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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2일 오전 10시경 푸에블로호 함으로 접근하는
북한 해군 함정을 발견하였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마양도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8마일 거리에서 함쪽으로 오는 배 한 척을 발견하였습니다.
함장은 쌍안경으로 북한 군함 한 척을 보았는데 25노트로 우측으로
북한 함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USS Pueblo 호 함정 근처를 지나갔던 북한 해군 SO-1 구잠함
부처 함장은 쌍안경으로 관찰하고선 그 배들이 러시아제
트롤선이라고 확인하였습니다.
1968년 1월 23일 해저 등고선을 체크해보니 육지에서 약 25마일
정도의 거리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Gene Lacy
부처 함장은 배를 목격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
그러나 5마일 정도로 다가와 신속하게 푸에블로호를 향해
접근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부처 함장은 조타실로 내려가 푸에블로호가 국제 수역 내에
위치했는가를 확인 점검하였다.
푸에블로호 함의 나포 당시의 위치와 북한 해군의
SO-1 구잠함의 위치
푸에블로호는 9마일 떨어진 해상에 약간 표류하는 상태에서
정선하고 있었다.
길이는 130피트, 폭 21피트, 최대속도 48노트, 승함 인원은
장교 3명에 수병 16명이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엔진을 작동시키고 벨 소리에 응답할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북한 SO-1 급은 원을 그리며 '국적이 어딘가?'라는 내용의
국제 신호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부처 함장은 즉시 푸에블로호 함정의 배 신호수에게 미국 깃발을
올리게 했습니다.
세 척의 고속 어뢰정, 함수 쪽으로 거리 10,000야드에서 접근! "
이라고 보고를 해왔습니다.
거리는 약 500야드 이내로 좁혀왔기 때문에 북한 승조원들의
모습을 육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북한 해군에서는 두 번째로 신호 깃발을 올렸는데 내용은
"정선하지 않으면 사격한다!" 는 것이었다.
이미 푸에블로호 함은 정선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부처 함장은 거리와 방위를 확인 15.8 마일이었고
영해 12마일에서 3.8마일이나 밖이었습니다.
푸에블로호 신호수에게 국제 규정에 맞는 신호 깃발을
올리도록 지시 .'우리는 국제 수역에 위치해 있다'
세 척의 어뢰정이 1마일 이내로 전속력으로 계속 접근하여
SO-1 구잠정과 합세하려고 하였습니다.
구잠정은 함 주위를 멤돌며, 기관포에 사수들은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부처 함장은 진 레이시 사관에게 "필요할 경우 푸에블로호를
신속히 침몰 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신속히는 안됩니다. 엔진실에 물을 채우는 데 약 2시간
칸막이 벽을 해체하지 않으면 배는 가라앉지 않습니다.
수심이 너무 얕아 북한군이 잠수부들을 동원 푸에블로호의
내용물들을 건져올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부처 함장은 전면! 속도 1/3! 항법사!, 육지를 벗어날
최선의 코스를 선택하라!" 고 지시했습니다.
해양탐사원들에게도 "모든 해양 탐사활동은 연기한다!"고
소리쳤습니다.
비상벨 소리를 듣고, 엔진실 근무자들이 디젤엔진에 기어를 넣고
끄르렁 소리를 내었고 북한 어뢰정이 선미에 대려고 하였으나
푸에블로호가 속도를 올려서 항진하자 다시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넓은 바다로 나가갔고 그 순간 북한 해군 함정들이
함수를 가로지르며 힘겨루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푸에블로호를 계속 항진시켜 북한 함정들을 따돌리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도 고려했다.
함장은 모든 비밀 문건을 파괴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
북한 함정을 향해서는 우리는 이 수역을 떠날 것임' 이라는
신호기를 올려서 북한 함정의 추격을 멈추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P-4 어뢰정들은 푸에블로호 함을 계속 따라왔으며
두 척은 후미에 가까이 달라붙었고,
다른 두 척은 함수 주위 10야드 거리에서 가로지르며 질주,
분명히 푸에블로호 퇴로를 차단하려는 뜻으로 보았다.
구잠함도 계속 따라와 가담 푸에블로호 함정은 북한 함정
6척과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12노트의 푸에블로호 함정을 북한 함정들이 따라잡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SO-1 구잠함은 정선 안 하면 사격함!'
부처 함장은 북한 해군의 신호기를 무시하며 조타수에게 "
우측으로 10도!"라고 소리쳤습니다.
USS Pueblo호 항해 모습
그러나 북한 해군의 SO-1 구잠함은 푸에블로호 함정의 기동을 막으며
배의 외곽으로 우회 사격하기가 쉽게 위치시켰습니다.
이에 부처 함장은 조타수에게 "10도를 더 틀어라!" 라고
소리쳤습니다.
순간에, 북한 해군 함정들은 57mm 자동기관포 사격을
가해왔습니다.
푸에블로호 함에 북한 해군의 포 사격으로 손상된 선체부분
푸에블로호 선체 내부 총탄흔 (Source : Flickr)
탄환들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레이다 전파탑에서 "탁! 탁!"
소리를 내며 터지었고, 파편 조각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갑판의 루사이트 방풍 스크린을 뚫고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철판과 플라스틱 조각들을 피하려고 갑판에 바짝 엎드렸지만,
조각들이 다리와 엉덩이를 때렸으며 산탄 하나가 함장의 직장을
지지듯 뚫고 들어와 무척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SO-1 구잠정에서 쏘는 기관포 사격은 파열 충격으로 기관총탄과
섞여서 연통을 두들기는 바람에 P-4 북한 어뢰정도 사격을 개시했다
북한 함정들의 일제사격은 5~6초 동안 계속된 듯 하였다,
푸에블로호 함의 함교가 부서져 버렸으며,
임무 수행을 위한 지침으로 부처 함장이 받았던 고위층의
브리핑 내용들까지 산산이 부숴버리고 말았습니다.
푸에블로호의 북한 해군 SO-1 구잠함과 P-4 어뢰정 4척들의
공격모습.
북한 P-4 어뢰정들의 공격이 멈춘 뒤에, 부처 함장은 성질을 참고
가급적 이성적으로 처신하려고 하였습니다.
"모든 비밀 문건과 장비에 대한 비상시 파괴를 실시하라!!
특수작전구역에 있는 해리스 대위에게도 이 말을 반드시 전하라!!"
"현재 다친 사람은 없나?"
모두 파편에 맞은 것을 보았고, 로빈은 목 부위 피가 흘렀고,
리치는 한쪽 다리에 파편을 맞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함장은 전투배치로 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고, 혀끝까지 나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기관총 2 정으로는 북한의 50mm 자동기관포를 대적할 수가 없었으며
기관총 사격을 가해 올 것이 분명했다고 합니다.
전투준비를 갖춰라!! 누구든지 상부갑판에 올라오지 말라!!
방향타는 완전 좌로, 전속력 전방으로 항진!!"
함장은 신호수 리치에게 지시해 더 넓은 바다로 속도를
올려 항진하였습니다.
머리 위헤서 MIG기가 굉음을 내며 또 한 번 위협 비행을 했는데,
항공기가 로켓을 발사했습니다.
MIG 기 조종사가 경고 사격 푸에블로호 앞 8마일 거리의
바다에서 폭발했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고 기밀 사항 문건들 넘어가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다.
함장은 기밀로 분류 된 문서와 기록장치들의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북한의 공격을 당하는 동안 일본 해군 보안 그룹과
무선으로 접촉했습니다.
손을 앞으로 묶여져 있게 하였고, 각 손목에 줄을 등으로 한바퀴 돌려
이어지게 묶어 꼼짝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버스를 타고 기차로 데려갔습니다. 목적지는 나중에
알게하려고 눈을 가린 것입니다.
버스에서 나와 눈을 가린 채 작은 오두막처럼 생긴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버스 한 차량으로 옮겨져 타기 위해 북한 군인들
사이 사이에 앉혀졌습니다. .
선원들은 1968 년 1 월 24 일, 평양 인근에 있는 복합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승무원들은 다음 목적지로 운송되기 전에 약 6 주 동안 외양간과
같았던 그곳에 사로 잡혀있었습니다.
거무스름한 벽돌과 목재 건물인 외양간같은 건물은 따뜻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소변, 대변 및 건초 냄새가 났습니다. 방마다 4~5명씩 나뉘었
수용되었습니다.
침대는 쌀겨 베개와 매트리스가 깔린 땅에서 2인치 떨어진
나무로 만든 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담요가 없었고 대부분의 침대는 승무원들에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내에서는 구타로 인한 소리, 비명, 두드리고 쿵쾅 거리는
소리로 끊임없이 울렸습니다.
북한의 포로 수용소 방의 모습
승무원들은 심문 고문으로 인해 부상을 당했습니다. 상처가
감염되어 마취제없이 수술이 시행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목욕도구를 가진 채 목욕탕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승무원들.)
외양간에 수용된 지 약 일주일 후, 처음으로 목욕을 할 수있었다.
한밤 중에 깨어 났을 때, 승무원들을 태우고 갔습니다.
머리는 아래로 향하고 새로 지급된 세면 도구와 용품은 한 손에 들고,
작은 비누, 비누 접시, 수건을 들고 있었습니다.
외양간 수용소 건물에서 청소를 하는 모습
유일한 청소 용품은 걸레, 차가운 물통, 쓸모없는 빗자루였다.
유머를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오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평양과 몇 마일 떨어진 수용소 시설 건물
6 주 후에 새 장소로 이사. 3 층 구조와 2 개의 기자 회견이
개최 되었던 복층 구조였습니다.
군인 중 한 명인 경비원은 별명이 "곰"이었다. 그 곰이
승무원을 때렸습니다.
구타를 똑같이 나누서 맞기 위한 의리를 발휘하기 위해 승무원들은
곰이 근무했을 때 문 옆 의자에서 교대로 차례를 바꾸어 앉았습니다.
경비대원이 발로 차는 모습 그림.
학대는 극심했다.오줌을 밤새 참아 방광이 터지기 직전의
고통을 겪었고 협박하는 경비원을 지나 걸어 다녀야만 했다.
총구를 들이대는 북한군 경비대원의 모습
승무원들을 때리고 학대 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의자를
고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AK-47 총구를 죄수의 얼굴에 올려 놓고 방아쇠를 당겨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청소하는 북한 소녀가 담배를 나눠주는 모습
갈매기라고 불리는 북한 담배는 갈매기 그림을 가지고있다.
그래서 그들은 담배를 피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 뇌염 백신 주사를 놓는 모습, 바늘을 교체하지 않고
소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주사하였음.
북한 선전 광고판을 보고 야유를 보내는 승무원들
승무원과 연단 뒤에서 숨어서 이야기를 하는 북한군 장교
나이 27 세로 중위로 보였던 북한군 장교 한 명이 때때로
승무원에게 미국에 대해 질문했었습니다.
그의 관심 분야는 와이키키 해변의 슈퍼마켓과 비키니 입은
소녀였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이 나에게 보여준 충성심이
대단히 컸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말해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철저히 독방에 갇혀 있게 되었다. 식판에 담겨 온 식사는
덮개도 없이 문지방에 밀쳐진 채로 감시당하고 있었다.
변소에 갈 때만 호위를 받으며 방을 나설 수 있었으며 하루 종일
테이블에 앉아 자백서를 작성해야 했다.
감시병이 정강이를 걷어차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다. 매를 피하려면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써 놓는 수밖에는 없었다.
승조원들을 구타하는 북한군 감시병들의 행위
감시병이 구둣발로 나를 차며, 혁대로 매질을 했기 때문에
나는 반쯤 의식을 잃고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매질을 낮에 두 번, 밤중에 한 번씩, 반복했기 때문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도 파열된 느낌에 고환이 터질 지경에 이르고,
앞니가 흔들리며 얼굴이 퉁퉁 부었다.
놈들은 내 얼굴이 망가지고 몸이 불구가 되는 것도 고통을 안겨
기절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같았다.
놈들이 나를 침대에 눕혀, 잠시 회복하도록 놓아둔 사이에
다른 방에서도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당했던 그 무시무시한 악목 같은 공포심이 다시 찾아왔다.
매를 맞을 때에는 간절한 기도와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의지로
이 야수놈들을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용케 견뎌냈다.
또 하나 내가 매질을 당할 때 놈들은 내 부하 중의 한명을
데려와 내가 매 맞는 꼴을 지켜보도록 한 것이었다.
부하들이 대담하고, 충성스럽게 모든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을
보고 나도 더 큰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부하들에게 희망도 못 주고, 도와줄수도 없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찢어졌다.
달변과 코흘리개가 공산당놈들이 작성한 새로운 자백서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CIA 요원이었음을 자백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그 자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놈들은 나를 발로 차고 내동댕이를 치더니
재판을 받고 처형될 것이라고 위협하고 떠났다.
나는 다시 자결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내 삶에 자부심을 느껴오던
나는 스스로 죽을 수는 없었다.
내가 스스로 죽어서 하늘나라로 간대도 놈들은 나를 용서치 않고
때려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살 충동이 계속될 만큼 심했던 그들의 구타가
마치 물흐르던 수도꼭지가 잠긴 것처럼 갑자기 멈췄다.
열흘 동안 매질하는 소리, 신음들로 꽉 찾던 감옥이 갑자기 조용해진까
바람 소리만 슬프레 윙윙거렸다.
12월 19일 아침, 악마의 탈을 벗고 아주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놈이 우리가 겪어온 고통에 관해 사과성 발언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다.
승조원들을 미국으로 되돌아 오게 하기 위한 미북 판문점 회담 모습,
승조원들을 미국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협의를 하고자
판문점에서 협상장 테이블에 앉은 북한측 박청국 대표
"여러분들이 잘못을 후회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고치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니 지난일은 모두 잊고, 우리가 서로 인간적인 관계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식사와 운동, 여가 활동 등을 이전 상태로
되돌려주기로 했다.
성탄절에는 가족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국주의 호전광인
상관들과의 협상을 계속하고 있음을 통보한다."
놈은 그 말을 끝으로 박수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리둥절 하며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 안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부어오른
턱을 들고 놀란 모습을 보이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바로 하루 전만 해도 우리를 야만적으로 두둘겨 패며 욕설을
퍼부었던 그 놈들이 그것을 다 잊으라며 아양을 떤다.
나는 아니꼽게 웃음을 던지는 GG에게 한 방 날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놈들이 부드럽게 나오니, 힘을 길러 둘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의무군관과 간호사들이 찜질약을 눈에 상처에 대어주었고,
달걀을 부은 곳이나 멍이 든 눈두덩이에 대어주었다.
부하장교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지만 '지옥의 주간'을 겪은
뒤라서 말도 없고 사기는 극도로 저하된 상태였다.
12월 22일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고선 몸을 검사했는데,
의학적 성격의 검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내 몸의 은밀한 곳에 혹시 감춰놓은 비밀 문건이라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에 속옷과 새 군복을 주었다.
새 군복으로 갈아입은 승조원들이 모두 불려나온 것을 보고
심장 박동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재판을 하려는 걸까, 다른 수용소로 옮기려는 것일까?
아니면 석방을 준비하는 것일까?
어떤 상황이 벌이질지는 모르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전개될 것만은 확실했다.
이번 일은 미국이 무릎을 꿇고, 우리의 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죄를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여하튼, 놈이우리의 석방 조건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발표했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놈은 승조원 몇 명을 일으켜 세우더니 고국에 돌아가면 솔직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이것이 또 다른 계략일까? 나는 아니기를 바랬다.
마침내 우리는 호송 버스를 타고 평양 철도역으로 갔다. 역에는
열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특별 열차였는데 침대칸으로 깨끗한 침구에 이불도 준비되어
나는 너무 흥분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너무 느리게 달리는데다가 자주
멈춰 섰고 그 때마다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가 괜찮아지곤 했다.
동이 트자 기차는 완전 멈춰섰는데, 창문에 친 커튼 사이로
내다보았더니 사용하지 않는 한 지선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석방 절차가 09:30분 부터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30여분 동안
멈춰 서 있는 것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08:00 경에 열차에서 하차가 시작되었고
4대의 버스에 조심스럽게 나눠 탔다.
승조원들을 위한 석방 위원회의 캠패인 결의 문서
버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더니 뒤따라야할 3대의
버스가 안 보였다.
한 중령이 나를 버스에서 불러내어 통역관을 통해 말했다.
"내려와서 사망한 하지스 수병의 시체를 확인하라."
버스에서 내려 앰뷸런스 쪽으로 걸어갔더니 군의관들이 하얀
마스크를 쓰고 목제 관을 차 뒷문 쪽으로 끌어냈다.
놈들은 관 뚜껑을 열고 하지스의 시체를 덮었던 얇은 천 거즈를
옆으로 밀어냈다.
훌륭했던 내 부하를 나는 잠깐 쳐다보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듀안 하지스가 맞소."
나는 슬픔과 증오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섰다.
북한군 장교는 미국이 푸에블로호의 범죄 행위에 대해 사죄했다는
내용의 글을 20여명들의 승조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그런데 그 글의 전사복사된 마지막 두 줄이 조잡하지만 분명히
지워져있었다.
판문점 다리' 임을 알게 된 나는 매우 놀랐다. 약 150야드쯤 되어 보이는
그 다리에는 미군 복장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이제 거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1968. 12. 23. 승무원들 판문점 다리에서 UN측에 인계 중인 모습
판문점 운행 버스를 타고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승조원들
(얼굴에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이 주한미군 헬리콥터에 옮겨타는 모습
판문점으로 돌아와 준비된 주한미군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모습
승조원들이 판문점에서 타고온 헬기에서 내려 주한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모습
푸에블로호 부처 함장이 헬기에서 내려 주한미군 기지내로 안내되는 모습
주한미군 기지에 도착해 숙소로 옮겨지는 모습
승조원들이 주한미군 기지 내 병영 숙소 안에 들어선 모습
함장과 승조원들이 수송기를 타고 미 본토에 내린 모습.
Hodges 시신이 장례 행사장으로 옮겨지는 모습
Hodges 시신이 장례 행사장으로 옮겨져 고인의 애도를 표하는 모습
본국 기지에 도착한 푸에블로호 사망 승조원 Hodges에 대한 묵념 모습
푸에블로호 사망자 Hodges 관을 운구차에 넣는 모습
국립묘지 내 안장된 Duane Daniel Hodges 비석
Hodges에게 사후 수여된 은성훈장 Hodges 부모에게 전하는 신문기사
극비작전문서(여전히 중요한 부분은 비어 있음)
1967년 10월, 해리스 대위는 워싱턴에 날아가 NSA와 해군보안국 소속
함선인 푸에블로호에 대해 보고를 하였습니다.
Gene Sheck
1967년 해군은 푸에블로호의 작전지역으로 북한을 택했습니다.
당시 우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없었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맡은 임무의 암호명은 어류라는 뜻의 '이크시크
였습니다.
푸에블로호의 첫 임무 작전의 전체적 윤곽은 1968년 월별 정찰일정이라는
제목의 서류철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해군은 푸에블로호가 북한으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을 정찰 하는 것을
가장 위험성이 적은 일로 보았습니다.
존슨 대통령, 로버트 맥나마라 국무장관, 폴 H. 니체 국방부 부장관
.
위협받았던 사실을 기사화한 신문, 1965년 4월 28일
푸에블로호 함선이 정찰 임무를 수행하려는 곳이 해안에서
불과 20 Km 떨어졌으므로 북한에 훨씬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엔진 2대가 북한 MIG기의 기관포에 맞아 3번 엔진에 박혔던 유산탄이
폭발해 동체까지 부서졌습니다.
당시 RB-47 정찰기에 탑승하여 북한 MIG-17s 2기와
접촉했었던 승무원들
Thomas H. Moorer (1967 년부터 1970 년까지 해군 작전 참모와 1970 년부터 1974 년까지 합동 참모장을 역임 하였던 미 해군의 제독)
푸에블로에 내려진 극비 작전 명령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북한의 청진항, 성진항, 마양도항 및 원산항 근방에서의
해군 활동범위 및 특징을 규정한다.
해안에 설치된 레이더의 도청 및 설치에 중점을 두어 북한
동해안 지역의 전자 환경을 시험한다.
소련 해군부대에 대한 정찰과 도청을 수행한다.
북한 근방에서 공공연한 첩보 수집활동을 함으르써 소련 해군기지를
대상으로 하는 정찰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반응을 각각 파악한다.
미군에 대항한 공격적 행위나 적대적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
북한 및 소련군 부대의 배치 상황을 보고한다.
마지막으로 명령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부되었습니다.
"위험 추정 : 최소"
그러므로 북한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12해리 경계 밖에 잠시 정박해 있는 어느 날, \
또다른 경고 메시지가 날아들었습니다.
"미 제국주의 침략군이 오늘 아침 일찍 또다시 어선으로 위장한 간첩선을
우리 동부해안 외곽에 침투시킴으로써 적대적 침입 행위를 자행했다.
미 제국주의 침략군이 간첩선을 보내 정탐을 계속한다면 우리 해군이
단호히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을 출발한 후 푸에블로호는 매서운 겨울 추위에 시달렸었고,
맞바람을 받은 채 항해를 하며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최북단인 러시아와의 접경 지대에 이르렀을 때,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배의 갑판과 선루가 얼음으로 뒤덮였습니다.
부처 함장은 배 위의 묵직하게 언 얼음을 우려해 승조원들에게 쇠망치와
정으로 얼음을 모두 깨도록 명령하였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사태때 생포된 김신조
부처 함장이 북한 해안 외곽에서 무선을 끄고 정찰하는 동안,
북한의 특수부대는 남한 군복 차림을 하고 서울의 외곽지역까지
이르렀습니다.
3시간후 그들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 입구에서
1.6km 떨어진 초소까지 왔습니다.
초소 경비병이 신원을 묻자 자신들이 대공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부대원들이며,
산에서 작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은 이 곳을 통과 했지만 몇 분 후, 교전소리가 들렸고 하늘은
기관총 소리로 가득찼습니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대부분 사살되었고 1명은 도망갔고 1명은
항복을 하였습니다.
만약 이들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한국의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북한은 전면전을 감행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인 1월 22일 정오경, 푸에블로호는 고요한 바다 위에 꼼짝도 않고
정박해 있었습니다. 남쪽으로 32km도 못 미치는 곳에 원산이 있었습니다.
푸에블로호는 암호명이 명왕성, 금성, 화성인 3개의 작전 지역을 통과하며
북한의 신호를 포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요 목표지역인 청진과 성진은 전파를 수신하기에
아주 취약했습니다.
한국의 국민들은 청와대를 공격하려던 북한 특수부대원들 중 생포된
김신조의 모습이 전국으로 방송이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 주민들 텔레비젼이 없었지만 북한과 한국, 판문점에 주둔하는
북한군 장교들은 TV를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1월 23일,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북한 섬 웅도가 짙은 안개에 휩싸이자,
부처 함장은 이 곳이 원산을 도청할 최적지라고 보았습니다.
조선일보
첫댓글 프에 블로호의 사건은 전쟁의 재발되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오래전에.외국의 TV의 보도에 마음 아파했는데
이젠 역사가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