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여울은 강물 따라 / 한명희
늙은 배롱나무 한 그루
병든 제 무릎에
여린 뿌리 하나 앉히고 떠나갔다
삼백육십오일
불볕에 모진 바람
조울증 같은 날씨 버티고 이겨낸 여름날
무성한 잎새
가지마다 그리움인 듯
그리움인 듯 꽃여울 붉다
어미는
길게 뻗은 가지들 두 해째 새순 돋지 않았어도
어린 새순 곁을 지켰다
콘크리트가 주변을 꽉 막아
물길이 막혔어도 등 꼿꼿이 펴고
빗물 몇 모금 어린 잔가지들에 흘러가도록 등을 토닥였다
아기 나무는 알고 있을까
죽은 어미가 뿌리 깊숙이 감춰둔 젖줄을 타고
살이 오르고 꽃을 피운 것을
어미가 떠난 자리 딛고 일어나 어미가 되는 것을
강물이 강물을 이어 강이 되는 것을
-『참, 미안한 일』, 시와사람, 2024.
감상 – 새순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고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새순이 자라서 고목이 된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나무는 대개의 경우 씨앗을 멀리 보내려고 한다. 어버이 그늘에 자식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씨앗에 프로펠러를 장착시켜서 멀리 내보내고, 도토리나무는 구르기 좋게끔 열매를 동글동글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다람쥐의 식량이 되고 새의 먹이가 되어 어떻게든 발아의 기회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몇 백 성상의 고목이 몸의 탄력을 잃고 더 이상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이전과 다르게 자기 몸을 새순에게 내어주는 일도 종종 목격된다. 한명희 시인이 경이로움을 갖고 지켜보는 일도 그러하다. 늙고 병든 배롱나무 고목의 무너진 둥치 한 쪽에 그만 자기 씨앗이 떨어진 것이다. 어린 새순은 자신의 길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런 판단도 갖기 전에 고목의 몸을 자양분 삼아 뿌리를 내리고 몸을 키우기 시작한다.
평상시에는 고목을 어미로, 새순을 아기를 보는 시각이라고 해서 특별한 일이 아닐 터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고목이 제 수명을 다하며 새 생명을 건사하고, 새순이 그 뒤를 잇은 장엄함이 있는 것이다. 새순은 새순대로 가지 끝에 붉은 꽃을 내며 저도 이만큼 왔다고 기염을 토하고, 어미는 어미대로 그런 새순에게 빗물을 모아주고, 젖줄도 대어주면서 스스로는 사라져가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석 달 열흘은 너끈히 핀다는 배롱나무 그 붉은 꽃은 고목일수록 보기 좋긴 하다. 대구에선 신숭겸 유적지 배롱나무가 우선 생각나는데 서계서원 배롱나무도 보호수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배롱나무 중에는 하엽정의 그것처럼 연못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도 흔하다. 반영으로 인해 하늘과 물이 함께 붉어지고, 가을바람에 붉은 것들이 점점이 연못을 덮는 장관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시인이 꽃숭어리 대신 ‘꽃여울’이란 표현을 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강물이 강물을 이어 강이 되는 것”처럼 새순과 고목이 번갈아 생을 잇는다. 나무의 생도, 우리의 생도 자꾸 어디로든 흘러가고 있을 것이고. (이동훈)
첫댓글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