广西航空学校 技术科 全体机械士 合影-sina.com.cn에서 인용
<광서항공학교 기술과技术科 조종사> 임도현 (앞줄 중앙)
이 사진은 임씨의 조카 임정범씨가 중국 류저우신문사 편집장을 통해 입수한 사진이다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2008.02.28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장제스(蔣介石), 윤봉길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여온 항일투사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제주대 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교사인 임정범(54) 씨는 지난달 국가보훈처에 1909년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에서 출생한 뒤 일본과 중국을 누비며 항일운동을 한 백부 임도현(任道賢) 씨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달라고 2번째로 신청서를 제출했다.
임도현씨는 1931년 일본 도쿄(東京) 인근의 다치카와(立川)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훈련을 받다 동료 7명을 포섭해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탈출한 뒤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柳州)육군항공학교, 육.해군대학교 등에서 차례로 수학한 뒤 중위로 임관해 쓰촨(四川)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를 보좌하며 실전에 참가했던 인물이다.
임 중위는 만주의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오른쪽 눈썹 위 두개골이 부서지는 큰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돼 일본에서 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으나 1935년 비행 탈출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대신 가마가제 특공대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다시 다치카와비행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후 머리 부상 후유증을 핑계로 비행 대기자 명단에 올려 놓고 있다가 다시 탈출해 고향인 제주도에 들어와 숨어 살다가 1936년 5월 검거돼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에서 무고와 공갈 혐의로 기소돼 10월형을 선고 받아 목표형무소에서 1937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는 특히 1932년 상하이에서 벌이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으며 고향 제주에서도 중국으로 빠져나가려다 2차례나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마을에서 공출과 징병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해방을 맞아 학교 건립 등의 계몽운동도 벌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0년 41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이런 내용은 임 중위의 어머니가 4.3사건 당시 소개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탈 때 겨우 건져낸 조그만 장롱속에 보관됐던 자필이력서에서 발견했다.
조카 임씨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총독부의 재판자료를 자료를 찾아내 2005년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으나 자료의 부족 등을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료 입수를 위해 노력하다 최근 백부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일본 경시청의 비밀문서를 찾아낸 데 이어 우연히 알게 된 중국 류저우신문사 편집장을 통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류저우항공학교에 있을 당시에 촬영한 백부의 사진을 추가로 확보해 재신청하게 됐다.
"항일운동을 하는 데 장애가 된다"며 결혼을 하지 않았던 시아주버니인 임 중위를 모시고 살았던 이수성(80) 할머니는 "결혼해서 갔더니 시아주버니께서 장제스와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많이 보여 줬고 실제로 장제스가 책과 약 등을 수차례 보내오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시아주버니가 일본에서 비행기를 몰고 제주도를 거쳐 탈출하면서 집 근처에 떨어뜨려 놓았던 보따리에서 찾은 옷가지와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용의 편지들도 있었고 집에는 책도 아주 많았는데 4.3사건 때 모두 불타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랫 마을에 살며 생전의 임 중위 모습을 많이 보았다는 외사촌 조카 김옥희(79.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할머니는 "외삼촌의 머리 몇 군데가 전기고문 때문에 벗겨져 있던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외삼촌은 집에만 오면 아버지와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조카 임씨는 "4.3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불타는 바람에 장제스와 함께 찍은 사진은 물론 일본과 중국의 여러 학교 수료증 등의 자료가 모두 재가 되어 버렸고 이제 당시를 증언해 줄 어르신들도 대부분 돌아가셔서 입증 자료를 찾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다"며 "이제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조사를 해 독립유공자임을 증명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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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리일보 2009.06.15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세요"
故 임도현씨 가족들 보훈처와 5년째 싸움
▲강현욱 제주대 의과대학 교수팀이 임도현씨 묘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최태경기자
최근 세번째 유보처분 뒤 행정소송 돌입
어제 객관적 증거 찾기 위해 유해 발굴
"있는 사실만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대정중 교사인 임정범(54)씨 가족들이 14일 백부 임도현씨 유해에 대한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임도현씨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알리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임정범씨 가족들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한 백부 임도현씨에 대해 지난 2005년부터 최근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지만 '객관적 거증 자료 미비'와 '활동 내용이 독립활동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잇따라 거절당했다.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에서 1909년 출생한 임도현씨의 항일운동에 대한 기록은 1940년 고향으로 돌아온 뒤 남긴
'자필이력서'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931년 일본 도쿄 다치카와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훈련을 받다 동료 7명을 포섭,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이어 그는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육군항공학교 등에서 수학한 뒤 중국군 중위로 임관해 쓰촨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 부대에서 장제스를 보좌하며 실전에 참가했다.
이후 소련·만주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1936년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그의 비행학교 탈출 사실이 드러나게 됐다. 그는 다시 다치카와비행학교로 돌아가는 것으로 사면받았고, 이후 탈출 기회만을 엿보다 1937년 제주로 탈출했다. 하지만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통을 겪게 된다.
그의 자필이력서는 제주4·3사건 당시 마을 전체가 불에 탈 때 건져낸 장롱 속에서 발견됐고, 그 일본 탈출 내용은 조카 임정범씨가 국가기록원에서 얻는 '1936년 5월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 재판기록'이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서훈 신청은 잇따라 거절됐다. 이에 임정범씨 가족들은 보훈처를 상대로 행정소송에 나서게 됐고 현재 진행중이다. 특히 임씨 가족들은 임도현씨가 '전쟁당시 우측눈썹 윗부분에 총상을 당했다'는 자필이력서의 내용 규명을 위해 14일 조천읍 와흘리에 있는 그의 묘에서 유해를 발굴해 제주대 강현욱 박사에게 검증을 의뢰했다. 이번 검증에선 총상 흔적이 남아있는지와 유족들과 DNA 대조 작업 등이 진행된다.
임정범씨는 "지난 7년 동안 백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국내외의 자료를 찾기 위해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면서 "하지만 보훈처는 일관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심사잣대를 들이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태경 기자 tkchoi@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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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0.08.14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국가는 팔짱낀 채 후손이 증거 입증하라니…”
백부 항일운동 행적 추적 임정범씨 항변
‘후손들이 어디 한 번 입증해 보세요.’
제주에 사는 임정범(55·성산고 교사)씨는 광복절만 다가오면 속이 터진다. 임씨는 백부인 임도현씨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행적을 8년째 나홀로 추적 중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찾아낸 백부의 자료들을 제시하며 2005년부터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 독립유공 공훈 심사를 요청했지만 ‘독립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국가보훈처 통보에 허탈감에 빠져 있다.
임씨에 따르면 백부는 1931년 일본으로 가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한 뒤, 훈련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 중국군 장교로 임관해 중·일 전쟁에 참전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임씨는 제주 4·3사건 당시 불타 버린 집에서 할머니가 건져낸 이 같은 행적 등을 담은 백부의 자필기록과 비행기로 일본을 탈출했던 기록이 담긴 1936년 조선총독부 재판기록 등을 근거로 2005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공훈심사를 신청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가신 백부는 직계 가족이 없어 누군가 국가의 보훈 혜택을 받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후손으로서 백부의 명예를 찾아 드린다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증거자료 미비’를 이유로 1차 심사에서 탈락했다. 이후 임씨는 백부가 남긴 자필 기록 등을 근거로 나홀로 기나긴 일제 강점기 당시 백부의 행적 추적과 자료 찾기에 매달렸다.
일본을 찾아가는 등 노력 끝에 2008년 고향으로 돌아온 백부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일본 경찰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는 내용의 1938년 일본 경시청 비밀문서를 찾아냈다. 2006년에는 중국도 직접 찾아가 백부가 일본 탈출 후 중국에서 다녔다는 비행학교 행적 등을 추적했지만 낯선 땅 중국에서 나홀로 자료를 찾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2007년 임씨는 중국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류저우 항공항교에서 근무하던 백부로 추정되는 당시 사진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후손들이 어느 정도 근거를 제시하면 추가 자료 발굴에 백방으로 나서야 하는 게 국가의 기본 책무가 아닌가요.” 백부의 당시 행적 등을 알고 있는 동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 조사마저 국가는 외면했다고 한다. 모든 입증 책임은 철저하게 후손인 임씨의 몫이었다.
임씨는 “독립유공자 선정은 객관적인 근거자료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입증 책임을 유족 등 후손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국가가 기본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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