欽定滿洲源流考卷四(흠정만주원류고 권4)
部族 부족
新羅(一作斯盧 一作新盧雞林附) 신라(사로 또는 신로 계림부로 쓴다)
三國(삼국시대)
三國志魏書 辰韓(另條見前)十二國 有斯盧國 通典 新羅國 魏時新盧國 其先本辰韓 辰韓始有六國 稍分為十二 新羅其一也 魏将毌丘儉 討髙麗破之 髙麗王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
『삼국지 위서三國志魏書』에는 “진한辰韓 (다른 조에서 이미 보았음) 12국에 사로국이 있다.”고 되어 있다. 『통전通典』에는 “신라국은 위魏라때 신로국新盧國으로 기록되었고,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 이다.
진한辰韓 은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차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 신라는 그 중의 하나이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고구려왕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通考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亦在 髙麗東南 兼有 漢時 樂浪郡之地)初曰新盧 或曰新羅 東濵大海 魏毌丘儉破髙麗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 故其人雜有華夏 髙麗百濟之屬 兼有沃沮 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其國
『통고通考』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또한 고구려 동남에 있고, 한나라 때의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있다), 초기에 신로 또는 신라로 불렀다. 동쪽 끝은 대해이다. 위魏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났다. 그 뒤에 옛나라로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화하 華夏 고구려 백제 사람이 섞여 있다.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인데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그나라 왕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晉(진대)
前秦錄 新羅 在百濟東 符堅建元十六年 符洛反 遣使徴兵 於百濟新羅等國 並不從 秦書 符堅建元十八年 新羅國王 樓寒(按 蒙古語 謂 龍曰婁 寒字 當即 汗音之訛)遣使朝獻
通志 新羅國 在百濟東南 五百餘里 東濵大海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遂王 其地其國 初附屬于百濟 後因百濟伐髙麗 人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 伽羅 任那 諸國滅之 其西北界 出髙麗之間 先是其國小 不能自通 符堅時 其王樓寒 遣使衞頭朝貢 堅曰卿言 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對曰 亦猶 中國時代變革 名號改易今焉 得同
『전진록前秦錄』에는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부견符堅 건원建元 16년 부락符洛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신을 보내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모두 따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진서秦書』에는 “부견 건원 18년 신라국왕 루한樓寒 (살피건대 몽골어로 용龍을 누婁라 하는데 한寒은 곧 칸汗의 발음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통지通志』에는 “신라국은 백제 동남 5백여리에 있다. 동쪽끝은 대해이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왕이 되었다. 그 영토와 나라는 초기에 백제에 부속되었다. 뒤에 백제가 고구려를 칠 때 사람들이 노역을 참지 못해 서로 가솔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와서 드디어 강성해지자, 가라伽羅 임나 任那 등 여러 나라를 쳐서 없앴다.
그 서북 경계는 고구려 사이로 튀어 나왔다. 일찍이 그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진나라와} 통할 수 없었다. 부견符堅때에 그 왕 누한樓寒이 사신 위두衞頭를 보내 조공을 하니, 부견이 말하길 “그대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어찌된 일이오?” {위두가} “중국 또한 시대에 따라 변혁이 일어나며 나라와 율령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北史 百濟居漢時 樂浪地 或稱 魏將 毌丘儉 討髙麗破之 奔 沃沮 其後 復歸故國 有留者 遂為新羅 亦曰斯盧 其王本百濟人 自海入新羅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髙麗 不堪戎役 民相率歸之 遂强盛 傳世三十 至真平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한漢나라 때의 낙랑땅에 있다.. 혹은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왕이} 옥저로 날아났는데 그 후 옛 나라에 돌아왔으나, 남은 사람들은 신라 또는 사로를 세웠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백제에 부용되었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부역을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서로 이끌고 오니 점차 강성해졌다. 30대를 전하여 <진평真平>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계속)
唐會要 新羅者 本弁韓之地 其先出髙麗 魏破髙麗 其衆保沃沮 後歸故國 其留者號新羅 國多金朴兩姓異姓不為婚 永徽元年 王金真徳 大破百濟 遣使金法敏來朝 五年 真徳卒 髙宗為舉哀于永光門 使太常丞張文收弔祭之 贈開府儀同三司 仍賜綾綵三百段
「당회요」에는 “신라는 본래 변한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쳐서 이기자 그 무리들은 옥저沃沮로 가서 보존하였다. 뒤에 옛 나라로 돌아갔다. 그 곳에 남은 사람들을 신라로 불렀다. 나라에는 김金 박朴 두 성씨가 많고 다른 성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휘永徽 원년 그 왕 김진덕金真徳이 백제를 크게 쳐서 이겼다.
----만주원류고가 새롭게 번역되고 기존의 역사관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중국 사서들의 대부분이 한족들에의해 중화사상에 기반을 둔 역사서였다면
청나라 시대때 만들어진 만주원류고는 동이족들의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서...
여러분들은 어떤것에 중점을 두고 역사를 바라보실겁니까?
전세계 한민족 커뮤니티의 중심 '한열사'
첫댓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 여부를 알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