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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탁스 (DOTAX) 원문보기 글쓴이: 얼굴천재아이린
펌,스압)바둑 역사상 올타임 레전드 1편 - 오청원 전설의 10번기.jpgtxt
https://cafe.daum.net/dotax/Elgq/3789856?svc=cafeapi
펌,스압)바둑 역사상 올타임 레전드 2편 - 조훈현. 최초의 응씨배 우승자.jpgtxt
https://cafe.daum.net/dotax/Elgq/3789952
펌,스압)바둑 역사상 올타임 레전드 3편-조치훈. 폭파전문가.jpgtxt
https://cafe.daum.net/dotax/Elgq/3790441
4편의 주인공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해 주신 이창호 입니다.
아마 바둑을 모르시는 분들도 '아~ 그 바둑 두는 사람?' 하고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르시는 분들은 이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가 낳은 역사적인 위인이니..)
뭔가 시작하기에 앞서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기대 해 주시는 분들이 많은만큼 더 재밌는 일화, 깔끔한 내용을 써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전달 됐을지 모르겠네요 ㅠ
(이런 필력을 읽어 주시는 분들 다들 감사드립니다..) 댓글 추천은 사랑입니다.
* 누가 제일 강한지 아라보자!! *
-이창호-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세계 바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둑인 입니다.
이 사진은 이창호9단 전성기(05년도) 까지 의 주요 프로기사 상대전적입니다.
요건 '고레이팅' 이라는건데
1980년부터 당시 1 2 3등이 누구인지 매 년 기록해 놓은 사이트입니다.
막 어디 공식적인 랭킹이 아니고 자료와 데이터를 토대로 재미로 보는 랭킹이긴 하지만
이창호9단은 무려 10년 이상 1인자 자리에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1980~81년은 짤렸는데 조치훈9단이 1등이였습니다.
(참고로 조치근이라고 써있는건 조치훈9단, 케지에는 커제9단입니다.)
지금부터 올타임 레전드 이창호님 편을 시작하겠습니다.
1975.7.29일 전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 이창호는
지역 유지였던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2명의 프로기사들 한테서 바둑을 배웁니다. 약 9세 쯤
(이정옥 六단,전영선 七단)
그렇게 10살이 되던 해
당시 최강자였던 조훈현(2편의 주인공) 의 하나뿐인 내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내제자의 개념은 일본에서나 있었지 한국에선 처음 있는 일이였는데
(집으로 제자를 들여 가르치는것)
세고에의 내제자 였던 조훈현이 이창호를 같은 방식으로 키우고자 내제자로 들인것입니다.
10살에 프로 입단시험에서 실패하여 낙담을 하는데 (보통 초등학교에서 뛰어놀 나이 아닌가??)
내제자로 들어간지 1년만에 프로 입단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건 한국바둑 역사상 2번째로 빠른 입단인데 (첫번째는 조훈현)
바둑을 배운지 약 3년만에 프로에 입단한 것.
(역시 재능게임 인가 봅니다.)
조훈현은 11살에 입단 한 이창호를 보고
자기 생각보다 천재가 아닌가보다 싶어서 좀 실망했다고 합니다.ㄷㄷ
실제로 조훈현에게 배울 때
방금 둔 바둑을 복기하라고 하면 잘 못하고 버벅거리는것을 보고 조훈현이 혼내기도했답니다.
그도 그럴것이 조훈현은 60이 훌쩍 넘은 지금도 자신의 프로데뷔바둑을 복기할 수 있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
후에 조훈현 9단 인터뷰를 보면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창호는 원래 아주 크게 될 아이었으니 절대 내가 창호를 다 키웠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창호가 나에게 배웠다는 것 자체는 내게 자랑을 넘어 영광이고, 창호를 통해 나도 바둑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느끼며 산다.'
-조훈현 인터뷰 내용 中
내심 그래도 제자를 많이 사랑하셨던거 같습니다.
어린시절 이창호는 과묵한 성격이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라고 합니다.
그 후 13세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냅니다.ㄷㄷㄷㄷ
-왼쪽은 당시 도전5강 중 한명이였던 김수장7단. 13세 이창호에게 타이틀을 빼았기다 !!
그 후 14세때도 타이틀을 계속 수집하다가
급기야 15세 나이에.
-스승인 조훈현과 다전제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명인전 타이틀을 따낸다. ㄷㄷ(3대0으로 승..)
???:에이 조훈현이 전성기 다 지났겠지~
아니다.. 전전편을 보면 알겠지만 저 당시는 응씨배 우승하고 2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였다.
조훈현도 훗날 말하길
"창호가 내 타이틀을 따려면 적어도 20살을 되어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창호에게 처음 타이틀전에서 지고 나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제자에게 물려줄 수 있어서 아쉬운 마음은 없다." 라며 그 날을 추억했다.
그 후 이창호가 스승인 조훈현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자 집안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는데
조훈현의 아내가 회고 한 기록을 살펴보자.
" 타이틀전이 끝나고 차를 운전해서 데리러 갔는데,
두 사람을 태우고 집에 오는 그 차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속으로
아 창호가 또 이겼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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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잘 시간이 돼서 자려고 누웠는데 창호 방에서 돌 두는 소리가 나면 그 때 마다
남편을 꺾기 위한 연습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가슴이 철렁이곤 했다고 한다.
매일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아들처럼 키운 이창호가 어린 나이에 자기 남편의 타이틀을 계속 따내니
어떤 마음이였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원래 내제자가 성인이 되거나 5단이 되면 내보내는 것이 원칙이나 그 전에 분가를 하였다.)
(이창호는 조훈현 부부를 가족처럼 생각한다.
결혼식에도 바둑 관계자 아무도 안불렀는데 조훈현 부부만 가족이라 생각해서 부를정도.)
또 이 때 당시 일화로 유명한것이 있는데
조훈현
여기서 당연히 치고 나가야지 왜 하수처럼 뒤로 물러나느냐??
이창호
여기서.. 그렇게 치고 나가버리면 싸움이 벌어지고..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잖아요..
조훈현
아니 그럼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물러나는게 맞는거냐?
(야단을 침)
이창호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 확실히 이길 수 있는걸요..
조훈현
(아니 이게 집계산이 된다고?? 끝에 변수가 얼마나 많은데?)
아 슈팔 내가 두집 졌네??
그렇게 괴물이 되가는 이창호의 장점은
정확한 계산에서 나오는 끝내기 였는데
(실제로 조훈현 이창호 대결의 구도는
조9단이 초반 날쎈 포석으로 주도권 잡음 -> 이창호 두텁게 받아줌 ->조9단 무리수 몇 번-> 이창호 끝내기로 역전.)
당시 바둑은 끝내기의 개념이 크게 없었고
반집으로 지면 운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 개념을 이창호가 "반집 차이도 실력이다" 라며
보이지 않는 0.7집을 찾아 자신의 승리로 바꿔버렸다.
(이건 지금 인공지능들의 기본이 되는데 굳이 싸울 필요 없는자리에서 싸우지 않고 정확한 집계산으로 승부를 내버린다)
1편에서 오청원이 포석의 개념인 신포석을 창안했다면
이창호는 그 어린나이부터 벌써 당시에 없었던
'끝내기'
의 개념을 새로 창안한다.
이를 두고 오청원과 이창호를
뉴턴 과 아인슈타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당시 국내에서 타이틀 갯수로 스승인 조훈현을 밀어버리고 국내 탑을 찍게 된다.
당연히 일본과 중국이 주목을 하게 됐는데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거물급 기사 린하이펑9단을 상대하게 된다.
린하이펑
(내 아들보다 한살 어리던데 이거 지면 개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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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3대2로 이창호의 승리.
그렇게 국제 기전에서도 명성을 쌓던 이창호는
당시 일본 최강자이자 스승인 조훈현의 라이벌 이였던 조치훈9단(전편의 주인공)
을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데
트레쉬 토커 조치훈9단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조훈현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치훈
"스승이 돼서 제자에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것 아닌가?
그럼 제자가 뭘보고 배우겠나?"
(라며 조훈현 이창호에게 도발시전)
조훈현
ㅋㅋㅋㅋㅋ그럼 한번 둬보쇼
그렇게 결승전이 시작되고..
초반에는 조치훈9단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중 후반이 되자.
(아 씹..어린놈이 뭐 이렇게 잘둬?)
후반 끝내기에 무기력하게 당하며
3판 연속 패배를 당하고 3대0이라는 스코어가 만들어 졌다..
이창호는 그 뒤 '기복없이' 꾸준하게 실력을 보여주며
결국.
18세 나이에 스승인 조훈현을 무관으로 만들어버린다,.,(토트넘??)
또 19살에는
전무후무한 13관왕을 달성.
(다만 전관왕은 못했는데, 타이틀2개를 유창혁7단에게 패하며 못땃다)
이런 독주는 유래가 없던 수준이였고 그야말로 최강자의 포스였다.
(누구는 평생 한 해 하기도 힘든 1년 승률80퍼를
밥먹듯이 찍었다 약 20년간..수 도 없이..)
한국바둑협회는 이창호7단을 9단으로 2단승급을 시키는데,
이는 한국바둑사상 최초의 일이였다.
(유창혁7단도 같이9단으로 2단승급함.)
국제 대회에서 경험을 쌓자
20대 초반에는 말도 안 되는 승률로 세계 바둑계를 학살했다.
이 당시 결승에서 패배는
딱 한번 99년 춘란배 결승에서 스승인 조훈현에게 패했을 뿐이다.
특히, 이창호가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90년대 중국 최고의 기사 마샤오춘9단 은
만날 때 마다 개박살을 내버리며 재기불능시켰다.
(마샤오춘 상대로 통산 26승 6패 . 결승전에선 4전 4승 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말도 안되는 승률을 보여주자 급기야..
이창호의 우승률 이라는 퍼센트게이지도 만들어 졌다 ㅋㅋㅋㅋ
(1등 한 대회/출전 한 대회)
국내 대회 우승률은 80%를 상회했고
(출전 대회80퍼 확률로 우승.. 결승전 승리 확률이 아니라 '출전' 한 대회.)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률은 56.3%였다....(16회 출전, 9회 우승)
1년도 아니고 무려 5년동안의 우승률이 저정도였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기사인지 알 수 있다.
이창호 9단의 전성기가 무서웠던 것은
그의 기풍 때문이였는데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끝내기의 신 이였다.
진 사람은 '반 집' 패에 땅을 치지만, 그런 상대를 보고 창호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물러서서 그런 건데, 억울해 하실 것이 없는데?'하면서 말이다.
ㅡ조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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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두면 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도 바둑은 언제나 불리한 것 같다."
-루이나이웨이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가며
무수한 묘수들과 엄청난 전설을 쌓은 이창호9단.
그 중 이창호의 위대한 전성기의 마지막 불꽃 이라 할 수 있는 대회가 있었는데...
바로 전설의
농심배
(응팔에서 박보검의 모델이 이창호9단이다.)
한국 바둑 역사에 길이 남을 짤을 남긴 대회.
를 설명하기 전에!
당시 이창호는 슬럼프였다.
그도 그럴것이 끝내기의 관한 연구를 다른 기사들도 많이 하게 됐는데
모두 끝내기의 정석이라는 이창호의 기보를 보고 연구를 했기 때문에
그의 스타일을 많이 본 만큼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흔히
이창호 상대법을 가져왔기 때문에
승률이 저조했다.(대회 전 최근6번의 대국에서 1승5패)
그리고 이창호도 30대 초반 나이로 바둑 기사로써 적지 않은 나이였다.
마침 다음편의 주인공 이세돌 에게 밀려 차츰 타이틀을 잃어갈 때.
전설의 농심배가 시작되었으니( 후에 이것을 상하이 대첩이라고 부른다.)
-
농심배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스타크래프트의 위너스 리그 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중-일 프로기사 각 나라당 5명 씩 나오게 되는데
이긴 사람이 계속 두는것.
(ex.한국vs중국 한국 승 이면 한국vs일본 또 한국 승 이면 또 한국vs중국 이런식)
한국 엔트리
한종진/안달훈/유창혁/최철한..
그리고 이창호
였는데 이창호9단은 와일드카드 선발전에서 이겨서 뽑힌것.
엔트리가 강한편은 아니였으나
이 전 농심배에서 5회연속 우승을 한 기록이 있고
세계단체전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한종진 안달훈 유창혁이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광탈.
그나마 최철한이 1승을 하고 탈락하여 한국엔 이창호 9단만 남게 되었다.
반면
일본은 2명/중국은 3명의 기사가 살아남아 있었다.
그렇게 6회 연속 우승은 물거품이라는 여론이 강해졌다..
(당시 중국,일본 에서 "이창호가 다 이기고 우승할 확률은 3%도 안된다."라는
기사도 썻다.)
그러나 이창호 전성기에 개뚜드려맞은 마샤오춘9단 만큼은 생각이 달랐는데
마샤오춘
"1:2 배팅을 한다고 해도 이창호5연승에 모든것을 건다"
라며 이창호를 응원한 거의 유일한 기사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창호의 마지막 불꽃.
( 저 위에 터널 짤은 설명을 덧붙이자면 5명이나 남은 중/일 관계자들은 웃으며 입장하는데
이창호는 혼자 남아서 비장하게 터널을 걷고 있는 모습이다.)
뤄쉬허9단을 이기는 것을 시작으로
장쉬를 격파하더니
왕레이,왕밍환을 연이어 박살내버렸다.(일본 탈락.)
이 때 이창호의 포스는 그야말로
여포 그 자체
폭주기관차였는데,
장쉬와 둔 대국을 제외하고는 압도적인 경기운영으로 승리를 한 것.
그리고 마지막 대국
-왕시 사진이 없어서 응팔짤로 대체함.
중국 마지막 기사이자 중국팀 주장 왕시.
대국 장소는 중국의 홈 상하이.
슬럼프를 겪는 이창호.
모든 지표가 이창호에게 불리했다.
그러나
올타임 레전드 답게
이창호는 대담하게 대국에 임했는데
돌 가르기에서 흑이 나오자
2경기 전 왕레이가 자신을 상대로 둔 흑의 포석을 그대로 들고나왔다.
(왕레이도 중국 기사)
이를 본 왕시가 크게 당황하고 초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3연벙 당한 홍진호 기분이지 않을까 설마 같은 중국기사 포석을 쓸 줄은 몰랐겠지)
그렇게 이창호는 초반부터 승기를 잡고
장기였던 끝내기로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전설적인 단체전 5연승기록은 농심배 최다연승 기록이다.
(그 후 최근 신진서가 중국의 커제를 이기고 5연승을 기록하여 우승을 했다.)
농심배가 끝나고 이창호에게 압도 당한 기사들은 한마디씩 하였는데
-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 창하오9단
-
"이 바둑이 끝나고서야 하늘이 높다는 걸 알았다." - 왕시5단
-
이 농심배 직후 춘란배를 우승한 이창호는 이 후 세계대회 우승이 없다.
(이 후 세계대회 결승만 10번을 갔는데 모두 준우승하는 저주가..)
그 후 1년 뒤 아시아 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왕시5단에게 패하여 복수를 당한다..
(왕시는 5단에서 9단으로 승단 ㄷㄷ)
이렇게 이창호의 전성기는 사실상 끝나고
다음 세대 최강자가 될
구리9단과 이세돌9단에게 최강자 바톤을 넘겨주게 된다...
마지막은 다음편의 주인공인 이세돌9단에게 이창호 라는 존재에 대해 물었을 때 답변을 짤로 올려봅니다.
바둑계 패러다임을 바꾼
그 당시의 알파고.
올타임 레전드 국보 기사
바둑의 신.
이창호 편을 마칩니다.
-끗-
오류 정정 - 농심배 최다연승은 중국 판팅위가 7연승을 두번 했음
이창호 이전에 후야오위도 5연승 기록도 있음 샤오춘 발언은 일개 블로그 외에 출처가 나온 곳 X
출처 - https://www.fmkorea.com/3970777266
첫댓글 재밌네요.. 이제 마지막 한개 남앗다니
초딩 나이때 프로 ㅋㅋ 중딩때 국내 원탑. ㄷㄷㄷㄷ 근데 바둑은 30대 넘으면 급 노화하더라
이창호, 이세돌을 알아서 그런가 퀸즈갬빗 볼 때 그렇게 우와~ 이러지 않았음ㅋㅋㅋ 걍 존나 이쁘넼ㅋㅋ 이런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