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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목민 정두환의 세상이야기
그대에겐 아직 애절함이 남아 있는가!
비바 브라보 2015년 8월호.
‘하루 종일 봄 산의 언저리와 강가를 자전거로 쏘아다니고 나면, 내 피부에 나무처럼 엽록소가 생겨서, 수고하지 않고도 빛과 더불어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에 빠진다. 그때 숲 속에서 오줌을 누면 초록색 오줌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강가를 쏘다니며 적는 이런 글은 스스로 그 피부에 엽록소를 지니지 못한 자의 결핍일 것이다.’ 김훈의 「꽃은 꽃 한 송이로서 아름답고 자족하다」중에서 한 구절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계속되게 만드는 글이다. 우리네 삶에서 스스로에게 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군상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것 아닐까? 아마 없을 것이야 라고 스스로 안위하면서 살아간다. 이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나의 발목과 손목을 잡는 올가미에 스스로 묶어놓고 자유를 갈망하는 것일까?
가끔 나는 산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 근무하는 곳이 금정산 중턱이라 틈나는 대로 산길을 혼자서 걷는다. 가끔은 새로운 길을 천천히 걷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혼자 고요히 그 자태를 발하고 있는 꽃을 만나곤 한다. 크게 좋은 환경도 아니고, 양지바른 곳도 아닌 곳에서 혼자 고요히 자리잡고 자신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김훈의 글 한 구절을 보자. ‘꽃은 꽃 한송이로서 아름답고 자족한 세계를 이룬다. 꽃은 식물의 성적인 완성이며, 존재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은 스스로 자지러진다. 꽃에는 그리움이 없다. 꽃은 스스로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워하게 한다. 꽃을 들여다 볼 때, 나는 때때로 꽃으로부터 멀리 소외된다.’
그렇다, 꽃은 그리움이 없으나 보이는 대상을 그리워하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움을 먹고살아간다. 그러하기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은 항상 애잔함으로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 무엇이 그리워 몸부림치고 있는가?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다해보고 삶을 정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며, 다른 측면에서 보면 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이낙 하는 문제는 오롯이 본인의 생각에 달려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잘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Everyone is an Artist."라고 외친 독일의 화가이자 설치미술가인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1921.5.12.~1986.1.23)는 사람을 예술가로 지칭 할 때 무엇을 전제로 하였을까?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아니면 사람들이 행하는 그 모든 것이 예술적 행위여서. 우리 속에 남아있는 간절함이 시간이 흘러 나이 듦에 따라 애절함으로 남아있는 것을 표현하는 순간을 나는 요셉 보이스의 말을 인용해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의 행위는 혼자서 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물은 혼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에서는 작곡가의 예술 행위가 연주자의 예술 행위로 또한 관객의 예술 행위로 끊임없이 이어져야 예술의 본질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미술에서도 그 결과는 다르지 않다. 작가의 예술행위는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행위를 이해하고 함께 할 관객이 없다는 무의미한 행위일 것이다. 따라서 관객의 예술적 행위는 감상의 범주를 벗어나 구매의 행위로 인한 예술의 일상을 삶의 일상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예술적 행위 속에서 진정한 미술의 결과물은 꽃피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행위의 모든 속성에는 모든 사람의 애절함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에겐 아직 애절함이 남아있는가?
많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아직도 가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사라지지 않는 애절함이 아직도 그대에겐 남아있는가? 만약에 남아있다면 그대는 그 애절함을 무엇으로 표현하는가? 삶의 여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애절함을 표현하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묻어두고 간직하기만 하는가에서 삶의 여유는 나온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느 한곳에 목적을 위하여 앞만 달려가는 승부사들처럼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짧은 인생이다. 한곳에 목적을 정하고 달려가는 삶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나의 애절한 감정을 표현할 그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괜찮은 삶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가능한 함께하는 경우의 수가 훨씬 많다. 함께함이란 무엇인가? 경쟁의 삶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겐 함께한다는 것이 아주 낯설고 어려운 것이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내어주고 비워주어야 하는 것 이기에 경쟁의 삶속에서는 체질적으로 어울리지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함께 할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을 지금이라도 늦지가 않다, 애절한 그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고 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절정의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여유와 고요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속에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언제까지 경쟁의 대상으로만 살아 갈 것인가?
선진국이라고 우리가 탐내는 나라들의 삶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서로를 인정하는 힘을 배우고 싶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힘, 나와 그대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개별성을 인정하는 힘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힘이 있을 때 식물의 절정인 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잎이 피고,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이겨낸 결실인 것이다. 스스로를 이겨낸 아름다운 결실이기에 꽃은 그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이겨낸 그 의미를 알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대상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나의 삶을 더욱 알차게 살고 싶다. 이 애절함이 내 삶의 뿌리가 되고 거름이 되어 함께하는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져 행복했으면 좋겠다. 공유의 아름다움은 소유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나며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배가시켜준다. 나는 함께하는 세상 공유의 세상을 소망한다. 이렇게 될 때 나의 예술적 행위가 더욱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나의 것을 비워 놓고 함께 갈 길 동무를 만들어 가자. 애절함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의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우리함께 힘을 모아 걸어가자.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애절함을 표현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