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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발달·학습부진 심화우리 사회에 이주여성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10여년을 맞으면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2세들도 5만8000명을 넘어섰다. 2만4000여 명은 이미 초·중·고 학령기를 맞았고 3만3000여 명도 취학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한창 꿈을 키워가야 할 아이들이 한글을 제대로 말하고 쓰지 못할 뿐 아니라, 학습부진과 따돌림 등으로 교육현장에서 소외되는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가장 많은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언어발달 지체, 또는 장애. 필리핀 엄마(37)와 한국인 아빠(48) 사이에서 태어난 수민(가명·9·대구)이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이 된다. 그러나 교과서를 떠듬거리며 읽고 명확한 의사전달도 하지 못하는 5~6세 정도의 언어능력을 갖고 있다. 학교 성적은 반(36명)에서 밑바닥을 헤맸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성격도 반항적으로 변해 엄마 말을 잘 듣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소리를 지른다. 말 대신 손·발짓 등 과장된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주변에선 장애아로 오해한다. 수민이는 부모가 맞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에 태어난 지 2년도 안 돼 필리핀으로 보내져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일곱 살 때 돌아왔다. 이후로도 한국말이 서툰 엄마와 생업에 쫓긴 아빠 밑에서 한글을 접하기 어려웠다.
- ▲ 광주여대 언어치료실에서 다문화가정 어린이가 언어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 다. 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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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선 따돌림·놀림언어능력이 떨어지거나, 생김새가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주 따돌림과 놀림의 대상이 된다.
필리핀 출신 엄마를 둔 초등학교 3학년 성식(가명·9)이는 피부색이 태어날 때부터 까맣다. 학교에서 '깜둥이'란 별명을 얻었다. 담임 선생님이 놀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만 친구들은 그때뿐이다. 성식이는 한국말을 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됐고 갈수록 말수가 적어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됐다. 학교 생활도 공부도 재미있을 리 없다. 수학 등 학습 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발표를 할 때면 다른 아이들이 '깜둥이'라고 수군대는 바람에 자신감을 잃는다.
전남 장성에서 일본인 엄마와 사는 지선(11)이는 학교 친구들이 "너네 엄마 돈 주고 사왔지"라고 놀리는 바람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사실과 다른 엉뚱한 이야기지만 딸이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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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교육 못 받는 2세들언어지체와 학습부진, 따돌림에 지친 다문화가정 아이들 일부는 점차 교실 밖으로 내몰린다.
이미선(가명·36·
베트남)씨는 1998년 한국에 들어와 결혼했으나 2002년 가정폭력으로 이혼, 딸 수진(가명·초등4년)이를 데리고 나왔다. 이씨는 식당 일을 시작하면서 딸에게 소홀해졌고 이때부터 수진이의 주의력이 크게 산만해졌다. 이씨가 베트남 사람과 재혼한 뒤 딸과의 관계는 더 멀어졌고 수진이는 학교와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게 됐다. 수진이는 "집에 가면 엄마가 베트남말만 쓰는 게 싫다"고 한다. 이씨는 조만간 딸을 베트남에 보내 베트남어를 배우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취학연령대 자녀 2만4867명 가운데 6089명(24.5%)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학생 연령(만 16~18세)에 해당하는 2504명 중 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은 1743명(69.6%)으로 70%에 육박했다.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만 13~15세는 3672명 중 1459명(39.7%)이, 초등학생에 해당하는 만 7~12세는 1만8691명 중 2887명(15.4%)이 각각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일반가정 자녀들에 비해 중학과정은 9.9배, 고등학교는 8배 높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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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예방·치료 시급다문화가정 2세들의 그늘은 생업에 바쁜 아빠와 엄마, 특히 한국말이 서툰 엄마로부터 정확하고 충분한 언어습득 기회를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눌한 말투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십상인 데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발달장애와 학습부진으로 이어져 결국 학업을 포기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최근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대상으로 언어치료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광주여대 언어치료센터의 진단검사 결과 18명 가운데 절반인 9명이 언어발달 지체를 보였다. 다른 2명도 언어발달 지체가 우려되는 고위험군(群)으로 분류됐다. 나이가 5세 3개월인 한 아이의 언어발달은 3세 6개월로 나타났고 보통 아이라면 문장을 만들 나이인 3세의 아이는 겨우 낱말을 따라 하는 수준이다.
문경임 광주대 언어치료센터장은 "다문화가정 2세들의 언어지체를 방치하면 학교 부적응은 물론, 장차 취업과 결혼에까지 영향을 미쳐 10년 후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며 "국가와 지역사회, 교육기관 등이 유아기 때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 언어지체 예방과 치료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