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뒷 산에 오르다.
내 고향, 시골에 왔다, 가족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너무도 오랜만에 천천히 동네 뒷 산에 오른다.
내 어릴적에는 참나무가 무척 산에 많았다. 그래서 가을에는 도토리 떨고 줍는게 일상이였다.
도토리는 참나무가 주는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도토리묵도 쑤어 먹고,
도토리 빈대떡도 부쳐 먹었다.식량이 모자라던 시절, 일종의 식량 대체품이였다.
참나무가 많았지만 남들이 먼저 도토리 주워 갈까봐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무로 만든
떡메와 도토리 담을 빈 자루 하나 들고 산으로 향했다.
떡메로 참나무를 두들겨 흔들림을 주면 도토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나면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자루에 주워 담았다.
그래서 뒷산 참나무는 떡뫼에 매년
얻어 맞아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며칠만에 만나는 나무에선
소낙비 내리듯 요란하게 도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가을이 지나면 대충 도토리 몇 가마는 주웠다,
지금은 그리 큰 참나무가 없다. 모두 베어내고, 정부정책에 따라
유실수인 밤나무가 심겨졌다. 벌써 30년도 넘었다,
그래서 지금은 도토리 대신 밤을 줍는다,
도토리는 소유권이 좀 애매했지만 밤나무는 유실수라
확연히 소유권이 있어 남이 주워갈 수 없다.
추석즈음 시골에 가면 한 자루씩 밤을 주워 오곤한다.
산에 오르니 예전에 있던 오솔길이 이젠 완전히 없어졌다.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길은 자연히 소멸되어 버렸고, 밤나무 관리를 위해
제초된 부위 공터를 따라 동산에 오른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기억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바위들이다.
천천히 오솔길을 기억하며 낮은 뒷동산에 올랐다.
낯 설었다. 30여년만에 처음 오른 뒷 동산, 어릴적에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뛰 놀며
올랐는데 직장 다닐때는 고향에 와도 오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무엇이 그리 바쁘게 살도록 만들었는지?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겼는가?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줄 알았다. 지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데~.
실제 마음 문제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제 좀 여유를 찾아 보자.
저 아래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그리고 조치원과 제천을 잇는
충북선 철길, 남한강을 가로 지르는 철교. 그 위로 새로 설치된 충주댐.
내가 졸업한 동량초등교. 모두가 새롭다. 그리고 아련한 모습. 어린시절이 생각난다.
저 아래 남한강에서 다슬기도 많이 주웠는데~, 그리고 기차 오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철교도 불법으로 걸어서 건너기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충주댐이
생기고부터 교량도 생겼고, 도로가 확,포장되면
새로운 충주댐 관광지가 되었다. 단양까지 유람선이 오,가고 가을이면
댐 양쪽 산들의 단풍모습이 물길따라 펼쳐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정말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그리고 산봉우리에 있던 의자 바위는 그대로 세월의 흐름이 있었지만
그대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돌 의자에 앉아 저 아래 강물을 내려다 본다.
예전에는 강변에 미루나무가 참 많았는데? 지금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고향 떠난지 어언 60여년이 지났다.
나무없던 산봉우리에도 나무와 숲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칡 덩굴이 아무렇게나 깔려 뻗 어 나가고, 초록숲은 무성히도 자랐다.
나무는 성장했고,
그 숲을 찾는 새들의 울음소리도 활기차게 울려온다.
정말 오랜만에 오른 내 고향, 뒷 동산 정상. 당시 준지봉이라 불렀다.
감회가 새롭다. 어린시절 꿈들이 소록, 소록 살아난다.
나는 그 꿈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첫댓글
네...
고향엘 다녀오셨어요
고향의 향수는 누구나 그리운 고향이란 두 글자
어린시절을 회상해 보시면서
참 정겨운 아니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해 보신
고향의 글 한페이지가 참 좋네요
강추드립니다
@행운
요즘에도 장미가 있나 봅니다
일산호수 장미동산을 두루 좀 더터 보고싶은데
아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