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 1022-1086)은 북송시대 저명한 정치 혁명가이다. 그는 무주임천(撫州臨川, 지금의 江西省 臨川縣) 사람으로 자는 개보(介甫)이고 호는 반산(半山)이다. 경력(慶曆, 1041-1048) 연간에 진사가 되어 변법에 주력하여 신종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재상에 봉해져 새로운 정치를 실행했다. 후에 보수파의 공격을 받아 재상에서 물러나고 강녕(江寧)으로 은퇴하였다. 형국공(荊國公)에 봉해졌고 시호가 문(文)이였으며 왕형공(王荊公)이라 불렀다.
왕안석은 시와 문장을 잘해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또한 글씨를 잘 썼으나 문장과 정치 명성이 후세에 빛났기 때문에 서예의 명성은 이에 가려져 사람들 대부분이 알지 못하였다. 왕안석의 서학 연원에 관해서 옛사람들의 설이 한결같지 않다. 소식은 그의 글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법이 없는 법을 얻었으니 사람들이 배울 수 없다.
得無法之法, 人不可學.
황정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안석의 글씨는 왕몽을 배워서 서법이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진나라 사람 필묵의 뜻을 얻었다.……소산하고 간결하고 심원하여 고상한 사람이나 뛰어난 선비와 같다.
荊公字學王濛, 書法奇古, 得晉人筆墨之意……蕭散簡遠, 如高人勝士.
그러나 미불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왕안석은 양응식의 글씨를 배웠는데 사람들이 드물게 이를 알고
있다. 내가 그 이유를 말하면 공이 그것을 크게 거울삼을 것이다.
文公學楊凝式書, 人鮮知之, 余語其故, 公大嘗其見鑒
이를 보면 왕안석의 서예는 매우 조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옛것을 배워 나를 위해 사용하길 잘하였으므로 어떤 서예가를 배워도 그와 같지 않고 스스로 하나의 풍격을 이루었다. 예를 들면 그의 변법처럼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종합하여 말하면, 왕안석의 서예 명성은 비록 미미하나 실제로는 하나의 명실상부한 서예가였다. 이는 마치 옛사람이 다음과 같이 평가한 것과 같다.
왕안석의 운필은 마치 양 날개를 꽂고 서리 찬 하늘에서 능멸하는 독수리가 뒤에서 치솟는 모양과 같다.
荊公運筆如揷兩翼, 凌轹于霜空鵰鶚之後.(宋 李之儀 『姑溪集』)
왕안석의 서예는 맑고 굳세며 가파르게 뽑아 표표함이 범상치 않아 세상에서는 갑작스런 바람에 빠른 비가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王荊公書法淸勁峭拔, 飄飄不凡, 世謂之橫風疾雨.(宋 張邦基 『墨庄漫錄』)
비록 지금에 이르러 왕안석의 작품은 보기 힘들지만 이러한 평론들은 오히려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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