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지마 니까야 [작은 한 쌍의 품] 44. 교리문답의 작은 경 [Cūḷavedallasutta]
23.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얼마나 여러 가지 느낌이 있습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입니다.”
24.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어떠한 것이 즐거운 느낌이고, 어떠한 것이 괴로운 느낌이고, 어떠한 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정신과 관련되거나 신체와 관련된 즐거움으로 유쾌한 느낌이 있는데, 이것이 즐거운 느낌입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정신과 관련되거나 신체와 관련된 괴로움으로 불쾌한 느낌이 있는데, 이것이 괴로운 느낌입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정신과 관련되거나 신체와 관련된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있는데, 이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입니다.”
25.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은 무엇을 즐거움으로 하고 무엇을 괴로움으로 하고, 괴로운 느낌은 무엇을 괴로움으로 하고 무엇을 즐거움으로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무엇을 즐거움으로 하고 무엇을 괴로움으로 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은 자신이 유지되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고 변화를 괴로움으로 하고, 괴로운 느낌은 자신이 유지되는 것을 괴로움으로 하고 변화를 즐거움으로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앎을 즐거움으로 하고 알지못함을 괴로움으로 합니다.”
26.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에는 어떠한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어떠한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어떠한 경향이 따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경향이 따릅니다.”
27.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경향이 따르고, 모든 괴로움의 느낌에는 분노의 경향이 따르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지의 경향이 따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탐욕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분노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무명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28.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합니다.”
29.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그렇게 해서 탐욕을 버리고 탐욕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습니다. 2)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지금 고귀한 님이 성취한 그러한 경지에 내가 반드시 도달하리라’라고 이와 같이 위없는 해탈에 대하여 서원을 세운 사람은 서원을 조건으로 불만은 생겨나지만, 그렇게 해서 분노를 버리게 되며,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습니다. 3)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이미 생겨난 만족과 불만이 사라지면 즐거움도 뛰어넘고 괴로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30. [비싸카] “존쉬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괴로운 느낌입니다.”
31.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괴로운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괴로운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32.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응하는 것은 무명입니다.”
33.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무명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무명에 대응하는 것은 명지입니다.”
34.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명지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명지에 대응하는 것은 해탈입니다.”
35.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해탈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해탈에 대응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36.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열반에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그대의 질문의 범주를 벗어난 것입니다. 질문의 끝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참으로 청정한 삶은 열반으로 드는 것이며, 열반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열반을 궁극으로 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비싸카여, 그대가 원한다면, 세존을 찾아 뵙고 그 의미를 질문하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그대에게 설명하시는 대로 받아 지니십시오.”
중아함경 제 58 권 동진 계빈삼장 구담 승가제바 한역 17. 포리다품 제 3 ④
210) 법락비구니경(法樂比丘尼經) 제 9 [제5 후송]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몇 가지 감각[覺]이 있습니까?" "세 가지 감각이 있으니 곧 즐거운 감각 괴로운 감각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인연하여 있게 되는가? 갱락(更樂)을 인연하여 있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어떤 것이 즐거운 감각이며, 어떤 것이 괴로운 감각이며, 어떤 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입니까?" "만일 즐거운 갱락에 부딪치면 몸과 마음에 즐겁고 좋은 감각이 생기나니, 이 감각을 즐거운 감각이라 합니다. 만일 괴로운 갱락에 부딪치면 몸과 마음에 괴롭고 좋지 않은 감각이 생기나니, 이 감각을 괴로운 감각이라 합니다. 만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갱락에 부딪치면 몸과 마음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좋지도 않고 좋지 않은 것도 아닌 감각이 생기나니, 이 감각을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라 합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즐거운 감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즐겁고 어떤 것이 괴로우며, 어떤 것이 무상(無常)하고 어떤 것이 재환(災患)이며, 어떤 것이 번뇌[使]입니까? 괴로운 감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즐겁고 어떤 것이 괴로우며, 어떤 것이 무상하고 어떤 것이 재환이며, 어떤 것이 번뇌입니까? 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 즐겁고, 어떤 것이 괴로우며, 어떤 것이 무상하고 어떤 것이 재환이며, 어떤 것이 번뇌입니까?" "즐거운 감각에 있어서는 생기는 것은 즐겁고 머무르는 것도 즐거우나 변하는 것은 괴롭고, 무상한 이것이 곧 재환이 되며, 탐욕[欲]이 그 번뇌[使]입니다. 괴로운 감각에 있어서는 생기는 것은 괴롭고 머무르는 것도 괴로우나 변하는 것은 즐겁고, 무상한 이것이 곧 재환이며, 성냄[?]이 그 번뇌입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에 있어서는 괴로운 것도 알지 못하고 즐거운 것도 알지 못하며, 무상한 것으로 곧 변하는 것이며, 무명(無明)이 그 번뇌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모든 즐거운 감각은 다 탐욕이 그 번뇌가 되고, 모든 괴로운 감각은 성냄이 그 번뇌가 되며, 모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은 무명이 그 번뇌가 됩니까?" "즐거운 감각이라 하여 모두가 다 탐욕이 그 번뇌가 되는 것은 아니요, 괴로운 감각이라 하여 모두가 다 성냄이 그 번뇌가 되는 것은 아니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라 하여 모두가 다 무명이 그 번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즐거운 감각이 탐욕의 번뇌가 아닌가? 만일 비구가 탐욕을 여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탐욕의 번뇌가 아닌 즐거운 감각이라 합니다. 왜냐 하면 탐욕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괴로운 감각이 성냄의 번뇌가 아닌가? 만일 최상 해탈의 즐거움을 구하여 원하고, 애를 쓰며 근심하고, 괴로워하면, 이것을 성냄의 번뇌가 아닌 괴로운 감각이라 합니다. 왜냐 하면 성냄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 무명의 번뇌가 아닌가?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고, 기쁨과 걱정의 뿌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不苦不樂] 평정[捨] 기억[念] 청정(淸淨)이 있는 제 4 선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무명의 번뇌가 아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라 합니다. 왜냐 하면 무명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즐거운 감각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즐거운 감각은 괴로운 감각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괴로운 감각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괴로운 감각은 즐거운 감각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감각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감각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은 무명(無明)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무명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무명은 명(明)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비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찬탄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명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명은 열반으로 상대를 삼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어진이여."
바사가 우바이는 이렇게 대답한 뒤에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어진이여, 열반에는 어떤 상대가 있습니까?" "그대는 끝이 없는 일을 묻고자 하는군요.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물어도 내 대답의 끝을 다하진 못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열반은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반은 그물이 없고, 그물을 벗어나고, 그물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존을 따라 범행을 행합니다." 이 때에 비사가 우바이는 법락 비구니의 설법을 들어 잘 받아 가지고, 잘 외워 익힌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려 법락 비구니의 발에 절하고 세 번 돌고 떠나갔다. 이에 법락 비구니는 비사가 우바이가 떠난지 오래지 않아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아 비사가 우바이와 나눈 이야기를 부처님께 모두 말씀드린 뒤에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 아뢰었다.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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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저는 3수 중에서 즐거운 느낌은 애욕을 발생시킨다고 말해왔는데요.
니까야에서는 애욕을 갈애란 말로 사용합니다.
이 갈애란 용어도 갈망+사랑으로 보면 애욕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3수는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3가지입니다.
저 중에서 즐거운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발생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5온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면,,,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제가 들은 말을 정리해보면 다음 두 가지 경우 같습니다.
1. "3수는 어느 하나로 나누어볼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수는 애의 원인으로 그냥 알면 된다."
2. 갈애는 갈망+사랑이 아니라, 5욕을 탐하는 것이다. 따라서 3수가 모두 갈애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1번은 수도 애도 관찰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모르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2번은 12연기 등에서 나오는 노사우비고뇌에서의 '고'와 무명과 갈애, 탐욕 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는 듯합니다.
이런 경우 구별을 못하기 때문에 탐욕, 갈애, 탐진치, 욕망, 욕구 등의 용어를 혼동하여 사용합니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경에서는.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합니다.]
라는 말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교리문답의 작은경과 법랍비구니경을 함께 보면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데요.
교리문답의 작은경에서는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경향이 따릅니다]
라고 말합니다.
중아함의 법락비구니경에서는,
[즐거운 감각에 있어서는 생기는 것은 즐겁고 머무르는 것도 즐거우나 변하는 것은 괴롭고,
무상한 이것이 곧 재환이 되며, 탐욕[欲]이 그 번뇌[使]입니다.
괴로운 감각에 있어서는 생기는 것은 괴롭고 머무르는 것도 괴로우나 변하는 것은 즐겁고,
무상한 이것이 곧 재환이며, 성냄이 그 번뇌입니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감각에 있어서는 괴로운 것도 알지 못하고 즐거운 것도 알지 못하며,
무상한 것으로 곧 변하는 것이며, 무명(無明)이 그 번뇌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두 경전에서 보시는 것처럼 대체로 용어의 사용이 정연합니다.
사실 중아함의 법락비구니경이 더 자세하죠.
정리하면,
즐거운 느낌은 생기는 것과 머무는 것은 즐겁지만 변하는 것이 괴롭고 무상한 이것이 재환이 되며, 탐욕이 번뇌입니다.
괴로운 느낌은 생기는 것과 머무는 것은 괴롭지만 변하는 것은 즐겁고 무상한 것이 재환이며, 성냄이 번뇌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지 못하여 무상한 것으로 번하며, 무명이 번뇌입니다.
만일 관찰이 정확하다면,,,
또는 최소한 경전이라도 읽어보았다면,,,
기본적인 용어를 혼동하여 사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3수 가운데 괴로운 느낌은 슬픔과 근심 등이 만들어진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수행을 해서 말한 것도 아니고, 살다보니 그렇고, 이런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저런 질문을 해서 들은 말은 경전을 읽어보라는 말 뿐입니다.
제가 갖고 온 것이 경전인데도 말입니다...
또한 5온이 색수상행식이고 그 중에 느낌을 질문하는 것이란 말을 자세히 해줍니다.
그런데 계속 같은 말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저러면서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좀더 들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몰아붙입니다.
용어정리가 안 되어 구분도 안 되는 글을 써주면서요...
5온을 안다면 3수는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도 말입니다.
저는 실론섬님께서 말씀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위에서 소개한 경전을 자세히 읽지 않으셨군요.
저 느낌이 어떤 방식으로 해탈이 되는지 그대로 복사해드리겠습니다.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탐욕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분노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무명의 경향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28.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합니다.”
29.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모든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탐욕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하여 분노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명의 경향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그렇게 해서 탐욕을 버리고 탐욕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습니다.
2)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지금 고귀한 님이 성취한 그러한 경지에 내가 반드시 도달하리라’라고 이와 같이 위없는 해탈에 대하여 서원을 세운 사람은 서원을 조건으로 불만은 생겨나지만, 그렇게 해서 분노를 버리게 되며,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습니다.
3) 벗이여 비싸카여, 세상에서 수행승은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이미 생겨난 만족과 불만이 사라지면 즐거움도 뛰어넘고 괴로움도 뛰어넘어 평정하고 새김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람을 몰아붙이시는 경향이 있으신 듯합니다.
쓰레기나 돌대가리. 지적수준 같은 천박한 말씀도 하시고 두둘겨 패겠다는 위협도 하시는군요.
아마도 이것이 분노할 때의 님의 모습일 듯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가라앉히시고 경전을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5온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면,,,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훈계를 쓰레기나 돌대가리. 지적수준 같은 천박한 말씀이나 두둘겨 패겠다는 위협으로 하시는군요.
잘못된 습관은 고치시고, 경전을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5온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면,,,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여기서 글을 쓰지 않아도 괜찮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초기경전에 있는 3수의 내용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글을 쓴 것 뿐입니다.
그러나 써봐야 논쟁만 되니 님의 말씀대로 이젠 그만 쓸 것입니다.
여기에 오더라도 글만 읽어보겠습니다.
대화 내용 모두 캡처해놓았습니다.
자꾸 위의 글처럼 상대를 비하한다든지 협박하는 듯한 말씀을 계속하시면,
신고해서 좀더 객관적인 판단을 받아보겠습니다.
애욕과 분노(저항)는 동전의 양면과 같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고 그렇게 말씀 드렸는데....
이것을 느낌이 있으면 갈애가 생긴다고....
그렇게 설명해도 동전의 양면을 분리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왜 계속해서
스스로 비난을 자초하는지....
즐거운 느낌이 생기면 그것을 계속 취하려거나, 더 좋은 즐거운 느낌을 취하려 한다. 이것을 갈애라 한다.
괴로운 느낌이 생기면 원하는 즐거운 느낌을 취하지 못해 분노(저항)가 생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분노는 즐거운 느낌을 취하려 하는 갈애의 다른 면의 표현이다. 즉 동면의 양면중 하나다.
갈애란 말때신 끝까지 애욕이란 말을 고집하여 愛란 측면만 보아 개념정립에 실패마시고...
그러면 괴로운 느낌은 어디로 갔나?하는 질문, 이것은 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깊이 사유하시면 됩니다.
혼자 만의 공부로 해서 이해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하는 것은 오류와 위험성의 한계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배운 내용과 방법이 행복님이 생각하기에 이상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님이 판단하실 문제니까
어떠한 판단을 하여도 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를 수준 낮은 놈이라 해도 좋고, 공부가 덜 된 놈이 설친다해도 좋고....
단, 제발 다른 곳에서라도 스승이나 훌륭한 선우에게 경전의 용어와 기초부터 해탈의 여정까지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 이치를 배우시고 다시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사유해보시기를...
혼자서 경전을 몇번 보았다. 할 것은 다해보았다는 식으로 해서 쉽게 판단하고 이해하지 마시고...
적어도 나를 포함한 우리는 가르치는 스승이 있고 또 질의와 답변을 통해, 많은 분들과 수많은 토론을 통해 내린 판단이므로 개인 혼자의 이해와 판단보다는 오류와 오판의 위험성이.....
두 번 다시 댓글을 달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다시 주장하는 내용을 보고 또 쉽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피할 수 있는 비난을 받는 것을 보니까 안타깝네요.
다시는 간섭과 재토론은 원하지 않으니 염려마시고
자신의 공부하는 방법과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깊이 사유해보시길 바랍니다.
_()_
참괴님께서 말씀하셔서 다시 글을 씁니다.
자세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즐거운 느낌이 생기면 그것을 계속 취하려거나, 더 좋은 즐거운 느낌을 취하려 한다. 이것을 갈애라 한다.
괴로운 느낌이 생기면 원하는 즐거운 느낌을 취하지 못해 분노(저항)가 생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분노는 즐거운 느낌을 취하려 하는 갈애의 다른 면의 표현이다. 즉 동면의 양면중 하나다]
로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제가 '애'의 측면만 보아 개념정립에 실패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님은 제가 말하는 내용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제가 알고자 하는 문제는 오직 괴로운 느낌 바로 다음엔 무엇인가?입니다.
님께서는 저에게 지속적으로 어떤 수행을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것이 합리적인 설명이고 초기경전과 일치하다면 누가 안 배우겠나요?
그러나 초기경전이 아닌 금강경에 기초를 둔 곳이라서 가고 싶어도 못 가고 배우고 싶어도 못배우는 겁니다.
만약 제가 님께서 쓰신 위의 내용 중에 잘못된 곳을 찾아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찾아낸다면 님께서 그동안 잘못 수행하신 것이니, 말씀하시는 그곳을 그만 두실 수 있겠습니까?
위의 그만둔다는 조건으로 자신 있으시면 댓글에 적어주십시오.
다시 한 번 토론해드리겠습니다.
금강경에 기초를 둔 곳이란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함부로 검증도 하지도 않고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개인의 짧은 생각으로 판단하여 매도하지 마십시오.
행복님은 모든 것을 자기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야기를 해주어도 부분에 얽매여 엉뚱한 것으로 이해를 하고 전체의 뜻을 파악하기 보다는
당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찾으려 합니다.
토론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습니다.
틀린 곳을 찾아내고 잘못 수행한 것을 알 정도의 수준이고
몇 번의 짧은 대화로 모든 것을 판단할 정도의 수준인 분인데.....
님은 님의 길로 계속 가시면 되고 저는 제 길로 갈겁니다.
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으니....
금강경에 대한 법문을 듣고
그 길로 바로 내가 가진 금강경 서적을 모두 없애 버렸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에 물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아무 설명없이 초기불교를 배우고 초기경전을 읽으라 하는 것보다
금강경의 잘못된 것을 먼저 설명하며 초기경전의 용어와 기본 개념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뒤.
초기경전의 기초부터 12연기, 사성제 등에 관한 법문을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구조와 세계를 벗어나는 원리와 무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논법을 빌려 설명을 한 것이나.
그 설명은 기존 금강경 내용과 전혀 다르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경에 기초를 둔 곳이라 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초기불교를 배우고 초기경전을 읽으라 하면서
금강경을 기초로 하는 놈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완전히 미친 놈이지.
내가 당신보고 금강경이 소중하다 했습니까? 읽고 배우라 했습니까?
진지하게 한 번 사유를 해보시고
나의 표현과 글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인정할 수도 있지만
함부로 금강경을 기초로 한다는 말, 공공연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댓글은 더이상 하지않겠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댓글을 달게 만드네요.
그냥 자신의 생각과 이치에 맞지 않으면 더이상 접하지 마시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집단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공개적으로 하는 일방적 비방은 삼가해주길..
_()_
무슨 수행인지는 몰라도 수행을 해야한다고 몰아붙이시더니, 막상 그 수행한 내용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물으니 못하시는군요.
그만두죠.
그런데 자꾸 님의 견해가 초기불교라 하시는데요.
그냥 금강경 견해입니다.
일반적으로
"a는 a가 아니라서 a라고 한다"는
금강경의 논법과
"a는 그것에 붙여진 이름이라서 a라고 한다"는
초기경전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저 금강경의 논법을 근거로
"자기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는다"는 내용에서
'atta'를 가지고,
'atta'는 'atta'가 아니라서 'atta'라고 한다로 금강경을 베꼈지요?
그래서 저렇게 하면 진아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트만과 브라만 논법입니다.
그만둡시다.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이해할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니
수행을 같이 하라는 것은 잘못된 말이 아니지만
일부분이나 말꼬리 잡아 말하는 사람한테 수행에 관해서 말한듯 무슨 소용있나요
그리고 "a는 그것에 붙여진 이름이라서 a라고 한다" 'atta'는 'atta'가 아니라서 'atta'라고 한다로
이러한 당신의 해석과는 천지 차이라는 것을 말해주지요.
금강경을 책이 닳도록 봤다는 당신의 해석은 고작 위 수준으로 머물지만 나는 저런 식의 설명은 절대 아니니
더이상 혼자서 확대해석하여 판단하지 마세요.
기본 용어나 개념 조차도 정립되지 않은 사람한테 그것을 무시하고 말한 내 잘못이 크지요.
호의로 시작해서 견해가 달라서 쿨하게 서로 끝내놓고
여기서 공개적으로 왜 이렇게 하시는지 참 씁쓸하네요.
간만에 치밀어 올라오는 화라서 그런지 좀처럼 다스리기 힘드네요.
첫 번째는 나의 글과 설명이 한참 부족하여 졸지에 금강경 신봉자로 되버린 나한테 화가 나고
두 번째는 모든 것의 판단을 자신의 기준 잣대로 간단히 판단해 버리는 당신의 조급성과 비난의 글에 화가 납니다.
더이상 쓸데없는 상호 비난 그만합시다.
당신도 이런 카페에서 글을 올리고 토론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고
나 또한 아직은 글을 올릴 자격과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제 갈 길로 가고 각자가 더 공부하고 수행한 뒤 다시 판단합시다.
당신도 자신은 아니라 하지만 "나는 안다, 알고 있다. 이해를 했다'는 오만함과 자만심이 있는 것 같고
나 또한 조금 초기경전을 이해했고 그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오만함과 자만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올리고 누구에게 설명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많이 착각하여
받지 않아도 되는 비난과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잘못되고 부족한 설명으로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것에 대한
책임에 대한 통감으로 카페 활동을 이 시간으로 접고 탈퇴하겠습니다.
언젠가 말하지 않아도 오해가 풀릴 때가 오겠지요.
각자의 공부와 견해가 성숙해질 때까지 비난과 비판보다는 공부와 수행에 매진합시다.
_()_
님께서 쓰신 글의 맨 처음을 보세요.
이젠 여기서 글 안쓴다는 저의 댓글 아래에 님의 글이 덧붙어 있지요?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보면 아실텐데도 남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럼 바로 위의 내용이 님의 수행 결과인 것이죠?
저 내용을 확인해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면서 제가 잘못되었다면서 이따위 질문이니 하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그러니 만약 위의 내용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낸다면 님께서 하신 수행이 잘못된 것이니 그 수행하는 곳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이리저리 돌려말하지 마세요.
님께서 자신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것을 듣고나서 토론해드리겠습니다.
참괴님의 글을 보니 이제 정리가 된 듯합니다.
atta는 산스크리트어 atman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초기불경 전체에 널려 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저 중요한 대전제와 같은 것에 오류가 있다면, 나머지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입니다.
어떤 대전제가 되는 용어의 오류가 나중에 얼마나 큰 평지풍파를 만드는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보니 참괴님 죄송합니다.
위의 글은 실론섬님의 말씀이시네요.
실론섬님의 말씀은 어느 쪽으로 보면 옳습니다.
그러나 세밀하지 않습니다..
자세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욕구, 욕망, 갈애, 탐욕, 욕탐, 번뇌, 사랑 등을 혼동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만들어지는가?라는 주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5온에 대한 관찰이 정확하다면,,,
느낌에는 3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은 그만 두고,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갈애가 갈망+사랑이 아니라고 하시는데요.
모두 뭉뚱그려서 보기 때문입니다.
초기경전을 많이 읽으시면서 하나 하나 구분하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12 쌍윳따 인연모음
12:66(7-6) 성찰의 경
8. 또한 그는 숙고하면서 내적인 성찰을 한다.
그런데 이 갈애가 생겨나면 어디에서 생겨나고 들어가면 어디로 들어가는가?‘
그는 숙고하여 이와 같이 안다.
‘세상에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마다 갈애가 언제나 거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거기로 들어간다.
그런데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은 무엇인가?
1) 시각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갈애는 언제나 여기에서 생겨나고 언제나 여기로 들어간다.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도 마찬가지다.
... ...
11. 수행승들이여, 또한 현재의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행복하다고 보고
자기라고 보고 건강하다고 보고 안온하다고 본다면,
그들은 갈애를 키우는 것이다.
갈애를 키우는 사람은 집착을 키우는 것이다.
8) 갈애 tanha.
[세존] "수행승들이여, 형상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수행승들이여, 소리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수행승들이여, 냄새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수행승들이여, 맛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수행승들이여, 감촉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수행승들이여, 사물의 갈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은 마음에 수반되는 번뇌이다.
맛지마 니까야 [데바다하의 품]
105. 쑤낙캇따의 경[Sunakkhattasutta]
19. 쑤낙캇따여, 또한 세상에 어떤 수행승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수행자가 말하길, 갈애는 화살이고, 무명의 독극물은 욕망과 탐욕, 분노를 통해서 퍼져나간다.
나에게서 갈애의 화살은 뽑혀졌고 무명의 해독은 제거되었다.
나는 완전한 열반을 지향한다.’
경전에 나오는 각각의 용어는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 용어가 나오면 그에 따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 따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전에서 조금씩 다른 용어들을 옮겨놓았습니다.
모든 대화는 이제 그만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편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화가 난다고 초기불교 공부 하시는 선우님들께서 탈퇴를 하시면 어떡 합니까?
공부를 하다가 보면 너무나 많은 용어들 복잡한 이해 구성으로 오류도 범할수 있는것인데
또한 글을 올리면서 오류가 있으면 지적하는분의 부위를 다시 한번 정확하게 공부하여 이해를 하여
좋은 논박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참괴님이 가셨네요
이글 보시면 화 푸시고 오실것을 권 합니다
초기불교 공부에 있어서 필요한분 입니다
기다립니다...필요하며 쪽지 주시면 막걸리 한잔 드리겠습니다 _()_
글을 안쓴다고 하면서도 안타까워 또 씁니다.
정말로 느낌을 관찰해본 적은 있으신가요?
느낌을 관찰해보았으면 3수가 동시에 발생하는게 아니란 것을 아실겁니다.
느낌은 즐거운 느낌이면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이면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으로, 이렇게 한 번에 하나씩 관찰됩니다.
그 중에서 즐거운 느낌이 아니라, 괴로운 느낌이 주제라고 그리 말해줘도 이해를 못하십니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경전을 찾아보시던가,
수행 어쩌고 하는 경험을 논의하시겠다면,
바늘로 허벅지라도 한 번 찔러본 다음 어떤 견해를 말씀하시면 좋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1번이 주제입니다
실론섬님 여러 가지 좋은 자료와 자세하신 설명 감사합니다.
사실 6수로 보면 정신적 괴로움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말씀해주신 내용처럼 괴로운 느낌은 갈애를 발생시키는게 아니라 슬픔,근심,절망,분노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연기법에서 노사우비고뇌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세 가지 갈애에 대한 붓다고싸의 해석과 만나게 됩니다.
즉, 비존재에 대한 갈애의 설명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붓다고싸의 저 해석이 문제인데요.
느낌이 한 가지씩 발생 또는 인식된다는 관찰이 간과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붓다고싸라는 분의 비중 때문에 어려울 수가 있어요.
그리고 경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 퇴근하고 밤에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실론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몸이 아파서 고통스러워 병실에 누워있을을 때 몸이 안아프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하고 눈을 감고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괴로운 느낌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게 무엇인지가 관건입니다.
제 관찰이나 실험에 의하면 아파서 몸이 움츠러들거나 하면서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얼굴표정은 침울해지고 분노합니다.
그 다음 조금 여유를 찾았을 경우나 안 아플때와 같은 때를 생각해봅니다.
이 순서적 차이가 문제구요.
혹시 실론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뒷받침하는 경전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붓다고싸의 해설이 아닌 니까야 경전입니다.
실론섬님께서 게시해놓은 경전입니다. 혹시 못보셨나 해서요
"그런데 그에게 괴로운 느낌과 접촉하여 분노가 생겨난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괴로운 느낌에 대한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킨다.
또한 즐거운 느낌과 접촉하여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환락을 찾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감각적 쾌락 이외에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용을 정리하면....
(중생)괴로운 느낌-->분노-->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킴-->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환락을 찾음
행복님의 의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것 같은데...
성인 : 화살을 두 번 맞지않음(육체적 고통은 있으나 정신적 고로 진행하지 않음)
수가님 실론섬님 감사합니다.
가장 초점이 되는 곳은 '갈애'입니다.
갈애의 원인은 느낌입니다.
여기에서 갈애의 해석이 문제가 됩니다.
저는 '갈망+사랑'이 갈애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갈애의 해석이 욕망, 탐욕, 욕구 등의 용어와 관련은 있지만, 그 범위나 위치가 갈애와 다르다는 것이죠.
이것은 붓다고싸의 갈애에 대한 해석과 연관이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설명할 때 실론섬님의 해석과 비슷해지거든요.
사실 이러한 논의는 연기법 전체로 확산이 됩니다.
하나의 정의가 잘못되면 전체가 잘못 돌아간다는 뜻이 되니까요.
우선은 글이 길어져서 느낌에 대한 경전을 새로 게시판에 올려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온하십시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