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개념이 사라졌을까요? ...
오리무중(五里霧中) 이란 말은 오리나 되는 짙은 안개 속에 있다는 뜻으로
무슨 일에 대하여 방향이나 갈피를 잡을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지요
여기서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대하여 한문을 풀어보면
五 : 다섯 오
里 : 마을 리
霧 : 안개 무
中 : 가운데 중
즉 다섯마을이 안개 가운데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말의 유래는 중국의 후한 말엽에 있었던 장해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라 하네요
후한시대 말엽은 외척(왕의 외가 친척)과 환관들이 왕을 무시하고 세력을 다투는 시대였지요
이 시대의 혼란기 이후 중국역사는 삼국시대로 넘어가지요
당시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지방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토지귀족(호족)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소, 조조, 손권 등도
사실은 지방호족들이라고 볼수 있어요
후한시대 때에는 자고 일어나면 왕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황제가 자주 바뀌던 시대였지요
그것도 외척과 환관들이 서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왕으로 옹립하던 시기였어요
당시 화제라는 왕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고 상제라는 왕도 즉위하자마자 1년도 못되어 죽었어요
이유야 어찌되었든 계속 어린 왕이 즉위하고 정치의 실권이 계속 바뀌는 시기였지요
다음 왕은 안제였는데 정치실권은 죽은 전 황제 부인인 등태후와 그의 오빠 등줄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화제-상제-안제로 이어지는 왕실에서 가장 명망있는 신하는 시중인 장패(張覇) 였지요
그러나 장패는 황제가 자주 바뀌고 나라에 멸망의 기운이 돌자 정치적 실권을 가진자들이 아무리 우대해도
시큰둥하더니 결국 권력을 멀리하고 떠나 은둔하며 초야에서 고고하게 살아갔어요
결국 세상 사람들은 그의 완고함을 비웃었고 얼마후 그는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그런데 장패(張覇)에게는 <장해(張楷)> 라는 훌륭한 아들이 있었어요
이 장해도 학식이 깊고 명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요
장해 역시 아버지를 닮아 《춘추》 《고문상서》등에 정통한 학자여서 제자가 100여명에 이르고
이름있는 학자들이 모두 그의 문을 두드렸으며 세도가들도 그와 가까이하려고 애를 썼다 하네요
그러나 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때묻은 자들과 섞이기를 싫어하며 시골로 들어가 숨어 살았어요
특히 장해가 권력을 마다하고 학문에 열중한다는 소문이 돌자 더욱 장해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조정에서는 장해를 찾아 금은보화를 들고 찾아오곤 했지요
왕은 <장해(張楷)는 청렴결백하고 그 절개가 백이 숙제와 같구나> 라면서 장해를 칭찬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왕이 초빙하여도 장해는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조정에 나가지 않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장해를 초빙하려고 해도 장해는 만나주지를 않았는데
장해를 만날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고 하네요
그 이유는 바로 장해가 도가(道家)에서 비기(秘記)로 전해지는 <도술(道術)> 을 익혔기 때문이지요
태왕사신기에 보면 현무의 사신이 안개를 일으켜 시야를 가렸는데 장해도 그런 도술을 썼다 하는군요
장해는 학문만 잘한 것이 아니라 도술에도 능하여 곧잘 5리에 걸쳐 안개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오면 도술(道術)을 써서 안개로 자신을 찾을수 없게 만들었다 하네요
이 안개가 5리에 이른다고 하여 <5리무(五里霧)> 라고 소문이 났어요
당시 관서에 살던 배우(裴優) 라는 사람도 도술로 3리에 걸쳐 안개를 만들수 있었지만
5리 안개를 배우고자 장해를 찾았으나 장해는 오리 안개에 자취를 감추고 만나주지 않았지요
그래서 오리무중(五里霧中) 이란 말이 생겨났다 하네요
장해가 은거하는 동안에도 여러 황제가 바뀌었지요
황제가 바뀔때마다 장해를 초빙하였으나 번번히 사절을 당하자 권력자들이 화가 났어요
그러던중 5리 안개의 도술을 배우러 갔던 배우(裴優) 가 안개를 일으켜 나쁜짓을 저질렀다가 잡히자
그 도술을 장해에게서 배웠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장해는 억울하게 2년 동안 반역죄로 옥살이를 해야 했어요
옥중에서 그는 경적(經籍)을 읽고 상서의 주를 달았으며 학문에 매진 했지요
뒷날 배우(裴優)의 모함임이 판명되어 풀려났지만 다시 은둔 생활을 하였어요
그 뒤 환제(桓帝)때에 다시 초빙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고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네요
훗날 후세사람들은 장해의 은둔 생활을 오리무중(五里霧中)으로 일컬으며 그를 추앙했다 하는데
그러다보니 오리무중(五里霧中) 이란 고사가 생겨 났어요
오리무중(五里霧中)의 뜻은
첫번째로 5리에 걸친 안개 속에 들어서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찾을사람을 찾을수도 없게 되는것 즉 동서남북의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뜻이지요
두번째는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하얗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지지 않고
마음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네요
요즘 일본과의 무역마찰이 오리무중이 된듯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렀지요
일본과는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이지만 1965년 국교정상화이후 지금처럼 멀어진적은 없었지요
제2차 세계대전당시 적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지금은 두터운 우방이 되었고
베트남 또한 총뿌리를 겨누던 적이었지만 지금은 굳건한 우방이 되었지요
그래서 국제외교란 자국의 이해득실(利害得失)에 따라 변화는 것이라 했어요
이웃은 중요한 것이지요
핵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선 더욱 그렇지요
특히 유엔사의 전방사령부는 서울에 있지만 후방 사령부는 일본에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북한은 금년 4월 11일 헌법개정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천명하였고
한반도를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하겠다는 노골적인 적화야욕을 드러내고 있지요
이런 와중에 지금껏 우방으로 지내오던 일본과 과거사 문제로 멀어진다면
앞과 뒤 옆(북한,일본,중국) 모두가 적으로 둘러싸이는 형국이되는데
이것은 거국적인 의미에서 최악의 수가 아닐수 없어요
어찌되었든 국민들을 반일감정으로 몰고 갈것이 아니라
외교라인을 총동원하여 원만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요
아무튼 5리(五里)의 안개를 만들었다는 후한 말기 도술가 장해(張楷)
장해가 죽은 뒤 중국에서는 장각 등 장씨성을 가진 자들이 도술을 부려 태평도를 일으키고
후한을 멸망시키는 운동을 하게 되었지요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은 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태평도> 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조직적으로 국가에 저항한 사건이지요
기록에는 자세하진 않지만 후한 말기의 도술가들은 <장(張)> 씨 성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하네요
참고문헌 : 후한서(後漢書) 장해전(張楷傳)
-* 언제나 변함없는 일송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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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네요
꽃그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늘 건강과 행운이 가득한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