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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0년 1월 5일 주일오전
성경낭독 : 전3:1-13; 마25:31-46
본문 : 시61:1-8
제목 :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02편 5,6,9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27편 1,2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42편 5,7
성경낭독 후 찬송 – 시52편 5,6(고정)
설교 후 찬송 - 시130편 1,3,4
성찬식 찬송 - 시63편 2(고정)
폐회찬송 - 시92편 4,6(고정)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최근에 ‘피로 사회’라는 용어가 사회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리는 듯합니다.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너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는데,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씨가 이런 점을 지적하는 책인 “피로 사회”라는 책을 써서 히트를 치면서 이 용어가 자주 회자되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용어로 ‘번아웃 증후군’ 같은 말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회사원들이나 자영업자들이라면 아마 간혹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탈진할 정도로의 격무가 계속해서 반복될 때, 어느 순간 완전히 무기력해지는 증상입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니까 아직까지 질병으로 분류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심리학적인 용어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2)
약간 다른 케이스지만 ‘공황장애’나 ‘대인기피증’ 혹은 ‘폐소공포증’ 같은 증상들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달리 현대인들이 이런 질환이 많습니다. 심리적인 압박감이 심하고, 사회의 병리적 분위기들이 심해진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노출되는 연예인들이 사람들에 대해 가장 기피하는 종류의 심리적 질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런 사회의 병리적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참 약하다는 것을 이런 질환들을 통해서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3)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마 10대나 20대들은 어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꼰대’라고 하기 딱 좋은 이야기인데요, 제 나이대의 사람들이 부모님의 세대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 세대의 분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더 격한 상황들을 사셨거든요. 그런데 그 부모님 세대들은 지금처럼 이렇게 심한 질환들 속에 사신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겁니다. 참 희한하죠. 신기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잠깐 해 보겠습니다. 저희 어머님께서 젊은 시절에 방직 회사를 다니셨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 층은 아예 이 사람의 이름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많을 텐데, 민주화 시기에 분신을 통해 운동에 불을 붙인 전태일 씨를 다룬 영화 ‘청년 전태일’의 배경이 되는 회사가 바로 방직회사입니다. 천 만들고 옷감 만드는 회사죠. 그 때 밀양에 큰 방직 회사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다 거기를 다니셨고, 저희 큰아버님도 다 거기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전태일 영화에 보면 방직 회사에서 재봉틀 일을 하다가 졸아서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이 꿰매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어머니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그 때는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일을 했고, 심한 날은 18시간 일하고 회사에서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일을 하고 그러기도 했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활을 매주 계속해서 하다 보니 젊은 여직원들이 잠이 모자라 재봉틀 앞에서 졸게 되었고, 그래서 그 바람에 재봉틀에 손가락을 드르륵 박는 여직원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말입니다.
현대인의 압박감, 현대사회의 압박감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우리 이전 세대의 삶을 생각해 보면 18시간을 일을 하면서 살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때는 피로사회니 번아웃 증후군이니 하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는데 왜 지금은 이런 문제가 이렇게 회자가 되는 걸까?
이 정도 생각을 하다보니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은 사람이 심리적 병증의 상태가 생기게 되는 것은 (환경이 비록 중요하다 하더라도) 환경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18시간을 일을 해도 번아웃이 오지 않지만, 어떤 이들은 훨씬 적게 일을 해도 번아웃이 온다는 건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환경이 아니라 심리적인 면이 사람을 훨씬 힘들게 한다는 것 말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읽었네요......최근에 주 4일 근무제가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리고 있는데, 리플에 재미있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주 5일 근무하는데 너무 피곤해서 주 4일로 가고 싶고, 또 지금 주 4일 하는 소수 회사들의 경우 사람들이 그렇게 좋다 좋다 하지만, 아마 주 4일로 가면 또 피로해질걸? 우리가 주 6일 일했을 때 주 5일로 바뀌면서 얼마나 좋다 했어? 근데 지금 또 5일이 피로하다잖아? 결국 주 4일로 가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거야.”
굉장히 그럴듯한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피로 사회의 문제, 번아웃의 문제, 나아가 공황장애나 심리적 결절 현상들이......사실은 단순히 몸의 피로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마음의 문제, 우리 영혼의 문제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무언가가 채워진다고 해서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영혼이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고 집에 10시에 들어오면 몸이 피곤해 죽겠는데 왜 직장인들은 휴대폰으로 뭐라도 보고 자려고 하는 걸까요? 이런 이유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심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를 일만 하다가 끝내기에는 자기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도 자기를 위해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야 적어도 사람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몸이 엄청 피곤한데도, 씻고 얼른 자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뭔가를 보고 있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바로 자는 걸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사람은 영혼의 충족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몸이 힘들고 어려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속 사람이 채움 받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존재들입니다.
탈진의 상태
1. 탈진
성경에는 간혹 ‘탈진’이 나옵니다.
아마 보통 성경에서 ‘탈진’이라고 하면, 엘리야가 승리 후에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한 이야기를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이런 것도 탈진이라 볼 수 있지만, 사실 엘리야 본문에는 ‘탈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복되는 엘리야의 말을 보면 ‘탈진’이라는 주제보다는 ‘죽음에의 위협’이나 ‘배교 상태로부터 돌이킴을 기대할 수 없는 낙심’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탈진’이라는 주제는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2절 말씀에 “내 마음이 눌릴 때에”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한 번 보시지요.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눌리다”라는 말은 그냥 이 시편에서만 보기에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어서,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이 시편 61편을 읽으면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데요......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이 말이 어떤 식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대략 ‘탈진’과 비슷한 의미를 갖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신학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주어로는 영혼, 마음, 영 등이 사용된다. 인간은 육체적인 극한 피로로 기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 쇠약해질 수 있다.”
말하자면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린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극도로 피곤할 때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혼도 극도로 피로해지고 기진맥진할 수가 있는데, 이 말은 그런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성경에서는 이를 “영혼이 피곤하다, 상하다”라는 식으로 번역을 했는데요, 대표적인 구절들은
시107: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시77: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시142:3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143: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사57: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대략적으로 이 말씀들의 의미는 몸이 지치는 것처럼 영혼이 지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망하고, 낙심하고, 또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영혼이 지치고 쇠하여서 번아웃, 곧 탈진이 일어나는 상태......쓰러지려 하는 무기력, 이런 것들이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립니다”라고 할 때의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땅 끝
그리고 이와 합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땅 끝”이라는 표현입니다. 시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시인이 마음이 눌립니다. 그런데 그 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가 주께 부르짖을 때 “땅 끝”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땅끝이 어디입니까? 시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석을 여러 종 비교하면서 보았는데, 많은 주석들이 “땅끝”을 심리적으로 이해합니다. 시인은 지옥과 같은 심경 속에 있다......이런 식으로 봅니다. 조금 더 진보적인 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의 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기의 배경에서 포로로 잡혀 간 상황을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가장 설득력 있는 주석들이 이 땅끝이라는 정황을 시인의 실존을 노래한 것, 그가 매우 고립된 상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만 보기에는 “땅끝”이라는 심상이 가진 성경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합니다.
성경에서 “땅”에 해당하는 단어와 “끝”에 해당하는 단어가 나란히 붙어서 쓰이고 있는 곳들을 쭉 늘어놓고 살펴보면, 땅끝이라는 말은 대단히 일관되게 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이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기 때문에 대표적인 구절 두어 개만 읽어보겠습니다.
신28: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신28: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사43: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성경에서 “땅끝”은 두 가지가 절대로 아닙니다.
첫째, 성경에서 땅끝은 결코 ‘단순히 지리적으로 먼 곳’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에서 땅끝은 결코 ‘심리적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땅끝은 굉장히 신학적입니다. 제가 방금 읽어드린 세 본문 외에도 제 설교문에는 참고 구절이 22개가 더 적혀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모두 가지는 공통점이 무엇이냐? 땅의 끝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쓰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땅끝으로 흩으시거나 땅끝에서 불러모으시겠다는 것(보통 하나님께 대한 배역 때문에 받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방 민족들, 특히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이방 민족들을 ‘땅끝에서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인데, 둘 다 의미가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흩어지겠다고 할 때에도 땅끝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땅끝에서 왔다고 말할 때에도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땅끝이 무엇이냐? 지리적으로 땅의 끝도 아니요, 심리적으로 고립된 적적한 땅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땅끝은 신학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지리적이나 심리적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고립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제 2절의 “내 마음이 눌린다”라는 표현과 “땅끝”을 함께 읽어보십시오. 시인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시인은 마음이, 영혼이, 쇠약해졌습니다. 탈진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육신이 쇠약하고 지쳐서 힘이 들어 쓰러진 때처럼, 영혼이 쇠약해져서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불어 어떻습니까? 여기에 “땅끝”을 얹어보십시오. 시인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주변에도 없으시고 자기를 돕지도 않으시고, 마치 이방인들이나, 혹은 이스라엘이 범죄로 말미암아 저기 먼 곳, 포로로 끌려가서 저기 땅의 끝에 가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과 고립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어, 그렇게 살게 되는 상태! 시인은 이런 상황 중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이 2절에서 말하는 이런 상황을, 아주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이 시를 다윗 스스로에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시의 표제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다윗의 정황을 우리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들 압살롬에게 몰려서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치고 있었던 때를 생각할 수 있지요. 칼빈 선생님이 이 시의 배경을 압살롬의 반역의 시기로 봅니다. 아마 이런 정황에서 다윗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영혼이 눌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상태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조금만 더 일반화해보면, 우리 또한 이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기진맥진하는 때가 있습니다. 영혼이 탈진 상태에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영혼의 탈진이란 몸이 피곤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혼의 탈진이 몸에 있어서는 격렬한 흥분과 함께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몸은 가장 강력하게 정욕을 향한 추구로 나아가고 있을 때 영혼은 탈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탈진은 몸의 탈진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세상적인 정욕은 가장 강력해서 성공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예배 시간에는 잠만 오고, 성경 읽기는 지루하고, 기도는 해 본 기억이 없는 때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설 수 없는 상태, 하나님을 부를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마치 땅끝에 있는 것처럼, 곧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신 곳, 이방 땅,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이런 곳에 있듯이 내 마음이, 내 영혼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의 “마음이 눌릴 때”, 그리고 “땅끝에 있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시인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들을 종종 경험합니다.
요나
그런데 이때 시인이 노래하는 방식을 한 번 보도록 합시다.
저는 오늘 설교를 거의 2절부터 4절까지에 할애했는데요, 2절을 살폈는데 이제 그 뒤의 3절과 4절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합시다.
3절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 여기 “원수를 피하는”에서 “피하는”이 작은 글씨로 되어 있으실 겁니다. “피하다”는 말이 원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원수의 면전에서”입니다. 즉 3절 말씀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고, 원수의 면전에서 견고한 망대가 되신다”라는 뜻입니다.
4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아멘!
우리가 2절부터 4절까지를 주력으로 살펴보면, 이 구절 안에 어떤 맥락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 2절은 ‘나의 상태’를 노래합니다. 나는 마음이 눌려 있죠. 땅끝에 있습니다. 2절은 ‘나’를 노래한 것입니다.
- 그리고 3절은 ‘주’를 노래합니다. 히브리어로는 2인칭이기 때문에 ‘당신’인데, 어쨌든 주어가 주님입니다. 2절은 나를 노래했고, 3절은 주님을 말했습니다.
- 그리고 4절을 보면 다시 ‘나’를 노래합니다. 그런데 4절의 나는 2절의 나와는 사뭇 다릅니다. 2절에서 ‘나의 상태’는 눌리고 땅끝에 있는 상태였는데, 4절의 상태는 “주의 장막에” 있고, “주의 날개 밑에”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나’, 즉 시인이 2절로부터 4절로 옮겨가게 된 이유가 3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눌린 상태, 땅끝에 있는 상태로부터 “주의 장막”, “주의 날개 밑”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3절의 “주가 나의 피난처이시고, 원수의 면전에 견고한 망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절의 끝부분도 포함된다. 주는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신다”. 여기 바위는 반석, 산성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바위/반석의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요나의 상황
그래서......시편 61편, 그리고 특히 이 2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에 주목해서 말씀을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경의 한 인물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이 2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이 이 인물에게서 부각되는 요소이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아까 살핀 2절의 “마음이 눌린다” 할 때의 이 단어와, 4절에서 “주의 장막에 거한다”, “주의 날개 밑에 피한다”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요나’입니다.
제가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마음이 눌린다” 할 때의 시편 구절만 말씀드렸는데, 사실은 이 말씀이 나오는 또 다른 중요 구절이 요나서입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자신을 바로 이 단어를 가지고 표현을 합니다. 요나서 2장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깜짝 놀랄 때가 있는데, 아마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시편 61편을 읽다가 깜짝 놀랐는데, 그건 다름 아닌, 이 시편 61편의 이야기에 요나의 고백이 고스란히 나왔기 때문입니다. 시편과 요나서가 같은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같은 정황 속에서 두 사람의 노래 속에 같은 것을 두셨습니다.
영혼의 곤고
첫째 요소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저 단어입니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 히브리어 단어로는 ‘아타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 16번 밖에 안 나오기 때문에 아주 흔한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시편에 매우 집중적으로 나오고, 애가에 몇 번 나오기 때문에 다른 책에는 거의 없습니다. 욥기에도 한 번 나오는데 용례가 다릅니다.
그런데 요나가 이 단어를 쓰고 있는 방식을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읽은 요나서 2장 7절이 언제 요나가 한 이야기인줄 아시겠습니까? 요나서 2장 7절의 정황이 무엇입니까? 한 번 보십시오.
네! 지금 요나가 2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정황은, ‘물고기 뱃속’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구절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노래하고 있는 장면인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아마 지금도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노래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피노키오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아마 다들 그러시겠지만, 피노키오에서 그리고 있는 물고기 뱃속은 대궐같이 넓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에서 다들 보셨겠지요? 보통 횃불을 들고 할아버지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공간입니다. 마치 무슨 창고 같은 그런 공간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좀 들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커도 그런 피노키오 이야기에 나오는 물고기 뱃속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마 요나는 물고기의 위장 속에서 노래 불렀겠지요. 그러면 그 위장 속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었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마 뭐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피노키오의 그림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소화를 위한 산성용액이 흘러 나오고 있는 끈적끈적하고 미끈미끈한 막 속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겠지요. 요나의 노래는 그런 곳에서 부른 것입니다. 대궐 같이 넓은 곳에서 한쪽에 놓여 있는 물고기 시체를 의자로 삼아서 횃불을 켜고 노닥거리듯 그렇게 이야기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요나가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 오늘 시편 2절의 “내 마음이 눌렸다”할 때의 그 표현과 똑같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하였다.
요나의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셨지요. 그래서 물고기가 그를 삼켰습니다. 요나는 2장 7절까지 가기 전에, 그 앞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습니다!”(욘2:2) 요나는 스올의 뱃속! 지옥의 끄트머리에 있었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고,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습니다!”(5-6절)
지옥 속이지요. 영혼의 곤고의 끝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떠났고, 요나는 동화책의 주인공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로 선지자이기 때문에, 요나는 한 개인이 아닙니다. 이 때 요나의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요나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황이었습니다. 어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어기고, 떠나고, 그래서 땅끝, 곧 곤고의 끝에 도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 곧 이스라엘을 바다에 던지셨고, 던져진 요나 곧 이스라엘은 곧장 스올의 밑바닥, 지옥 끝자락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제 맘대로 살았기 때문에 도달한 곳은 곤고의 끝바닥이었습니다.
‘아타프’, “내 마음이 눌릴 때에”의 의미,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성전으로
그러나 놀라운 점은, 시편 61편의 내용은 요나의 그 고백 바로 뒤에 나오는 이야기까지 그대로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이 “마음의 눌림”으로부터 “주의 장막”, “주의 날개 밑”으로 장소가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요나서 2장 7절을 다시 보시면, 이 두 번째 요소 역시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2장 7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장소의 이동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 곧 스올의 뱃속에 있었는데,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생각했더니 내 기도가 주의 성전에 미쳤다!” 그렇죠? 요나는 말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호와를 생각했더니, 나는 성전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시편 61편 2절과 4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절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4절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아멘!
우리가 깨닫게 되는 두 가지 사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1. 곤고의 상황을 두려워 말 것
첫째, 우리는 ‘곤고의 상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부른 노래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요나가 스올, 곧 음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 음부가 즉시 성전으로 변화했다’는 주제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요나를 인용하시면서, 그 물고기 뱃속의 3일 밤낮을 죽으신 후 3일에 비유하시기 때문에 요나서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부활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우리의 고난과 고생, 우리의 영혼의 탈진적인 상태가, 아슬아슬하게 하나님의 극렬한 은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러너스 하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러너스 하이’는 마라토너들이 주로 겪는 현상인데, 사람의 근육이 한계치까지 도달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정도가 될 때 극렬한 쾌감이 드는 현상입니다. 말하자면 가장 극렬한 고통과 가장 극렬한 쾌감이 바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유도 선수들도 목 조르기를 당할 때, 어느 시점이 넘어가면 실신 직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 역시 극도의 쾌감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탭을 치지 않고 좀 더 버티면 아예 갈 수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우리는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서의 3일이, 곧바로 주님의 무덤에서의 3일이라는 것을 복음서를 통해 읽을 때, 그 죽음이라는 고통이 부활이라는 영광과 직선으로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실 때 이런 영적 원리를 창조해 두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렵고, 가장 탈진하고 낙심하여서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이는 순간! 우리는 보통 이 때 가장 어두운 순간이기 때문에 절망만 가득하리라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짙은 어두움 후에 가장 밝은 새벽이 오듯, 우리의 영혼의 탈진에 가장 큰 영혼의 기쁨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오직 이것입니다. 시인처럼 2절처럼 영혼이 눌려 탈진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땅 끝에 몰려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바로 그 때에! 바로 그 때 고개를 들어서 주를 올려다보는 것! 바로 이것이 4절의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의 직진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의 문맥이 무엇입니까? 죄가 많은 곳에는 ‘자동적으로’ 은혜가 더 많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 문구의 주어는 분명히 “율법이 가입한 것은”이지요. 율법이 가입해서 죄를 비춰주니까, 그 죄가 대낮처럼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깨닫게 된 사람에게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뜻입니다. 죄에 그대로 머물면서 죄가 죄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죄를 깨닫고, 가슴을 찢을 듯이 슬퍼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극도의 은혜가 코앞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현실의 상황이 좋지 않거나, 내가 당장 은혜로 넘치지 않는다고 해서 지나치게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지금 곤고의 상태를 보내고 있다고 해서 지나치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모든 부분을 아시고, 또 그 모든 부분에 대한 치료책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지점에서든지, 설령 그곳이 ‘땅끝’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서 고개를 들어 주를 바라보고 돌이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극도의 절망감을 극도의 은혜로 바꾸시는 데’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2.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
그리고 둘째, 이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는 언제나 우리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2절이 4절로 변화되는 데에는 3절이 필요합니다. 극도의 곤고가 극도의 기쁨과 맞닿아 있게 되는 것은 반드시 3절의 고백, 곧 “주는 나의 피난처, 원수의 면전에서의 견고한 망대”라는 고백을 통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만, 생각 외로 자기의 고통을 자기가 치료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라고는 하는데, 그 방법이 ‘내가 기도로 열심히 매달리면’......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내가 기도로 열심히 매달리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까지, 그것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는 “주께서 나의 피난처시오, 원수의 면전에서의 견고한 망대입니다”라는 고백 뿐입니다. 영혼의 탈진의 치료제는 ‘나의 열심의 회복’이 아닙니다. 오직 주만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병에 들면 어떻게 합니까? 손을 쓸 수 없는 심각한 병 말입니다. 의사에게 가지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의사에게 병증을 이야기하고 환부를 보여주지만, 언제나 그 병증의 치료에 대한 주도권을 내가 갖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집도권을 의사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암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혼의 탈진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탈진의 완전한 치료제는 ‘주님께 완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는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나를 치료하시는 분께서 나를 온전히 다 가지실 수 있도록, 모든 마음의 문제를 다 주님께 드리고, 나는 내 주권을 거기서 떼 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새해의 첫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새해의 첫 주일의 설교를 시편 61편이 되도록 이끄셨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우리 교회는 본문의 순서를 제가 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모든 것이 가장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이 설교의 주제를 이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해의 시작 시기에, ‘영혼의 탈진’을 듣게 하신 데에는, 아마도 주님의 깊은 뜻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올 한 해도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이들이 되기 위해, 아마도 전초 작업으로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나의 가장 깊은 절망의 구덩이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보석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올 한 해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가 기쁨 가운데 매일을 주님께 완전히 자신을 드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께서 복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