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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없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 마음을 잘 챙겨라, 수행은 마음을 다잡는 데서 시작한다, 네 마음을 똑바로 보아라,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성불成佛이다, 다양한 모든 불교교리는 결국 한마음(一心)에 대한 다른 표현들일 뿐이다, 삼라만상 모든 현상은 마음이라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이다, 마음은 사물처럼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실은 가지각색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 ... 이들은 모두 한국 불교계에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씩 듣는 귀에 익숙한 소리들이다.
현재 모든 불교사회 가운데 한국만큼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곳도 없다. 스님과 재가법사 모두 ‘마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마치 마음 하나만 제대로 다룰 수 있으면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마음공부를 위해서는 책을 읽으며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앉아서 호흡조절하면서 명상하고 참선해야 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문자文字를 쓰는 나 같은 심리철학교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불자들이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마음의 존재론적 성격과 그 본질에 대해서는 좀 알고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몇 마디 해야겠다.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이 우주 어디에 마음이 존재할까?
나는 먼저 2,500년 전 석가모니 시대의 세계관이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세계관으로 마음의 존재와 그 본질을 규명해 보자고 제안한다. 오늘날 자연과학에서 물리학이 가장 앞선 분야라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물리학은 물질의 가장 미시차원으로부터 가장 거시차원의 속성들을 모두 연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고, 수학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십분 활용해 다른 어떤 연구 분야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앞선 결과들을 산출해 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인 물리학자들의 연구 및 관찰 결과에 의하면 이 우주 어느 구석에도 한국 불교계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마음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없다. 왜 그럴까.
붓다는 인간 존재가 오온五蘊으로, 즉 물질과 네 종류의 심리 상태로 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광대하고 복잡한 물리계는 그냥 하나의 범주에 넣어 버릴 수 있지만 마음 속 심리 상태는 네 가지 종류로 나누어야 할 만큼 다양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심리 상태들이 물질과는 분류를 달리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존재세계가 한 가지 종류로 되어 있다고 본 일원론자一元論者(monist)가 아니라 이원론자二元論者(dualist)였다.
그런데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물질적 토대 없이도 심리 상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뇌가 없는데도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또 감각을 가질 수 있을까? 붓다는 심리상태들이 몸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 같이 말했고, 또 불교역사상 유식학에서는 의식 상태의 존재만 인정할 뿐 물리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사실은 잠시 옆으로 제쳐 두고,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의 앞선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상식적으로 고려해 보자. 근본적으로 물질로 되어 있는 이 세계에 정말 아무런 물질적 토대 없이도 의식과 심리 상태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마음이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본 데카르트
서양에서는 수천 년 동안 마음(mind)을 물리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불변하고 불멸이라는 영혼(soul)과 동일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17세기의 데카르트다. 그에 의하면 마음과 물체(body)는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substance)로서 서로 상반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연기와 공空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에서는 실체와 본질의 존재를 부정否定하는데, 그렇게 부정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도 먼저 실체와 본질을 철학적으로 정의定義하고 설명해 보아야 하겠다.
실체 = (정의) 독립적 존재 (independent existence).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서양인들은 내 앞에 있는 물체인 책상은 그 스스로 존재할 뿐, 그 존재를 위해 다른 아무 것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독립적 존재인 실체라고 생각한다. 돌, 집, 물 등등 모든 물체 또는 물질적 대상은 실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책상의 그림자는 이 책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다. 당신이 좋아할지도 모르는 왈츠도 왈츠를 추는 사람 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서 실체가 아니다. 얼굴의 미소, 책상의 표면도 얼굴과 책상 없이는 존재하지 못하므로 실체가 아니다. [주석: 한국불교계에서는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實體와 ‘실제로 존재한다’는 의미의 실재實在를 혼동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미소, 표면, 왈츠 등은 보기에 따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들을 독립적 존재라는 의미의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의하면 마음 또한 우리 몸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다. 말하자면 몸 특히 뇌가 없어도 마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원불변 불멸하다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 본 적이 없는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생소한 소리인데, 영혼불멸설을 기본으로 하는 기독교 전통에서 수천 년을 산 서양인들에게는 그것이 상식으로 통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마음과 물체가 두 실체라고 보았다. [주석: 물론 신神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한 독립적 존재이고 마음과 물체는 그 지속적 존재를 신이 넣어 준 힘(concurrence)에 의존한다는 면에서 단지 파생적 의미에서의 실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통상 이 점을 무시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마음과 물체는 서로 정반대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본질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본질 = (정의) 어떤 것이 이것 없이는 그 스스로일 수 없는 그것 (that without which something is not itself)
말하자면, 어떤 것의 본질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 주는 필요불가결한 속성이다. 물을 물이게끔 해 주는 속성은 그 분자구조인 H2O이기 때문에 H2O의 분자구조를 갖는다는 점이 어떤 것을 물이게끔 해 주는 본질이다. 금의 본질은 원자번호 79인 원소라는 점이고, 또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의 본질은 세 변으로 이루어진 닫힌 다각형이라는 점이다. [주석: 이러한 본질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2,400년 전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전통으로서, 만물이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본질이 없이 공空하다는 불교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체의 본질은 외연外延(extension, 공간적 부피)이고 마음의 본질은 사고思考(thinking)이다. 공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으면 물질적 존재자가 아니고, 또 생각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니다. 먼저 물리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물질적인 것으로서 공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반대로, 공간적 부피를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물질적이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없다. 데카르트의 물체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이와 같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물체는 공간적 부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쪼갤 수 있다는 점도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모든 물체는 원칙적으로 나눌 수 있다(divisible). 만약 물리적으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궁극의 입자가 발견된다고 해도 그것은 최소한 수학적으로는 나눌 수 있다
– 예를 들어 그 입자의 크기를 2로 나누면 반으로 쪼개는 셈이고 3으로 나누면 셋으로 나누는 셈이다.
한편 마음의 본질은 생각함이다. 어떤 주어진 존재자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함이란 논리적 사고와 같은 고차원의 인지기능만을 지칭하지 않고 마음의 모든 작용을 포함한다. 그는 감각작용, 감정, 의지, 기억 등과 같은 마음의 모든 작용을 생각함(thinking)이라고 불렀다. [주석: 데카르트가 마음이 실체로서 존재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본 것인지 아니면 생각함이라는 본질 그 자체가 마음이라는 실체도 되는 것이라고 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마음이 결코 공간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고 보았는데, 이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한글을 발명한 분은 세종대왕이시다.’라고 생각할 때 이 생각을 공간적으로 (예를 들어, 반으로) 나눈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 이야기다. 또,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미국경제성장률 예상치보다 높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면 그 희망을 어떻게 공간적으로 나눌 수 있겠는가. 통증이나 간지러움이라는 감각, 그리고 사랑하다는 마음, 우울하다는 느낌, 질투 등의 감정도 공간적으로 쪼갤 수 없다. 여기서 데카르트 철학의 중대한 결론 하나가 도출된다: 공간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쪼갤 수 있기 때문에, 만약 원칙적으로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코 쪼개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은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게 된다.
데카르트는 마음과 물체가 각각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본질이 서로 필연적으로 정반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은 생각하지만 결코 외연이 없고 (다시 말해, 공간적 부피가 없어서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고), 반면에 물체는 외연은 있지만 결코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석: 데카르트는 컴퓨터나 뇌와 같이 공간속에 존재하는 물체는 사고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마음(그는 영혼과 마음을 동일시했다)이나 천사 그리고 신神과 같이 순수하게 영적靈的인 존재자만 사고가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이렇게 물체와는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물질적 바탕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결국 철학적으로 넘지 못할 벽에 부딪히게 된다.
데카르트의 마음은 이 세계의 아무 것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한국불교계 일부에서 무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실은 데카르트의 마음과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야말로 나를 진정한 나이게끔 해 주는 바로 그것이라고 보는 입장인데, 데카르트도 나를 ‘생각하는 존재자(thinking thing)’로서 이해하며 나란 다름 아닌 나의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참마음이 나를 나이게끔 즉 참나이게끔 해 주며, 이 참마음은 나의 물질적 바탕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몸뚱이와 그 속의 축축한 뇌와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공간속에 존재하는 물체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그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토록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는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다는 난제에 직면하게 되고 만다.
데카르트 생존 당시 이미 보헤미아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서신으로 데카르트에게 마음과 물체가 그토록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인과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마음은 생각함이 본질이지만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데,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공간속에 존재하는 물체를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오른손을 들기를 원한다고 해도 공간속에 없는 마음이 어떻게 공간속으로 들어와 오른손이 올라가게 만들 수 있는가?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문제가 된다. 내 손에 큰 상처가 나서 무척 아플 때도 공간속에 있는 내 몸의 변화가 어떻게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 전달될 수 있는가? 데카르트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런저런 논증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지만 어느 시도도 신통치 못했고, 결국 그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시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데카르트의 견해를 따르는 그 어느 학자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몸을 움직이며 우리의 의지를 주변 환경에 투사하여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을 변화시켜 우리 삶에 더 잘 맞도록 바꾸어 왔다. 이런 과정이 우리가 삶과 세계에 임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인류는 이런 면에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어 왔다. 그런데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 데카르트식의 영혼으로서의 마음과 한국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신비한 아뜨만과 같은 참마음은 그 속성상 공간속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공간속에 존재하는 이 물리세계에 들어올 수조차 없다. 따라서 외연이 없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으로는 지금까지의 인류역사가 보여준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자연에 성공적으로 개입해 온 현상을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실체로서의 마음 또는 참마음이 우리의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마음은 없다.
현대 영미英美권의 심리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드라마틱한 질문으로 위의 요점을 부각시킨다: ‘존재세계에서 마음을 모두 제거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물리적인 이 자연세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들은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지금까지 뇌의 작용을 비롯한 모든 물리현상은 공간속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의 작용과는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마음의 존재여부와는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마음이나 한국불교 일각에서 말하는 참마음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는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그 존재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마음 또는 참마음은 우리 세계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본고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서양종교에서 전능하다고 말하는 신神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간단히 논하겠다. 그들의 신이 있다면 전적으로 정신적이고 영적靈的인 존재일 텐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고 한정된 영역인 물리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데카르트의 마음과 같이 신도 공간을 초월해서(?) 공간 밖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마음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신도 이 물리세계의 변화와 움직임에 인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공간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이 공간 속에만 존재하는 이 물리세계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치 때문에 그렇다. 결국 서양종교의 신은 비를 내리거나 천둥 번개를 일으킬 수 없다. 서양인들의 전통적 상식과 일치하는 데카르트의 철학 체계를 따르자면 그렇다.
정말 마음이 없을까?
지금까지 ‘마음은 없다.’라고 몇 번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로 본질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고, 또 한국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참마음이 없다는 뜻이지, 실체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심리상태들의 존재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붓다가 가르친 오온五蘊에서 네 가지 심리상태를 언급했는데, 이 네 종류의 다발들은 실체라기보다는 심리상태(mental states) 또는 심리현상(mental phenomena)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현대 신경과학이나 생리학 그리고 철학은 실체로서의 마음은 인정하지 않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물리현상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며 생멸하는 의식 또는 심리상태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그 속성을 연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마음은 없다고 해도 현상現像(phenomenon) 또는 가假(provisional)로서의 심리상태 또는 심리현상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에서 벗어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경직된’ 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물리현상에 의존하며 변화하는 심리상태 또는 심리현상으로서의 마음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에세이에서 이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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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습니다. 경에는 없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중생의 안목으로 존재로 볼때는 없다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것으로 생각하지만 불법에서의
없다 즉 無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 입니다. 있다고 하는 有는 법으로 있다는것이지 존재로 있다는 의미가 아님니다.
이와같이 불법을 공부함에 있어서 有,無를 바르게 아는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카르트는 "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즉 생각하는 "나" 는 있다고 본것이지만 , 생각하는 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마음을 이렇게 물체와는 정반대의 본질을 가지고 물질적 바탕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결국 철학적으로 넘지 못할 벽에 부딪히게 된다.'
'한국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신비한 아뜨만과 같은 참마음은 그 속성상 공간 속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코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이 물리 세계에 들어올 수조차 없다.'
데카르트의 한계를 보여주고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참마음을 데카르트 방식으로 엮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한국 불교에서 참마음의 명칭을 공성의 에너지 정도로 바꾸어서 말했다면 학자들의 의견은 또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1.[ 지금까지 ‘마음은 없다.’라고 몇 번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로 본질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고,..] 본문을 요약하면 이분께서 마음이 실체가 없다는 것이 '마음은 육체(물질)와 상호 의존한다' 이므로 육체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 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마음에 실체가 없다란 말이
과연 이런 뜻일까요?
저분이 물질(육체)과 정신(마음)이
연결되어 있어 있으므로
정신(마음)이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원론 데카르트식을 넘어
불교의 실체가 없다 란 말과
살짝 접목한 평범한 설명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이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자체에 대한 설명으로써,
12처 18계 오온이라는 마음이
연기적관계 이므로
실체가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죠.
즉, 안처(안계)은 색처(색계), 이는 성, 비는 향,
설은 미, 신은 촉, 의는 법,
색은 수, 수는 상, 상은 행, 행은 식
이라는 조건으로 일어난다.
혹은 12처를 조건으로 18계가 일어나고
18계를 조건으로 오온이 일어난다. 등등
을 설명하는 말이죠
@노랑 그런데 우리는 이 연기적관계를
알지 못하므로 마음이 실제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이 실제한다고 믿고 있지요.
즉 마음이 실체가 없음을 모르는 거지요.
2. [본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인 데카르트식의 영혼으로서의 마음과 한국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신비한 아뜨만과 같은 참마음은 ..] 한국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참마음을 아트만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을까?
초기불교를 전공하신 몇분의 스님,
그리고 또 재가자 몇분들이
한국불교의 스님들이
'참나, 참마음,본래면목' 으로 설법했다고
아트만적 사고라고 통렬히
비판하는걸 본적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승불교를 까기 위해위한 것인데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것입니다.
@노랑 <잡아함경 785> <M117>에는
세간에서 있다고 하는 것은 있다고 말하고
없다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게
정견이라고 합니다.
또 출세간에서는
있다 없다를 논하는 것은
유무중도를 모르는거라고 질타하면서
중도(무아)를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지요.
이렇게 초기경에서는
정견에 대해 두가지 관점으로
분명히 설명하고 있어요.
한편 '참나' '본래면목' 란 무슨말일까요?
'깨달은 나, 부처를 이룬 나' 로써
수행을 통해 각을 이루었다는 세간의
지극히 평범한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세간에서 회자되는
정견으로 평범한 말일인데
아트만이라고 비판해야 할까요?
@노랑 만약 이말이 비판 받는다면
부처님께서 유언하신
'나를 의지하여 수행하라는 자등명'
의 '나'도 비판해야 할것 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나'는 세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나'이므로
이 나를 아트만이라고
비판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초기경 전공자들 혹은 재가자 몇분!
어떨때 아트만이라고
비판해야 하는지 구분을 못하고
참나라고 했다고
한국불교 대승불교를 함부로 비판하는데
비판하기전에 <잡아함경 785> <M117>
초기경전을 잘 살펴봐야 할것입니다.
불교에서 마음은 물질에 묶여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생의 본질이며
물질에서 마음을 해방(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라고 봅니다
마음이건 물질이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일체는 상호작용함으로 존재합니다. 돌맹이도 상호작용이 있기에 돌맹이로 존재하는것이지 상호작용이 없는 환경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재 양자역학이 발견한 최신 내용입니다. 즉 조건지어져 있기에 존재하는것이지 조건지어짐 없이도 존재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물론 조건지어지지 않은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라 이름붙일수가 없는것.
여래는 사후 존재 합니까라는 질문에 무기하신 이유입니다.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참이 아니라는 뜻이죠...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죠...
없다는것이 불교의 근본이면 ,,, 불교도 없고 나도 너도 없고, 그럼 불교는 없는 종교?
스님도없고, 교리도없고, 게시판도 없고,
아니요, 제일 많은게 불교요. 불교는 모든게 있는종교. 저는 그리 해석 합니다.
복잡하게 골아프게 해석 할 필요가 없어요.
원글 내용은 좋군요.
마음이 물질을 의존해서 생긴다고 하는데 대승에서 말하는 참나, 진면목은 그런 현상적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죠.
막말로 그 물질이라는 것도 어디서 어떻게 왜 생기는 것인지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빅뱅이 왜 일어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로티누스는 그것을 一者라고 보았습니다. 그 일자는 신이 되고 신은 영혼을 내고 영혼은 물질을 낸다고 말입니다.
일자, 신, 영혼 등은 물질과 의존해서 일어나는 마음을 초월한 것으로서 마음으로는 지각하지 못한다고 했지요.
일자는 존재라고도 존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초월자라고 했습니다.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얘깁니다.
물리학은 인간의 학문입니다. 물리학의 견해로써는 열반을 이룰수는 없다고 봅니다.
과학자들이 맣하는 심리학 역시 아직 인간의 학문일뿐입니다. 그것으로도 열반을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열반을 모르는 이들의 학문이기에 그렇습니다/
열반 그것은 부처님의 경지요, 우리 중생들도 함께 알게하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열반 그것이 마음입니다. 순수마음이지요.
그것을 잊은 우리중생은 순수하지 못한 선악의 모든 번뇌의 마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사량분별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어찌 분별할 것입니까.
분별하는 그 차체가 마음입니다. 다만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순수하게 돌이키자는 것이지요..
금강심론을 저술하신분은 금타대화상님이고 1945년경 저술하였는데
삼륜단공송이라는 게송에 의하면 소승인들이 석공하는 버릇 습성으로
과학자로 태어나 사물의 본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기록하엿읍니다
그결과 분자-원자-원자핵과 전자와 양자와 중성자 쿼크등 미립자세계가
밝혀졌는데 금타대화상님께서는 물질의 본성은 린허진이라 하였고
구사론을 근거로 말슴하였으며 우리인간들은 육안의 실성을 회복하여
초일월의 금색광명 세계를 견증하라 하셨고 중생들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하셨읍니다
청화스님에 의하여 세상에 소개된
보리방편문을 잘 공부하면
물질세계는 천백억화신의 다양한 존재로서
원만보신 초일월의 광명이 나타난 현상이며
원만보신 광명은 바로 청정법신 비로자나 법신불=본성=광대무변한 허공과 같은 광대무변성
법신임을 밝혀주고 있읍니다
청정법신을 공성
원만보신을 광명
천백억화신 만물을 화신
삼신일불
즉 일체를 부처님의 삼신의 나타남이라
관찰하라
하엿고
무수중생들의 무상제행을
광명과 공성의 나타남이라 사실!
본질로서
공
성
상
일여의
일합상을
총관하라 하셨고
그러므로
보리방편문은
화엄종이라 하였으며
마음을 근본 종지로
공-섭율의계
성-광명성-섭선법계
상-물거품-섭중생계
보조국사님께서도
병이 비어 있지만
빈병이 없다고 하면 안된다 하였읍니다
금강심론을 설계하면
화엄경을 설계하면
금강경을 설계하면
반야심경을 설계하면
기하학적 도형
정토만다라
사파세계즉
극락세계라는
결론이 금강심론에 있고
육조혜능대사의
자성삼신불에 귀의하라
참고한다면
두대사님의 법이
하나임을 알수 있다 생각합니다
법성게의 첫구절
법성원융무이상-물질과 우주-법 -형이하학-현상-파도
마음의 본성품은 하나라는것 둘이 아니라는것 -형이상학-불성-물
현상과 불성은 둘이 아닌 하나-화엄경의 결론
삼신사지에 만덕을 구비한 일대인의 자재경!
실천하려면 십지-법운지-등각-묘각
십방삼세에서
불국 정토 아미타불 의보와 정보
건설함이-사사무애법계
불법이라
공부하였읍니다
불법문명을
미국에서
일으킬수 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