雨中山行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인데도 평상복 차림에 등산화 끈을 졸라맸다.
서울 송파구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잠실 - 안양 청박골 간에 운행하는 11-3번 버스를 탔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는 노선. 1시간 걸렸다. 경기도 안양 종합시장을 지난 뒤 버스는 왼편 샛길로 접어드니 먼 빛으로도 산이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금용아파트를 지난 뒤 11-3, 10, 15, 15-2 버스 종착과 회차 지점.
현대아파트 단지 아래 종착지에서 내리니 이정표의 화살-판목에는 예비군 훈련장과 관음사 방면을 가리킨다. 날림으로 포장한 듯한 허름한 시멘트 길을 따라 관음사(觀音寺)로 향했다. 5분쯤 올라가니 불기 2551년이란 플래카드가 걸렸으며, 불자 신도들이 절 안에 가득히 차 있었다. 그들은 절 안에 들어서는 신자들에게 리본을 달아주며 긴 탁자 위에 진열한 음식물 박스에서 먹을거리를 꺼내서 나눠주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佛者도 아니었고 또 버스 정류장 인근에 있는 김가네 김밥집에서 비빔밥을 먹었으므로 욕심내지 않고 이내 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왼쪽 산길, 잡석을 어설프게 깔아 만든 산길로 접어들었다. 푸르름이 가득 찬 활엽수들, 미끈미끈하게 잘 생긴 참나무,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가는비 내리는 숲 속의 길은 조금 미끄러웠다. 완만한 경사.
20분쯤 올라가니 오른쪽 산 중턱을 깎아 만든 터에 창암약수터. 초라하나마 운동기구 몇 개가 있었다.
12 : 40분경, 출발한 지 25분쯤 네 갈래 길이 나왔다.
自成路 표석 팻말이 있기에 오른쪽 산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키 작은 도토리나무, 잎새가 푸르며, 달콤한 숲의 냄새가 났다.
13 : 20 쯤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했을 때 '수암봉 주차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였다.
13 : 25 소나무 쉼터.
14 : 00 수암봉 정상. 해발 395m.
비가 세차게 내리는 돌너덜 정상에는 아이스케키, 막걸리를 파는 사내 두 명이 하산하려고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있었다.
폭우 속, 뿌연 운무(雲霧) 속에 시야가 무척이나 가려졌다. 동측에 군부대 철조망이 보였으며 정상에는 둥근 철탑이 보였다. H헬기장을 지나서 철조망 바깥 산책로를 빠져서 계속 산꼭대기로 올랐다. 산길이 미끄러웠고, 흙탕물이 흘러내렸다. 후두둑 후두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청아했고, 흩뿌려지는 빗방울은 시원했다. 이따금 마주치는 산행인들은 모두 급하게 하산한다.
비 내리는데도 미친 사람처럼 우리 내외만 슬기봉을 향해서 올랐다. 울창한 숲의 나뭇잎새로 슬기봉(476.6m) 정상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은 공군부대가 철조망을 둘러쳤기에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었다. 깊은 산속인데도 차도가 잘 정비된 군부대 정문에 채 이르기 전에 왼쪽으로 빠지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급경사.
점점 거세어지는 빗발. 산행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비옷을 입지 않은 아내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으며 샛길을 오르내렸으며 때로는 미끄러운 바위에도 올랐다.
군부대 철조망을 살짝 비켜 하산한 뒤 마주치는 산행 일행에게 쉬어 가라고 내가 말했다. 젊은 새댁과 40대의 아주머니 그리고 예순에 가까운 남자. 예쁘장한 여자 셋이서 빗길을 걷다가 사내를 만나 안내자로 삼은 모양. 그들한테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셨다. 우중산행에서 맛보는 커피는 별미였고, 분위기도 특별했다.
빗길이 위험하니 암봉(巖峰)이 많은 태을봉으로 가지 말라는 여자 산행꾼의 걱정 어린 조언과는 달리 나는 고집을 피우듯이 태을봉으로 향했다. 1.8km라는 이정표 거리가 나를 유혹했다. 한 시간 남짓하면 도착할 것 같기에 풍우가 세차게 불고 퍼붓는다 해도 한 번쯤 빗속에서도 도전하고 싶었다. 하지정맥류 증세로 걷기를 꺼려하는 아내에게 우중산행의 묘미, 처음으로 수리산(489m)에 오르는 아내에게 관모봉, 태을봉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운무 때문에 주행로를 잃어버렸으며, 나중에는 잡목이 우거진 소로마저 놓쳐버렸다. 오른쪽 길을 놓치고, 왼쪽으로 산행 흔적만 살짝 남아 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던 모양. 그나마도 길은 어느새 아예 없어졌다. 비탈진 바위, 낙엽이 쌓여서 미끄럽고, 빗길에 등산화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산해야 했다. 더욱이 아내는 우산까지 들었으니... 나중에는 우산을 배낭 속에 넣었으며, 방수가 안 되는 옷을 입은 아내는 비에 흠뻑 젖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가 어디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운무. 앞으로 나가는 길만 보였다. 뿌연 안개-비 속에서도 산 능선 아래 음지에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울창하고 올곧아서 보기에도 시원시원했다.
경사진 곳, 낙엽이 수북이 깔린 벼랑길을 미끄러지며 내려왔더니만 숲 사이로 황톳빛이 보였다. 넓은 길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산 아래로 거의 내려왔더니만 시멘트로 높이 쌓은 방벽이 보였다. 혹시 군부대? 군부대 안으로 들어왔다면 숲 속에 감춰진 지뢰를 밟아 발목이 잘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조차 들었다.
계속 하산하니 작은 개울물이 보였다. 군부대 방벽이 아니라 계곡물이 넘치지 못하도록 설치한 방수벽. 넓은 주차장이 보였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로, 흙으로 범벅이 된 등산화를 씻었으며 바지-가랑이에도 물을 끼얹어서 조금라도 깔끔한 체를 했다.
넓은 주차장, 제3산림욕장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른쪽 하산하는 길은 잘 다듬은 큰 도로, 왼쪽은 산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있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다가 아내가 다리와 무릎이 심하게 아프다기에 중도에 포기하고 계단으로 도로 내려왔다. 산림욕장 안내표지 옆에 있는 쉼터 벤치에 누어서 잠시 쉬었다.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내려오니 길 옆에는 많은 자가용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흰색으로 도색한 예수-그리스도상이 멀리에서 보였다. 깔끔한 교회건물, 수리산 천주교 성지를 지나서 계속 걸었더니 도로 양편에는 큰 음식점을 겸한 산장들이 있었고, 오리구이, 불고기, 한우고기, 두부를 파는 음식점이 즐비했다. 음식점 마당에는 자가용들이 빽빽이 가득 차 있었으며 상당한 수의 차량은 도로에서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수리교를 지나고 18 : 00 경에 안양기도원을 지났다. 두 개의 높은 고가다리가 하늘을 가로질렀기에 위치를 물었더니만 짐작한 대로 서해고속도로 조남분기점으로 빠지는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 수리터널이었다.
계곡 따라 산장들이 많았고, 도로 따라 음식점이 허다했다. 단체손님도 받고 24시간 영업한다는 간판도 보였으며 전화만 주면 언제든지 봉고차량 등으로 손님을 실어 나른다고 했다. 대형 한증탕도 보였으며, 여성전용 한증탕도 있었다. 돈만 있으면 오늘처럼 비가 흥건히 쏟아지는 날에는 한증으로 삭신을 녹이며 비지땀을 흠뻑 뽑아낸 뒤에 기름진 음식을 들면서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병목안삼거리.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반갑게도 아침에 탔던 노선인 11-3. 아침에 11-3 버스 종착지점인 창박골로 가기 직전 왼쪽에 잘 꾸며진 광장을 본 것을 기억해 냈다. 먼 빛으로도 한증탕 건물이 보였던 곳, 뒤편 산길 너머로 숨어 있는 휴식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리산의 형상이 그제야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졌다.
수리산 병목안이나 창박골로 들어가는 교통편은 편리했다. 안양역, 안양종합시장 등지에서 10, 15, 15-2, 11-3 버스를 탄 뒤 얼마 안 되어 현지에 도착. 궁금한 분은 전화번호로 확인 바람. 수리산 산장 0311-443- 8524, 011-9940 -9211,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관음사 위 커다란 바위 아래 무속인이 치성을 드리는 바위, 연등 몇 개만 을씨년스럽게 걸려 있었고, 어수선한 빈 터에 하얀 수국 꽃이 달덩이 같은 젖통처럼 피어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밟는 소리. 떡갈나무, 신갈나무,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잎사귀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후두둑거리는 빗소리.
추어탕 끓일 때 넣는 산초나무의 잎사귀를 뜯어서 맛을 조금만 보았다. 흙더미에서 나와 가랑잎 위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두더지를 보았고, 비를 맞는 새소리도 들었다. 호젓한 산길에서 만난 병꽃. 미끄럽기 짝이 없는 바위는 칼날이 선 것 같았다.
소로를 따라 걷는 감흥. 산길을 잃어버리고도 유유자적했던 나. 나를 믿고 따라준 아내. 하루만 산신령 부르칸*이 된 나는 경기도 안양시 수암봉, 슬기봉에 가득 찼던 운무와 폭우에 갇혀 산길을 잃고 헤매었어도 행복했다. 비 쏟아지는 날인데도 아내와 함께 한 호젓한 산행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싶다.
2007. 5. 24(목요일). 부처님 오신 날(불기 2551년).
* 부르칸(Burkhan) : 불을 상징하는 왕을 뜻하는 몽골의 신화.
위 글... 오래 전에 쓴 내 일기장에서 발견했기에 여기에도 퍼서 올린다.
당시의 닉네임은 부르칸, 바람의 아들 등이었다.
오늘은 2021. 5. 2. 일요일.
아내와 함께 서울 송파구 잠실 석촌호수 한 바퀴 돌았다.
초여름으로 가는 길목일라서 그럴까? 산책로의 가로수는 온통 푸르렀으며, 철죽꽃은 많이도 지고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럴까? 정말로 많은 인파들이 쓰라미처럼 몰려오고, 스쳐갔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걱정되는데도 산보하는 행인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