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줄 것이 더 많은 것처럼 보기 일쑵니다. 나 혼자 일을 하려면 많이 움직여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 가지씩만 나를 도와준다면, 나의 모습은 금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형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고, 그렇게 바라보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일은 기계 혼자서 결코 하지 못합니다. 이 물건이 저기로 옮겨지더라도 그것은 사람의 의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기계를 사용하면 사람이 맨손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기계 혼자서는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전례생활에는 첫 번째로 미사에 대한 자세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중한 전례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것이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듯이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거나 현재상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찾을 방법입니다.
예전 조선일보(1998. 11. 17. 26면)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오억근’이라는 분이 ’광주 과학기술원 내에 외국인 전용식당을 건설하는데 써 달라며 1억 5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기사로 난 선한 일 이전에는 실험연구비 지원으로 쓰라며 2억 5천만원을 지원했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3.1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떨까?
그것을 가장 먼저 생각해보면 우리 삶의 자세를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여러분들이 억지로 지켜나가실 것이 아니라면, 혹시라도 다른 자세를 가져달라고 부탁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마 없지 않을까 합니다. 미사는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업적을 우리가 기억하는 잔치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개신교의 예식과 비교하여 천주교의 예식에 대하여 형식적이라고 비판하고 낮추어 보려는 생각들이 강하기는 합니다만, 그것 역시도 우리의 것에 대한 자긍심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미사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인간에게 본보기를 보이신 일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보이신 본보기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가장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들이 인간의 일에 대해서조차 완벽하게 알고 시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해 나가면서 그것이 터득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하물며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고 하는 경우야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2 고해성사를 비롯한 다른 성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좋은 열매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맛봐야 기분이 좋은 것이고, 자녀가 혼인하고 잘 사는지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갖는 바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 견진성사입니다만, 이 시간을 통해서 듣고 보고 다짐한 것들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는데는 다른 성사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고해성사에 빗대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 천주교 신자들은 주일에 미사에 빠지면 커다란 통속에 들어가야 한다며.....", "나는 고해성사 하기 싫어서 미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역시 우스개 소리이기야 하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갖는 삶의 자세는 ’부담감’ 하나뿐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의 기쁨을 이야기하라면 아마도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며, 그렇게 된다면 잘못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자세입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불과할 뿐 그대로 실행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3.2.1 기도의 몇 가지 형태 --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우리는 많은 경우 기도합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으니, 내 생각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서 누구에게나 권장할 만한 일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과연 누구를 기억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우리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한 가지 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 한풀이를 기억합니다. 혹시라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조금 넓어진다면 내 가족과 내 친척과 친지들만을 위해서 말해놓고 ‘나는 기도 다했다’고 하지는 않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바꾸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가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에 우리가 머무는 세상의 모습도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4. 전례이외의 생활 -- 성경을 함께 읽기 운동 전개.
제가 지난 번에 개신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렸던 사항의 연장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모습을 비참하게 보면 볼수록 그 애석함은 한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비결은 우리 스스로를 행복하게 보는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 신자 여러분들이 성경 공부에도 시간을 내셔서 함께 할 수 있기를 권장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집에 고이 모셔 놓는다고 해서 싹이 트거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뜻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야만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나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