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 야생화
교직 말년 거제로 건너와 정년까지 남겨둔 삼 년을 채워간다. 올 연말 방학에 들면 새해를 맞는다. 설 이후 개학해 며칠 등교와 함께 졸업과 종업식으로 봄방학에 듦과 동시 내 교직은 마감된다. 열흘 전 교무부 업무 담당 동료가 퇴직 교원 포상 공문을 작성한다고 해서 정년이 임박했음을 실감했다. 다음 달 중순에는 연금 관리공단에서 주관하는 은퇴예정자 연수가 예정되어 있다.
지난 주중 목요일은 대학 수학능력시험이 지나갔다. 거제로 건너와 내리 삼 년 동안 수능 감독관에서 면제를 받았다. 고령 교사나 임산부에게 감독관을 맡기지 않음인데, 그에 대한 예우라기보다 아직 신체나 정신이 멀쩡한데 역할에서 배제된 기분이라 허전한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내리 이태 수능일은 해금강 트레킹을 나서고 망산에 올라 다도해 절경을 구경하는 여유를 가졌다.
올해 수능일이 다가오자 그날 뭐로 소일할까 미리 구상해 놓았다. 그간 거제에서 주중은 물론 창원으로 복귀하지 않은 주말은 갯가 산책이나 알려진 산을 찾았다. 섬 안의 곳곳을 누비면서 정려각 효열비를 읽어보고 고개에 서린 전설도 음미했다. 섬 안의 섬인 가조도와 수양방도로 들어가 낙조의 아름다움도 바라봤다. 미식가나 식도락가 축에는 들지 못해 맛집 순례까지는 못했다.
이번 수능일은 그간 미뤄둔 매물도 탐방을 다녀왔다. 남녘 바다에 뜬 유인도인 매물도는 통영에서 가는 뱃길보다 거제 저구항에서 가는 시간이 짧게 걸렸다. 교직을 마무리 짓는 졸업 소풍 같은 의미를 지닌 매물도 탐방은 거제 생활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마침표였다. 그날 바람이 잔잔하고 포근해 매물도 트레킹에 어려움이 없었다. 평일이라 관광객이 적어 혼잡하지 않아서도 좋았다.
매물도라면 낚시꾼들이 더러 찾아갔겠지만 나는 그쪽에는 관심이 없다. 뱃길이 멀고 생활권에서도 떨어져 앞으로 두 번 세 번 찾아갈 일은 없지 싶다. 바다 풍경은 봄날이나 여름보다 가을이나 겨울이 좋았다. 마침 내가 찾아간 때가 입동이 지난 늦가을이라 민둥산을 오르내리는 탐방로에서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쪽빛 바다 바위섬이 즐비한 아름다운 다도해 경관을 구경했다.
대매물도 당금부두에 내려 보건진료소를 지나니 해풍을 맞고 키우는 방풍나물 밭뙈기가 나왔다. 야영장으로 바뀐 된 초등 분교에서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했다. 뭍에서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수없이 다닌 산행이나 산책에서 야생화를 관찰함은 버릇이 되었다. 어느 산기슭이나 어느 들판으로 나가면 철 따라 무슨 꽃이 피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한겨울에 피어나는 들꽃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번 늦가을 매물도 탐방에서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해협 해풍을 몸으로 막아내는 대매물도는 숲이 적어 민둥산이다시피 했다. 해송은 강풍에 삭았는지 재선충이 붙었는지 고사목이 많았다. 목본에서는 군락을 이룬 동백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선홍색 꽃망울은 수줍음을 타며 웃는 새색시 볼을 연상했다. 노란 산국과 보라색 꽃향유가 지천으로 피어 향기가 진했다.
대매물도 장군봉이 바라보인 전망대로 오르는 비탈에는 아직 꽃잎이 시들지 않은 구절초가 반겨주었다. 즐겨 찾아간 창원 진북 서북산의 구절초꽃은 진작 저물었다. 구절초 꽃잎은 순백색과 연분홍 두 가지인데 거기는 후자였다. 구절초 사촌쯤 되는 쑥부쟁이꽃도 당연히 볼 수 있었다. 대매물도 탐방로는 힘들어 관광객들은 그냥 스쳐 소매물도만 찾았는데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장군봉에서 쪽빛 바다에 뜬 소매물도와 바위섬을 바라보고 대항마을로 내려가 소매물도로 가는 여객선을 탔다. 선창에서 산마루로 올라 세관 역사관을 지난 열목개에서 등대섬으로 오르는 비탈에 지천으로 피어난 해국을 만났다. 비록 사람 손길로 심어 가꾸었지만 반가웠다. 국립공원 명성답게 절멸 위기에 처한 야생화를 복원시켜 놓아 그간 낸 세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2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