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車一赫, 차갑수(호적상 이름),차용철(족보상 이름), 차철, 1920년 7월 7일 ~ 1958년 8월 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다.
양 력: 1920년 8월 20일
음/평: 1920년 7월 7일 남자
시 일 월 년
@ 庚 甲 庚
@ 戌 申 申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乙 대운: 순행
巳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86 76 66 56 46 36 26 16 6.5
사망일자: 1958년(39세, 戊子대운 戊戌년) 8월 9일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타계하였다.[4]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항일전을 위해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 등을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 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1951년 5월 공비 토벌 중 화엄사 소각을 막음.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년(39세, 戊子대운 戊戌년) 8월 9일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타계하였다.[4]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서프라이즈' 차일혁, 화엄사 지켜낸 경찰 '조국을 위해서'
[티브이데일리 양소영 기자] 2015. 11.15(일)
'서프라이즈'에서는 차일혁에 대한 이야기가 공개됐다.
15일 오전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이하 '서프라이즈')에서는 '조국을 위해서' 편이 전파를 탔다.
이날 방송에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속 남자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경찰 차일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 작전에서 다양한 공을 세웠다. 또한 그는 인민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차일혁은 어느 날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수도 있는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게 됐다. 결국 그는 명령에 따라 불을 질렀다. 하지만 절은 두고 문짝만 태우기로 한 것.
차일혁의 결단 덕에 사찰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가 지켜 낸 화엄사는 국보 4점을 보유한 1400년 역사의 문화유산. 차일혁은 이후 징계 처분을 받게 됐으나 훗날 공로를 인정 받아 2008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를 모델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오페라가 제작되었다. 차일혁은 화엄사 외에도 수많은 사찰들을 지켜낸 것으로 알려져 2014년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차일혁(車一赫, 차갑수(호적상 이름),차용철(족보상 이름), 차철, 1920년 7월 7일 ~ 1958년 8월 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경찰관이다.
생애[편집]
그는 전북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항일전을 위해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 활동을 펼쳤다.[1]
해방 후 귀국하여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의 인민군과 싸우던 중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 대장으로 복무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 등을 토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1] 그러나, 그는 가급적 귀순을 유도하여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70명의 결사대원으로 2천여 명의 적을 격파하였고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도 사살하였다. 그러나, 차일혁은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동족상잔이었다고..”라는 글을 전북일보에 기고하였다.
그는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을 화장하여 하동 송림에 뿌리며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이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서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자신은 받지 못하였다.[2]
화엄사 소각[편집]
1951년 5월, 전라북도에 새로 주둔한 국군 8 사단(당시 사단장 최영희 준장)과 군경합동 회의 참석차 차일혁은 도계로 갔다. 회의에는 지리산 전투경찰대 사령관 신상묵을 비롯한 경찰 지휘관들과 최영희 사단장 및 8사단 참모들이 참석했다. 회의 후 따로 모인 전투경찰대 지휘관들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이 명령은 숲이 우거질 시기인 녹음기에 빨치산들이 근거지가 될만한 사찰 및 암자를 소각하라는 것이었다. 화엄사 소재 지역은 8사단 방득윤 대대장이 관할하고 있었고, 명령도 방득윤 대대장에게 내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방득윤 대대장은 명령 수행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차일혁 18대대장은 방득윤 대대장에게 해결책을 제안했다.
화엄사 대웅전 등의 문짝을 떼어내어 문짝만 소각하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명령을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으로 이해했고,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해도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방득윤 대대장도 이에 동의했고, 이로써 화엄사는 전체 사찰이 소각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3]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유명한 사찰 등 문화재들에 대한 폭격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다.[1]
전쟁 이후[편집]
1954년 충주경찰서 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그는 충주직업소년학원을 설립하여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청소년들에게 학업기회를 제공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항일유격전을 펼쳤던 독립운동단체로,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시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온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진해경찰서장으로 재직시 좌익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 1958년 금강의 곰나루에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하다가 38세의 나이에 타계하였다.[4] 자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으로부터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1998년 화엄사는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하였다.[1]
1990년 그의 아들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출간하였다.
2008년 문화재청에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화엄사 등의 사찰을 불태우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절하여 명찰들을 보존한 공적이 있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추서하였다.[1][5] 경찰청에서는 2011년 8월 차일혁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 추서하였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10월 18일 청주 예술의전당 '2008년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보관문화훈장을 서훈하였다.
2013년 6·25전쟁 60주년사업위원회와 전쟁기념관 등 관계자와 전쟁사 전공학자들로 구성된 ‘이달의 6·25전쟁영웅 선정위원회’의 심도 있는 심의와 검증을 통해 올해 ‘이달의 6․25전쟁영웅’ 12명에 선정되어 국가보훈처 9월의 달력 인물로 공식 지정되었다.[6]
2013년 차일혁 경무관은 전쟁기념사업회에서 고려시대의 최무선 장군을 비롯한 62명의 호국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호국의 인물에 경찰이 포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9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7]
2013년 6·25동란 당시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일대 고찰과 금산사, 백양사, 선운사 등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숭고한 뜻을 기려 화엄사에 故차일혁 경무관 공덕비가 제막되었다.[8]
2014년 2월 차일혁기념사업회(대표 차길진)는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무명용사의 묘를 참배, 헌화하고 독립운동가 출신 전쟁영웅인 차일혁(1920~1958) 경무관의 기념패를 미국 알링턴국립묘지의 국내 전쟁 박물관에 해당하는 메모리얼홀에 입성해 그 뜻을 기린다.[9]
2014년 9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의 추모 현양행사가 4일 전쟁기념관에서 거행됐다. 6·25전쟁에서 경찰은 육군 다음으로 많은 전사자 1만58명(경찰은 행방불명자 등을 포함 1만7000명 추산)을 기록했는데, 전쟁기념사업회는 경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차일혁 경무관을 호국인물로 선정했다.[10]
2015년 호국영웅 10인 중 경찰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된 차일혁 경무관은 칠보발전소를 탈환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표 공적지로 정읍시가 지정돼 6월 3일 차일혁 경무관의 영원우표(永遠郵票) 발행 기념식이 열렸다. [11]
가족[편집]
아버지 : 차경석[12] 혹은 차유선[13]
아내 : 진복희
아들 : 차길진 (퇴마사, 프로야구 히어로즈 구단주,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참고[편집]
차경석: 보천교의 교주이며, 당시 정읍거주민과 향토 18대대원들, 재야사학자 안후상씨의 증언등으로 차경석의 서자라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소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차유선: 호적 기록상에 차일혁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