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로마 유대 전쟁이 끝난 지 42년 후인 115년, 유대인들은 로마에 맞서 두 번째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 115년은 로마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로마의 강적인 파르티아를 공격하기 위해 로마군 대부분을 이끌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이 있는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를 공격하러 떠난 시기였다.
유대인 저항군들은 로마군의 주력이 메소포타미아로 떠난 지금이 좋은 시기라고 판단하여, 로마군의 후방인 니시비스, 에데사, 셀레우키아, 아르벨라(현재 이라크, 아르빌)에서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도시들에 주둔한 소규모의 로마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이집트에서도 로마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문헌들에 의하면 키레나이카에서 유대인 반란군은 자신을 왕이라고 불렀던 지도자인 루쿠아스(또는 안드레아스)에 의해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루쿠아스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 반란군은 헤카테, 주피터, 아폴로, 아르테미스, 이시스의 사원을 포함하여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많은 사원들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이는 1차 로마 유대 전쟁에서 로마군이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추측된다.
키레나이카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수많은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그 결과 키레나이카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4세기의 기독교도 역사가인 오로시우스(Orosius)는 이때 키레나이카에서 유대인 반란군이 현지 주민들을 거의 몰살시켜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다른 지역에서 선발한 주민들을 키레나이카로 이주시켰다고 기록했다.
또한 로마의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유대인 반란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다만 지나친 과장이 섞여 있는 듯하다.
“키레네 지역의 유대인들은 안드레아스 한 명을 지도자로 삼고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죽인 사람들의 살을 요리로 만들어 먹었고, 내장을 뽑아내어 허리띠로 삼았고, 피를 올리브 기름처럼 몸에 발랐고, (사람의?)가죽을 벗겨 옷으로 만들어 입고 다녔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붙잡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아래쪽으로 두 개씩 톱질을 하거나, 혹은 짐승들한테 먹이로 주거나 검투사가 되어 싸우도록 강요하여 죽였다. 이런 잔인한 학살로 인해 20만 명이 죽었다.
키프로스에서는 아르테미온(Artemion)이라는 지도자가 이끈 유대인 반란군이 섬을 장악하였는데, 키프로스에 살고 있었던 24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한테 학살을 당했다. 로마 군대가 키프로스로 파견되어 곧 수도를 점령했다. 반란이 완전히 패배한 후 유대인이 섬에 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키레나이카의 유대인 반란군 지도자인 루쿠아스는 이집트의 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반란군을 이끌고 쳐들어가서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인해 이집트의 신들을 섬기는 사원들과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의 무덤이 파괴되었다. 아울러 116년 헤르모폴리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유대인 반란군은 현지의 로마군 수비대와 싸워 이겼다.
이처럼 로마군의 후방에서 계속 유대인 반란군의 폭동이 이어지자, 트라야누스 황제는 더 이상의 파르티아 원정을 중단하고 서둘러 철수하였다.
이집트는 로마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를 갖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로마군에게 곡물을 공급하는 식량 창고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군에게 공급되는 식량 운반 수송로가 위협을 받자, 더 이상 보급이 어려워서 로마군이 파르티아 원정을 계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루시우스 퀴에투스(Lusius Quietus)와 마르시우스 투르보(Marcius Turbo) 등의 장군들한테 군대를 주어서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와 키프로스로 군대를 보내어 반란을 진압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로마군과 유대인 반란군의 전투는 117년 가을에까지 계속되었는데, 결국 로마군이 승리하여 유대인 반란군의 지도자인 루쿠아스는 유대로 도망을 쳤다.
또한 유대인 반란군의 다른 지도자인 율리안과 파푸스 형제는 리다에서 로마군에 맞서 농성을 벌이다가 결국 로마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유대인들의 반란은 마침내 로마 장군인 루시우스 퀴에투스에 의해 진압 당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반란은 그것을 끝낸 로마 장군인 퀴에투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키토스(Kitos)의 명칭이 더해져 훗날 키토스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2년 동안 키토스 전쟁을 치르느라 로마는 적수인 파르티아를 제압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이 사건으로 인해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더더욱 미워하게 되지 않았을까?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49~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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