을 감는 직공이지만 세계에서 실을 최고로 잘 감는 사람이 되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우편배달부로 일을 하게 되었을 때는 세계 최고의 우편배달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제가 맡은 구역의 집 주소를 모두 암기해서 집집마다 우편물을 쏜살같이 배달해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모든 일을 했더니 오늘의 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일을 하는 밭입니다. 그러니 목회자가 게으르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목회자가 늘 열심히 일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십니다. 모든 부목사님까지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할 때 교회의 앞길이 환하게 열리고 그럴 때 그 목사님도 어느 곳에서나 서로 모시고 싶어하는 귀한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양곡교회가 이런 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기 위해 예배와 기도에 힘쓰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도 정직하기 위해 애쓰고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참 기특하다.’ 하시고 그 사람에게 계속 축복을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지는 않으시지만 징계는 하십니다.
하나님께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상과 축복만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열국의 아비"의 기도역량
창 18장 16~33절 / 조남신목사
우리는 지금까지 창세기를 통해서 인류의 초기역사와 족장시대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11장까지는 창조시대 역사 - 그 속에서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셋 그리고 에녹과 노아, 그리고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 , 그 다음 이들이 흩어져서 민족의 기원을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셈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이 족장시대를 열기까지, 그 동안에 인류는 실낙원의 사건, 형제살인의 사건, 대홍수 심판사건, 바벨탑사건 등등... 굵직굵직한 대사건의 홍역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 이렇게 해서 그 다음 족장시대가 열리는데, 족장시대의 첫 주역은 아브라함이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어요. 그리고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인물을 만들어 나가셨어요.... 이 세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 이 세계의 복의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 이 아브라함의 사명이 여기서부터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어요. 그의 사명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그는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 오늘은 18장을 보았는데, 1절에 보면, 한참 더운 대낮 정오에 하나님이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세요.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하지요. 이들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태도가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굉장히 성숙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는데, 아직 완전해졌다고 할 순 없지만, 그는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는 그의 길을 걷고있었습니다.
> 대접을 받고 난 후, 하나님은 천사들을 소돔으로 떠나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복을 받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가만두지 않겠다. 그 이유는 그 죄악이 심히 중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창세기 18:20)... 자기는 축복을 받게 된다니, 기뻤겠지요.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멸하시겠다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누가 막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 하나님은 이 일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지요. '하나님! ... 하나님!' ... 중보의 기도였어요. 아브라함이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그의 신앙생활의 반경이나 비전이 자기 자신이나 가정, 친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 아브라함의 노력은 아주 간절하고, 극진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소돔과 고모라가 비록 죄악의 도성이긴 합니다만, 하나님!! 그 성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무리 그 도시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인이 최소한 50명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안에 의인이 최소한 50명만 있다면, 이 심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 이렇게 시작한 그의 중보기도는 50명에서 45명으로, 그리고 40명, 30명, 20명, 10명으로 내려갈 때까지 매달렸습니다. 이 기도는 그 내용을 분석해 볼 때, 적어도 조카 롯의 가족을 위한 사사로운 기도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이 아브라함의 절박한 중보기도를 들으며 우리는 생각합니다. 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깨닫습니다.
①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지요. 더불어 함께 살아야 돼요. 그렇다면 이 사회를 위해 공헌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때까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훈련을 받아왔어요. 지금 그 결실이 맺어지고 있어요. 이번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관심과 그 도시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이제까지의 가족 수준의 신앙생활 반경을 뛰어넘는 한 차원 높은 기도와 관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족의 발전이었습니다.
② 그 다음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회적 사명이 고작 기도란 말인가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도했습니다. 사실 기도보다 더 위력적인 활동이 어디 있으며, 무엇이 이것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 디모데전서 2:1 이하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지요. 주님이 세우신 지도자로서 가장 먼저 권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라"고 하지요. 기도가 바로 나를 떠나고, 가족을 떠나고, 이기심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③ 그 다음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십니다. 50명, 45명, 40명,...10명, 아니 1명이라도 의인을 찾으십니다. 여기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왜 10명까지 기도하고 1명까지 내려가지 않았을까? ... 예레미야 5:1에선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계세요...
> 사회학자들은 한 사회에서 대개 5%만 의로울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충분히 건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다에 소금이 4%만 있어도 그 바닷물은 절대로 썩지 않는다고 그래요... 하나님은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 영국에서 어떤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유명인사 20명의 리스트를 작성한 다음, 그들에게 일제히 전보를 쳤어요. 뭐라고 쳤지요?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즉시 피신하기 바람." 그러니까 그 20명이 모두 즉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 하나님은 의인을 세우시기를 원하시지요. 그래서 의인을 관심을 가지고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지요.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십니다...하나님을 닮아가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은 왜 이때까지 이 아브라함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셨을까? 아브라함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그래서 복의 근원이 되도록,...그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소돔과 고모라까지를 위해서도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리 하셨던가 봅니다. 사실 오늘날의 평화문제의 해결에는 아브라함밖에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의 조상이고, 기독교의 조상이고, 이슬람교의 조상이지요. 그러니 그만이 이 세계를 위해, 분쟁과 갈등의 조정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민족들은 각기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복의 근원이 되는 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며 기도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④ 아브라함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내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회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지요. 심판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우리의 사회는 의와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노력해 가야 합니다. 의만 있어서도 안되고, 사랑만 있어서도 안되고, 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어서 곧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고 말씀하셨어요. ...
>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부흥"이라는 찬양이 있지요. 이 찬양의 가사 내용을 한 번 자세히 음미해 보세요. 이 복음성가 역시 간절한 중보의 기도 내용이 가득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이 복음성가를 한 번 낭송해볼까요?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 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 11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바쁘시게 살아오셨을 줄 믿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을 줄 압니다. 그 기도를 계속하십시오. 그 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을 줄 압니다. 그 기도도 계속하십시오. 그 동안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을 줄 압니다. 그 기도도 빠뜨리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곳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대선을 위해서도, 통치자들을 위해서도,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해서도,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기성세대, 노년세대를 위해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이것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더욱더욱 사시는 복의 근원,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보기도의 위력
창 18장 16~33절 / 성홍모목사
우리는 지난 한 주간 연쇄살인범으로 인하여 참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 연쇄 살인범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처음 소식을 접하였을 때에는 참담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살인범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마지막 벌이는 광란의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신을 유기한 현장을 조사하면서 시신을 찾아낼 때에는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 그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타락의 말로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봅니다.
저는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살인마 때문에 수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인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정을 나누고, 의좋게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하였으니 하루 속히 이 땅에 두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 살인마가 순순히 털어놓았기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손길이었습니다.
조선일보의 칼럼을 쓰시는 이규태 선생의 글에 [제비의 곡]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차에 치인 제비 한 마리를 두고 동료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와 감싸고 안아 일으키려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 것이 화제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감동을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이규태선생은 말합니다. "생명 경시의 풍조가 만연되고 희비애로의 감정이 건포도처럼 말라비틀어진 현재의 좌표를 지탄하는 제비의 곡(哭)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하찮은 미물도 사랑이 있고, 다친 동료를 구하는 인정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라면 당연히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어야 하고, 죽어 가면 우선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사님의 도움을 받아 다음 카페에서 제비의 슬픈 사랑이라는 그 화면을 찾아내었습니다. 제비가 차에 부딪쳤는지 사고를 당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진에 담긴 글을 읽어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일어나요.....나와 같이 드높은 하늘을 훨훨 날자고 약속했잖아요..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이렇게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지 말고 어서 일어나란 말이에요.. 바보같이 왜 이렇게 누워 있는 거예요... 숨을 놓아버린 것처럼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전 무서워요" "당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일으킬 꺼에요" "그러니 제발 조금이라도 움직이세요...숨을 쉬란 말이에요. 내가 이렇게 곁에 있어요...눈을 뜨란 말이에요" "제발....죽지만 마세요...날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제발....제발.." "당신이 없는 지금 난... " "어디서부터 어떻게 당신을 그리워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잊어야 할지... 내 가슴에선 아직도 당신의 미소와 당신의 따듯한 마음이 너무나 선명한데..."
동물도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데, 사람이 되어 가지고 살인마라니 인간성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미어집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근처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숲 속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날이 뜨거운 한낮에 장막 문에 앉아 있었는데, 눈을 들어보니 사람이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얼른 일어나서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혀 절하면서 세 분의 나그네를 영접하였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아브라함은 속히 장막으로 가서 부인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자기는 가축 떼로 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들에게 요리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대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아브라함을 들어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지나가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는데,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보통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이 사라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내년 이맘때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라가 장막 뒤에 있으면 웃을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오신 그 세 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의인화하여 거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번 방문으로 인하여 또 한 가지 다른 사건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 분의 사람이 일어나 소돔으로 향하여 나가니 아브라함은 전송하기 위하여 따라 나갔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세 분과 함께 헤브론 북동쪽 '카퍼바누케'라는 곳까지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아주 높은 언덕에 위치한 곳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해와 그 주변의 여러 성읍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 때에 두 분은 계속하여 소돔을 향하여 길을 가시고 한 분은 계속 남아 아브라함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하여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을 멸망시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치 친구가 친한 친구에게 속사정을 털어놓는 것처럼 것 장차 하시려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말을 들을 최초의 사람이며, 최후의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신 말씀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주의 벗", "나의 벗"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모세가 훌륭한 사람이요, 위대한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여도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라고 하였지만 직접 친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장차 일어날 소돔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7-18)고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도시는 요단강이 흘러 사해로 들어가는데, 사해가 있는 지역이 바로 예전에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고대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 사람의 5성읍 중의 대표적인 도시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먼저 조카인 롯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선택하였는데 그 때 롯이 눈을 들어보니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멀러 소알성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고,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의 곡창지대와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요단 지역을 택하고 떠나가서 그 장막을 옮겨 치면서 목축을 하는데 소돔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고 했습니다.
소돔이라는 곳은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살았기에 바벨론의 여러 부족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 지역에는 수량이 풍부한 요단강물로 인하여 농사가 잘 되고, 과수가 잘 되어 살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농산물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지역의 도시 국가들이 바벨론의 그돌라오멜 왕을 섬기면서 조공을 바치다가 독립한다고 하였지만 전쟁을 불러오게 되었고, 소돔과 고모라 왕은 도망치기에 바빴으며 바벨론 연합군들이 많은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가고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아브라함이 사병을 거느리고 와서 한 밤 중에 그들을 쳐서 멸하고 조카 롯을 구해내고 빼앗긴 재물도 다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에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는데, 그 동안 축적한 재물에 대한 미련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돔이란 곳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성적으로 타락해집니다. 이 성이 극도로 타락하여 소도미(Sodomy)라는 말은 동성연애, 남색. 또는 수간이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 도시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하나님의 천사 두 분이 롯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 때에 소돔 사람들이 노인과 젊은이를 막론하고 원근 각지에서 다 모여들어 롯의 집을 에워싸고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했습니다. 상관하리라는 말은 관계를 가지겠다는 말입니다. 소돔에 사는 기운 있는 남자라는 이들은 다 나와 하나님의 천사들과 남색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는데, 참으로 호감이 갈만큼 잘 생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 소돔에 살고 있는 롯이 대답하는 것을 보아도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너희 좋을 대로 두 딸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안 되는 것은 끝까지 안 되는 것이요, 약혼한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두 딸을 내어주겠다고 하는 것도 아버지로서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롯이 물질을 좋아하여 요단평야를 선택한 결과가 그러하였습니다. 롯의 영성이 얼마나 무디어졌는지, 이제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소돔성의 타락상을 직접 보고서 확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시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갈대아역 성경에는 "만일 회개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들을 벌하지 않겠노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 보지 않고도 멸망시킬 수 있으나, 두 분의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소돔성에 들어갔을 때에 일어난 타락상을 보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으며, 변명할 수 없는 사유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가까이 간다는 말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요, 이 말은 "경배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4)
당시에 소돔성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비옥한 평야에 위치한 대표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였을 터인데, 그 중에 오십 명이라는 수는 아주 적은 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도 적은 수를 가지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적은 수라고 하여도 아주 크게 보아주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의인과 악인 같은 대우를 받거나 악인 때문에 의인이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이라는 수가 아주 적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는 없고, 하나님의 공의로 보실 때에도 합당한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의인 50명이라는 수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어 있으며, 그래도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을 높이는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의 신관을 상고해보면 사랑과 공의가 공존하는 대단히 높은 차원의 신앙인 것을 찾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탄원을 들으시고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실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데, 한편 인간을 만나실 때에 대표성을 가진 이와 상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을 전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서 그의 자손을 택하신 백성으로 보아주셨습니다. 이러한 대표성의 원리가 가장 극치를 이룬 것은 한 분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담은 제1일의 아담으로, 그리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으로, 제1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정죄당하였지만, 제2의 아담 안에서 우리는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의인 50명은 소돔을 살릴 수 있는 대표성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소돔성이 죄인이 많아서 멸망 받은 것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막상 소돔성을 위하여 기도를 시작하였지만 의인 오십 명을 찾을 자신 없었습니다. "저는 티끌과 재와 같은 존재이오나 감히 하나님께 아뢰나이다"라고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숫자를 낮추고 있습니다. 45명을 말씀드렸습니다. 염치없지만 40명으로 낮추었습니다. 안되겠습니다. 마음이 바빠지고 5명씩 낮추는 것은 시간이 부족합니다. 30명, 20명, 10명까지 떨어뜨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꾸만 숫자는 낮추는 것으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6번이나 하나님과 담판을 벌렸는데, 의인 한 명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하였는지, 아니면 인생이 불쌍하니까 그냥 용서해달라고 하지 못하였는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범죄 타락한 인간의 푸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의인이란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있는 롯을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다는 말에 우리는 묘한 위안을 받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라고 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율법의 100%를 다 지킬 수 있는 의인은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 사회는 사람살만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속박하고 부자연스럽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로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의인 10명을 말씀드릴 때에 당시의 사고로는 10명이란 숫자는 한 가족을 의미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제목을 가지고 숫자를 낮추면서 6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돔성을 멸망시키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셨습니다. 창19:29에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하셨습니다. 중보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시105:42에서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을 일으키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돔성을 멸망시키시는 중에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기억하셔서 조카 롯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을 위한, 우리 형제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랑하는 아무 장로를 기억하사 그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성적 도덕적 타락에 있어 세계 제3위라고 합니다. 수도 서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교회가 많은 도시인데, 성적 타락은 세계 제3위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교회가 많은 도시에 이 세계에서 가장 타락한 도시라는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것이어서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부패 타락상을 보면 얼굴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민족을 구원하여 달라는 탄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나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지만 응답은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아주 멋있는 기도가 중보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아브라함을 보면 염치없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숫자를 낮출 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웠을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수치를 무릅쓰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요, 기도의 힘으로 이 험한 세상을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보의 기도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소원하는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아브라함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민족의 죄악을 나의 책임으로 알고 염치와 수치를 감수하면서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지위
창 18장 16~33절 / 임덕순목사
어느 사회이든지 비중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은 아마 두 당의 대통령후보가 한국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께서 사랑하시고 아끼는 학생이 있고, 말을 해봐야 선생님도 안 믿어 주는 학생이 있습니다. 사회에서도 남들이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무시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앞에서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손님들은 아브라함의 거처를 떠나서 소돔으로 가려고 일어섰고, 아브라함도 전송하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사자들 이었습니다.
저 만큼 소돔을 향해 나아가던 하나님의 사자들은,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아브라함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너한테야 숨길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란 두 가지였는데, 아브라함에게는 복을 내리고, 소돔의 죄악 된 백성들에게는 심판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을 받을 자에게 복을 내리고, 심판받을 자에게 심판하시는 일이 그분들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아들을 얻게 될 것이고 후손이 강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하셨고, 소돔과 고모라는 그들의 죄악이 크고 중하기 때문에, 가서 알아보고 심판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분의 손님 중에 한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사람들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그분이 구약에서 활동하신 성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을 이루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분 자신이 예수라는 인간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날 그 세분의 손님 중 한 분은 분명히 하나님 이셨습니다.
16절에서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여" 갔다고 했고, 17절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라고 시작하여 21절까지 여호와로서 말씀하시며, 22절에는 다시 "그 사람들이" 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이런 표현들을 보면, 그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인간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앞에 나타나 대화하셨으며, 당신의 비밀을 당신의 뜻대로 순종하여 사는 의로운 사람에게는 알려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시간과의 관계에서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며 그것을 영원이라 합니다. 공간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분이며, 그것을 편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지만, 인간과 만나주기 위해서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실 수도 있고, 좁은 공간에도 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그분의 초월성을 우리는 무한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무한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려고 인간 앞에 일부러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비중 있는 인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속에 두신 비밀한 계획을 인간중 한사람인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자기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까?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습니까?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속마음을 열어 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어 보이는 그 습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마음이 통했다는 뜻입니다.
약2:23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의로 여기시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시25:4엔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5:14에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하셨고,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벗으로 여길만한 사람을 찾고 계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친구로 여겨주시며, 그에게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암3:17에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신다는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을 귀띰 해 줄 수 있는 친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아브라함 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사이 이십니까? 기왕에 예수 믿고 살려면, 이런 관계가 되고싶지 않으십니까?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런 위치, 그런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만큼 높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가 금식을 오래하고, 그가 땅을 밟지 않고 산 도인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노인네였고, 먹고 입고 사는 문제로 고민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까? 단지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먹고 입고 사는 모든 평범한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어려워도 그렇게 따랐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최선을 다해서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려고 애쓸 때, 비록 그가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낮아지셔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에 맞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벗처럼 대해주시고 우리를 찾아 오셔서 당신의 뜻을 미리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이런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에 금년도 수능고사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이제 극심한 눈치를 보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학을 나와도 갈 직장이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넘치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이 많습니까?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쓰려는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 찾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찾는사람, 정말로 믿을 만 하고 정말로 회사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성실하게 책임을 다할 사람, 일을 맡겨주면 맡긴 사람의 입장에서 연구하면서 최선을 다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는 사람, 목소리가 이쁜 사람, 화장을 이쁘게 한 사람,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고 많은데, 정말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렇게 순종하려고 힘을 다 쏟아 순종하는 사람은 얼마나 찾기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찾으면 아주 기뻐하시며, 그를 당신의 친구로 삼아주시고 당신의 계획하신 뜻을 말씀해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벗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도 매우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며 그 뜻을 이루려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삶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교인 중에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라고 반가워 하셨는데, 우리 한가람 성도님들 모두가 그런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친구로 여겨주시는 그런 영원한 지위를 얻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상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소돔지방의 죄악이 너무 심각해서 그곳에서 살며 억울해서 부르짖는 비명이 하나님께 상달하였으므로 가서 확인하고 그 성을 멸망시키겠노라 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곳에 사는 조카 롯이 염려되었습니다. 소돔성이 멸망한다면 그곳의 롯도 함께 망할 것이 아닌가? 롯은 그래도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닌데, 악인 때문에 의인이 함께 망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닌가? 몇명의 의로운 사람 때문에 악한성이 사함 받을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여쭙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만약에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성을 멸망시키시렵니까?”
“아니다. 그 성에 의인이 50명이 있다면 당연히 네 말대로 그 성을 용서해 주마”
그렇게 대답을 받고 나니, 아브라함은 용기가 났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내 의견을 참고 하시고 내 말을 들어주시다니,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아뢰어보자, 혹시 50명이 안될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45이면 어떻게 하실거냐고 여쭈어보자, 그래서 45명이면 어떻게 하실거냐고 어쭈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흔쾌히 45명만 찾아도 그 성 전체를 용서 하마 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을 듣고 나니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의인이 40명이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니 주는 노하지 마소서, 거기서 열 명이 부족하여 30명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아니, 20명이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렇게 몇 번씩 몇 번씩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을 바꾸어 50명에서 20명까지 내려올 동안,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흔쾌히 허락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에 관하여 조금 아는지라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세어보아도 그 성에는 의인이 20명도 안될 것 같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너나없이 죄속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종교도 있었고 법도 있었지만, 모두가 형식이요 자기 잇속과 세상적 평안을 위해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소서, 이번만 말씀드리렵니다. 만약 의인이 1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섯 번째 숫자를 바꾸어 가며 말씀드렸는데 이번에도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흔쾌히 들어주셨습니다.
“좋다, 단 열명만 있어도 그 성 전체를 다 용서해 주마”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그저 형식상 대화를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기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며 상담을 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는 말마다 다 들어주시는 놀라운 대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건의를 받고 당신의 뜻을 여섯 번이나 변경하면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런 대화는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별로 흔치 않은 대화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그런 대화를 했습니다.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한다면 누구에게라도 이런 대우를 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이런 대화를 한 사람은, 아브라함 외에 모세도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산 아래에서는 아론이 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하여 그들을 멸절하고 모세의 자손만으로 저들보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는 자기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출32:14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암 7:5 에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재앙으로 황충이라는 메뚜기를 보내어 모든 곡식들과 나무들을 먹어 치울 때, 아모스 선지자가 "야곱이 미약 하오니 어찌 하오리까" 라고, 이스라엘이 못나서 그러니 용서 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하셨던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다 거두셨습니다. (요나3:10도 참고)
복음서에 보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주인이 3년을 기다렸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그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때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건의합니다. “제가 한해 더 잘 가꾸되, 깊이 파고 거름을 주고 돌볼테니, 그렇게 해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때는 찍더라도 올해는 한번더 참아달라” 고 간청합니다. 주인은 그 포도원지기의 말을 듣고 한해 더 기다렸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선지자들, 포도원지기, 이들은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종이며 친구였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 자기의 책임을 알면서 제가 이렇게 할 테니 이렇게 해 달라고 책임감 있게 아뢸 수 있는 사람, 자기 가족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 애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가족과 남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며 간청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해 놓으신 뜻을 변경하면서 까지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모세와 아브라함은 그런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는 없을까요?
아브라함은 우리와 속성이 다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하시는 바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요?
ㄱ,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생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깨닫고,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미적미적하며 일부러 시간을 다 보내고는, 깜빡 잊었습니다, 라고 변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 쉽고 어렵고 간에 그대로 즉시 순종하는 삶이 아브라함의 삶이었습니다.
ㄴ, 어디를 가든지 먼저 제단을 쌓는 예배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예배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에 관심이 있는 사람, 자기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에 관심이 있어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ㄷ,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또한 사람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삶은 그의 손님대접에서 나타났습니다. 지나가는 손님에게 자기가 아쉬운 사람인 것처럼, 손님대접의 기회를 놓칠까봐서 달려 나가서 사정하여 모시고 와서는 신속하게 요리를 하고 분에 넘치게 대접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을 대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까지 하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께 아브라함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요 우리들 논란의 최종의 권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다, 이렇게 하라 하시면, 그것은 옳은 것이요 또한 복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서, 아브라함 같은 대우를 받는 성도가 됩시다.
자기의 유익, 자기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고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사는 삶을 살면 됩니다. 우리는 자기 명예가 손상을 당할 때 밤잠을 못자지만, 하나님의 명예를 그렇게 존중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이름을 바른 예배의 생활로 높여 드립시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당신의 친구로 여겨주십니다.
남을 돕기를 자기가 아쉬운 사람인 것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 소자 중 한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고난을 보고서 내가 책임져야할 일인 것처럼 하나님께 간청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당신이 정하신 뜻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정하신 뜻을 바꾸시면서 까지 그의 의견을 들어주십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그 신앙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친구로 여겨주시는 존귀한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소돔의 죄악과 의인의 구원
창세기 18:17-21 / 피종진목사
할렐루야!
이 땅에는 많은 사람이 다양한 삶의 방법대로 살아갑니다. 성격, 문화, 취미, 사는 방법이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삶의 모습은 두가지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한 부류는 착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기를 노력하고 힘쓰지만, 다른 한 부류는 악을 행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생활 속에 사는 사람들처럼 사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이 황폐하고 척박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기름진 축복의 땅으로 변화시키셔서 가시 엉겅퀴와 거칠고 잡초가 무성한 광야 사막의 빈들도 아름다운 옥토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의 땅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렇지만 축복의 아름답던 땅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인하여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게 되어 결국에는 멸망까지 이르는 ‘소돔과 고모라’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 받은 소돔과 고모라에 거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후대에 신앙의 모델이 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말씀을 상고하면서 ‘소돔의 죄악과 의인의 구원’이란 제목으로 말씀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첫째, 소돔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므로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 땅은 굉장히 저주받은 땅, 몹쓸 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는 물이 풍족하고 비옥하여 살기 좋고 기름진 땅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아멘. 사람들은 물이 있고 살기 좋은 곳에 모여 삽니다. 그 당시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3)라고 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악하면 「큰 죄인」이었다고 표현했을까요?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이 말씀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말씀의 의미를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모태에 잉태될 때부터 여호와 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모두 가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여호와 앞을 한시도 피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감사한 마음과 함께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을 하고 악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악’이란 카코스(헬라어) 곧 ‘독(毒)’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악하게 사는 것은 마음에 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서 독을 뽑아내야 합니다. 또한, 피크리아 (헬라어) ‘쓴 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쓴 뿌리는 나무 자체가 올바로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열매의 결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악을 떠나 선에 속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능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부지중에 실수했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해달라고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이나 지혜가 없어 분별력이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면 좋은 일을 누리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항상 자신들을 자랑하며 세리들을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세리를 칭찬해주고 오히려 교만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잠언 22:8) 아멘.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요삼 1:11) 아멘.
※ 사람의 악은?
①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5,6) 아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운 마음을 심어 주었지만, 인간은 악을 행하였고 결국은 노아의 시대에는 홍수로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항상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며 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살면 참으로 행복합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하며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② 혀로: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혀로 인하여 죄를 범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3:8) 아멘.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3) 아멘.
혀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우리의 혀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혀로 찬양하고 화답하며, 축복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는 혀가 되길 축원합니다.
③ 육의 행위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아멘.
유명한 프랑스 철학가요 정치가인 루소는 “양심은 영혼의 소리이고 정욕은 육체의 소리이다.” 라고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가 우리 마음속에서 호령하고 지배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물질의 탐욕이나 명예의 탐욕으로 사람들을 멸시하고 자신의 이권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 삶을 하나님께서는 노여워하십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잠 11:19) 아멘.
당시 소돔고모라의 죄악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8:20에는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라고 했으니 여기 「부르짖음」이란 기도의 부르짖음이 아닌 히브리어 「제아카」는 하늘을 향해 호소하는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입니다. 즉 죄악에 대한 원성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6) 아멘.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 19:24,25) 아멘.
성경은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악은 우리의 암적 요소보다도 더 무섭게 생각해야 합니다. 선을 본받고 선을 행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해결사이시고 기쁨의 근원, 축복의 근원, 생명의 근원,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의 삶이 병들고 실패했더라도 치료의 근원, 회복의 근원, 소망의 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신앙의 위기는 가장 부유할 때와 가장 어려울 때가옵니다. 기도가 점점 약해지고 안일하고 편리하고 쉬운 넓은 길로 천국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 말씀했습니다. 항상 게으르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사명에 힘쓰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잠 11:19) 아멘. 결국은 의에 종착은 생명이고 악의 종착은 사망입니다.
둘째, 의인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 13:18) 아멘. 아브라함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장막을 옮겨 예배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악에서 떠나고, 불의에서 떠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아멘.
※ 이처럼 의인의 길을 걸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은 어떠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 아멘.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7,18) 아멘.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악을 떠난 아브라함의 의로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자손에게 복을 약속했고 모든 만민까지 축복이 임해졌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악을 떠나 선을 행하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찾고 함께 동행 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견고한 믿음 안에서 축복받고 승리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제가 의인입니다
창 18장 20~33절 / 유영설목사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소돔성의 죄악이 큼으로 인해 심판하시러 천사들을 보낸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성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소돔성에 의인이 있어서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처음에는 의인 50인, 45인, 40인으로 줄더니 의인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냐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하나님은 의인 10명으로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소돔성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지만 그 안에도 죄 짓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며 아브라함처럼 정의와 진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악이 가득찬 세상을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 죄를 짓는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소수의 의인을 보호하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1. 재물의 풍요를 선하게 사용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소돔성은 지역적 환경으로 인해 부가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이런 부를 잘못 사용하여 방탕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잘못사용하여 자신만을 위해 살고 이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과 사명을 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돔성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시대를 위한 선지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대에 맞게 선지자를 보내셔서 경고의 말씀, 책망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듣지 않을 때에는 심판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런 선지자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서노하는 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경건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 말입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롯은 소돔성의 사람들의 죄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성의 죄악을 보며 심판하러 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육적인 일에는 민감하지만 영적인 일에는 둔합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로서 책망과 징계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 소망의 희망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에게 이 시대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여 선지자의 상을 받는 믿음생활이 되길 축원합니다.
3. 교회는 의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탄원에 하나님은 소돔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소돔성은 의인 10명이 없어서 심판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작은 촛불의 중요성을 알듯이 의인은 우리 시대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우리 시대의 혼란은 모든 사람들이 지식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영성이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이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로 훈련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의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의인을 길러내어 세상의 죄악과 싸우고 하나님을 뜻을 실천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세상은 많은 문제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의 문제에 눌리지 않고 삶의 목적을 깨달아 선지자의 삶, 의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의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