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회 시산제에 다녀와서
요즈음 우리 까페에 올라오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허무’에 대해, 그리고 ‘범종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작정했다. 삼일절 아침, 지하철을 타고 도봉산역까지 가는 동안, 나는 그 생각에 몰두했으며, 그러는 중에 퍼뜩 허무라는 것이 산(山)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꿈속의 일처럼 하찮게 보인다. 마을살이는 일체가 허무한 것이다. 맞다. 이렇게 산은 허무를 직면하게 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주는가? 산은 마을을 떠나 입산하기를 권하는가? 한편, 종교는 어떤 답을 주는가? 종교 — 그것이 어떤 종교건 -- 가 허무에 직면하게 할 뿐 아니라 허무와 대결하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가?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았다. 과천역에서 자리가 났는데, 방심하는 사이에 내 옆에 서있던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내 바로 앞에는 일가족 네 명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 사람들은 서울대공원에서 내릴까? 경마공원에 가는 걸까? 지금 허무니 산이니 종교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다리가 아파 죽겠는데......
광륜사 뒤 편 공터에 도착하니 찬엽이 부인과 관식이 부인 등이 음식을 차리고 계셨고 친구들 몇몇이 제단을 마련하고 있었다. 성률이가 제사를 이끌었다. 1. 강신: 찬엽 회장이 성률이가 주는 글을 받아 우물쭈물 읽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도봉산 산신령이시여! 여기 내려오시어 조촐하지만 저희 정성이 깃든 제를 받으시옵소서. 잔을 세 번 나누어 붓고......” 제원들 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잔을 세 번 나누어 붓고’는 읽는 게 아니거든. 2. 참신: 다 같이 삼배. 3. 초헌: 회장의 헌작. 4. 독축: 축문은 엄숙하고 경쾌했다. ‘산을 배운다’거나 ‘산을 닮는다’거나 ‘산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회원들의 안전과 화합도 빌었고 가정의 평화도 빌었다. 5. 아헌. 6. 종헌. 7. 헌작: 헌작 중 “이번 순서는 학교 댕길 때 공부 잘한 놈 순서야.”라고 해서 내가 당당하게 나가 만원짜리 한 장 찌르고 술을 올렸는데, 그것이 잘한 짓이 아니었다. “이번 순서는 5만원짜리 낼 놈 순서야.”로 해석했어야만 했다. 8. 소지. 9. 음복.
산신령님에게 올리는 절은 3배더라. 우리가 나란히 도열하여 제를 올리는 동안, 성구는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찌감치에서 빙빙 돌았다. 은이도 자기는 이런 의식을 별로좋아하지 않는다면서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재한이는 아예 제사가 끝난 뒤에 산에서 내려왔다. “야, 왜들 그러냐? 이것은 일종의 놀이잖아. 민속놀이 같은 거 말이야.” 나는 약간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면서 참여를 권유했지만, 볼멘 목소리를 내거나 참여를 권유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들 상대방의 신념과 풍습을 이해하고 존중해주었다. 이런 것이 산(山)인가? 산은, 이런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받아주고 저런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받아주며, 종교가 없는 사람도 받아준다. 그 품으로 걸어들어오는 사람은, 그가 누구건, 안아준다. 내가 산에 대해 무엇을 알겠느냐만 산이 그렇다는 점은 안다.
‘콩사랑’이라는 곳에서 2차를 했다. 파전과 두부 전골에, 시산제에서 남겨 온 머릿 고기까지, 푸짐한 안주로 막걸리를 걸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서는 자녀 결혼을 비롯하여 등산복 팻션, 은퇴와 새 직업, 학창 시절의 싸움, 금연과 건강 등등 별의 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왔다. 경산회는 다 받아주는 것 같다. 자녀를 결혼시킨 사람이나 아직 결혼시키지 못한 사람이나, 커플룩으로 차려입은 사람이나 등산복도 안 입고 온 사람이나, 아직 직장에 붙어있는 사람이나 이미 은퇴한 사람이나, 중학교 1학년까지만 다니고 전학 간 사람이나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나, 담배를 끊은 사람이나 아직 흡연을 즐기는 사람이나......
금연자인가, 흡연자인가 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차이이겠는가? 아직 직장에 붙어있는가, 이미 은퇴를 했는가 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차이이겠는가? 학교 다닐 때의 성적이나 생활 태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요즘 믿고 있는 종교의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한 차이이겠는가? 만약 아직 서로 잘 알지 못한다면 새로 사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날 영선이와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관희 부인) 숙희씨와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병진이 부인) 마여사님하고는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들 수다를 떠는지 알겠더라고.
참, 내가 시산제 프로그램 9가지 -- 1.강신부터 9.음복까지 -- 를 다 쓴 것 보고 놀란 사람이 있겠지? 기억력이 비상한 것 같다고 말이야. 그것이 아니다. 내 주머니 속에 시산제 프로그램이 한 부 들어있었거든. 어떻게 그것이 들어있었는가 하면, 성구와 덕영이가, 연락을 못 받아 부조를 못했다면서 시산제 프로그램에 돈을 싸서 나에게 건내줬거든. 하여간 성구한테 삥 뜯은 놈은 나밖에 없을 거다.
첫댓글 ^^
언제 글을 올리렸나? 공연히 사진 찍은 탓에 글올리기 부담스러웠는데...삥 뜯은 것, 내세울만 하다.
난 글을 읽으면서 기억력이 대단하다 했는데 맨끝줄에 .....
그래 무엇이든 상관이 있겠는가 종교도 아니고 그냥 단지 산에서 조심하자는 이야기고
산을 조금 더 알자 하는것과 자연보호하자 하는 것이라네. 삥.... 글 잘읽었네.
대자연에 대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작은 의식..(祭)..이런 행사를 통해 자연과 벗들과 더욱 가까워지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영태 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우리 그날 참 즐겁게 지냈구나.. 라고 다시 느끼게하는 글 고맙네 !!
성구가 매 달 참가하겠다고 하더라. 나는 허리 때문에 벌써 몇 년 째 참석 못하고 있는데, 언제 기회가 생기겠지. 너무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