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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 벌봉(535m; 경기 성남-하남-광주)
*일 시 : 2005. 2. 6(일), 제14차 rtnah 자유산행(10명), 날씨(맑다)
*코 스 : 마천동(지하철 5호선종점))-청운사-좌측지능선-샘터1, 2-산불예방전망대
-연주봉 옹성-성벽밖 소로-북문-봉암성-벌봉-355전망대바위
-쉼터-선법사-광주향교, 고골사거리-둔촌역-귀가
<전체 소요시간 4시간 20분간)
앞을 볼 수 없는 맹인 한 사람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손에는 등불을 들고 우물가에서 돌아오고 있다. 그때 그와 마주친 마을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군. 자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지?"
맹인이 대답했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기 하려고 그럽니다.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을 위한 것이지요."
(바바하리디스의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에서)
고대희랍의 철인 디오게네스에서부터 비롯된 우화로 어리석은 희랍시민들을 위한 그의 기행의 일부다.
9시 12분.
지하철 5호선 남쪽종점 마천역에 하차했다.
설날 직전 일요일 정기산행은 근교자유산행으로 진작부터 약정한 오늘의 행사다.
정묵연-오정호씨부부, 그리고 유덕순 선생님 일행과, 예상치 않았던 오태식-이춘옥씨가 동참한 10명의 행보다. 571번에서 3415번으로 바뀐 버스(거여동~삼성동간 운행) 종점 앞이다.
우측은 비호 군부대 정문 옆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따라 들어섰다.
과거엔 대부분 음식점들로 들어찬 소로변엔 주5일제와 웰빙붐을 타고 중저가 등산용품 매장이 들어선 것이 과거완 다를 모습이다. 제각기 등산패션에 배낭을 둘러 맨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市界 표시(서울시와 하남시)를 조금 지난 좌측에 <대한불교 남한산 청운사>를 지난 지점에서 좌측으로 옹성을 향한 지능선인 한적한 등로를 택했다. 얕은 오르막이다. 인적이 뜸한 지능선은 겨울풍경 그대로이지만 겨울가뭄으로 바닥에서 먼지만 폴싹거린다.
오전 9시 55분.
<정상 →>
운동기구가 설치된 두 번째 샘터다.
물맛을 음미하던 왕언니인 김옥희씨가 아랫편 샘터물맛보다 못하다는 품평이다.
立春水(立春 전후에 받아 둔 빗물인 立春水로 술을 빚어 마시면 아들 낳고 싶은 서방님의 기운을 왕성하게 해준다는 입춘수다. 상대적인 의미로는 가을 풀섶에 맺힌 이슬을 털어 모은 물을 秋露水라고 한다. 이 물로 엿을 고아 먹으면 백병을 예방한다고 한다)로 믿고 마시면 건강에 더할 나위 없는 補飮이리라.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막상 등로에 오르고 보니 생각보단 덜 하다는 느낌이다.
지난 금요일은 입춘(立春 / 2월 4일)이다.
24절기의 첫 번째. 음력으로는 정월 절기이며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도일 때.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다.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지만 체감온도는 겨울 그대로다.
春來不似春인가?
체감기온은 사람 몸이 느끼는 기온, 바람에 따라 실제 얼마나 더 춥게 느끼는지를 가리자는 뜻에서 도입했다. 체감온도는 겨울에 의미가 있다. 여름에는 바람이 불면 시원해져 더 좋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바람이 불면 몸이 열을 뺏기는 속도가 빨라져 더 괴롭다. 그래서 여름엔 바람 대신 습도를 넣어 불쾌지수로 날씨가 주는 고통을 표현한다.
‘추위’란 인간이 외부에 열을 빼앗겨 체온과 기온 사이의 평형이 깨졌을 때의 기상조건을 뜻한다.
체감기온은 기온이 영하 10도, 풍속이 시속 5㎞일 경우 영하 13도, 풍속이 시속 30㎞로 세지면 영하 20도 정도다. 바람이 거셀 때를 제외하곤 예상 기온에서 2~5도를 빼주면 된다.
체감기온은‘바람냉각지수’‘유효온도’로도 불린다.
최저기온 기록이 영하 64.4도인 시베리아 야쿠츠크에 19만 명이 산다.
1월 평균기온이 영하 43도인 이곳은 “외출할 때 콧물이 얼어 고드름처럼 매달릴 정도”로 숨을 내쉬면 공중에서 얼어붙으며 ‘별의 속삭임’ 소리가 들린다는 곳. 그래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체감온도 계산공식
체감온도=13.12 + 0.6215×기온―11.37Vo·16+0.3965Vo·16×기온(V: 지상 10m 바람의 시속).
입춘이 음력으로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섣달과 정월에 거듭 들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재봉춘(再逢春)이라 한다.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갈라서,
① 동풍이 불어서 언땅을 녹이고,
②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③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積善功德行을 하는 복지(福祉)민속이 이 즈음에 일어난다.
이를테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 건너 다닐 징검다리를 놓는다거나, 고갯길을 깎아 놓는 일, 또는 다리 밑 동냥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다 놓는다거나, 행려병자가 누워있는 원(院) 문전에 약탕 끓여 몰래 놓는 것 등 덕행을 쌓는 민속이다. 더불어 살았던 우리네의 본받을 미풍이다.
입춘절은 새해를 상징하는 절후여서 입춘방(立春榜)·첩(帖) 붙이기, 보리뿌리 점 보기, 입춘 팥죽, 입춘공사(윤수(倫修), 입춘 굿 등 여러 행사가 있다. 그 중 입춘날 입춘시가 들 때 대문-중문-곳간문-방문이나 대들보에 써 붙이는 글귀로 대구(對句)와 단구(短句)인 입춘방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어린 시절엔 설날 전에 연례행사로 만났던 글이다.
'短句입춘방'으로는
春到門前增富貴(춘도문전증부귀), 春光先到古人家(춘광선도고인가), 一家和氣滿門楯(일가화기만문순), 人情富貴如將得(인정부귀여장득), 玉洞桃花萬樹春(옥동도화만수춘), 立春大吉(입춘대길), 掃地黃金出(소지황금출), 開門萬福來(개문만복래), 壽如山富如海(수여산부여해), 戶納東西南北財(호납동서남북재)등이 있다.
'對句 입춘방'에는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國泰民安 家給人足(국태민안 가급인족)
雨順風調 時和豊年(우순풍조 시화풍년)
堯之日月 舜之乾坤(요지일월 순지건곤)
壽如山 富如海(수여산 부여해)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천하태평춘 사방무일사)
天上近三陽 人間五福來(천상근삼양 인간오복래)
鳳鳴南山月 麟遊北岳風(봉명남산월 인유북악풍)
掃地黃金出 開門萬福來(소지황금출 개문만복래) 등이 있다.
남한산성 옹성을 향한 지능선은 '스텝 바이 스텝'식이다.
한숨을 걸러낼 수 있는 공간을 주는 완벽한 실버코스다. 두런거리며 오르는 지능선 바닥마다 도타운 애정이 떨어진다. 산이 읽어주고 알려주는 살가운 믿음 앞에 누구라도 가납사니라고 흉볼 사람은 없으리라. 숫접게 보이던 유덕순 선생님의 행보는 지난 설악산 달마봉에서 확인한 바 있다. 서문을 중심으로 북쪽의 남한산성이 병풍처럼 다가든다.
'금원산-이성산' 능선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200m 전방에 연두색 산불감시초소 철제전망대가 비슷한 눈 높이다. 이미 한 땀이 적셔진 등에 서늘한 한기가 엄습한다. 북쪽 산자락에는 엷게 깔린 흰 눈이 약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10시 30분.
연주봉 옹성에 올랐다.
<쌍바위 약수터 1,240m ↔ 수어장대 610m, 서문 290m>
서문방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다.
북쪽을 향한 산성의 전망대로 2년 전 복원한 바 있다.
본성에서 옹성 방향으로 있는 外城과 전망대는 두께 5Cm의 직사각형 흑색 기와(고령기와 벽돌 0543-954-8008)와 시멘트보다 더 단단하다는 찰 진흙을 이용해 쌓았다.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이 어린 우리들의 역사를 이곳을 디디는 사람들은 어떤 감회로 바라볼 것인가. 적어도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구인들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짬이라도 가져봤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이다.
Life’s Mirror(인생의 거울, Madeline Bridges (1844-1920))
There are loyal hearts, there are spirits brave,
There are souls that are pure and true,
Then give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the best will come back to you.
Give love, and love to your life will flow,
A strength in your utmost need,
Have faith, and a score of hearts will show
Their faith in your word and deed….
For life is the mirror of king and slave,
‘Tis just what we are and do;
Then give to the world the best you have,
And the best will come back to you. (부분)
<인생거울(매들린 브리지스)>
세상엔 충성스러운 마음과 용감한 정신이 있고
순수하고 참된 영혼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면
최상의 것이 당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사랑을 주면 당신 삶에 사랑이 넘쳐흐르고
당신이 가장 곤궁할 때 힘이 될 겁니다.
믿음을 가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과 행동에 믿음을 보일 겁니다.(…)
왜냐하면 삶은 왕과 노예의 거울이고,
우리의 모습과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법
당신이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면
최상의 것이 당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네가 세상을 보는 대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
현재 암투병 중으로 고통을 겪고있는 영문학자 장왕록 교수의 令愛 장영희 교수가 조선일보(2004.12.08)에 소개한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말한 이야기다. <세상=거울>이라는 等式대로 내가 노력하는 만큼 나를 비추고 내가 주는 만큼 내게 준다는 의미다. 하지만 때로는 사력을 쏟아도 세상은 발길질하기 일쑤다. 사랑을 주어도 미움만 돌아오고, 믿음을 주면 배신이란 부메랑이 되돌아온다. 그러나 키플링 시인은 내가 세상을 좋게 대하면 세상이 나를 좋게 대할 확률이 높다고 너그러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하면 적어도 자신에겐 부끄럼이 없다는 그의 말대로‘인생거울'을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 들여다봐야겠다는 아름다운 노래를 이 아침에 들먹거리며 옹성에서 강동-송파구를 일대를 흐릿한 시선으로 분산시켰다.
한강 너머 성동구와 광진구 일대와 아차산이 LA형 스모그에 깔려있다.
봉화대-금암산-이성산을 연결하는 능선과, 동장대지-벌봉-객산을 연결하는 능선이 남북으로 평행하다. 두 능선 사이에 고골 일대가 아직도 깊은 새벽이다. 두 능선을 서문-동장대 성곽을 이으면 ∪자 형태다. 동쪽 벌봉 너머 한강을 안고 있는 예봉산-적갑산 줄기와 검단산-용마산 능선주름이 높은 파고처럼 금새라도 덮칠 것 같다. 남쪽으로는 남한산성-검단산-갈마터널을 잇는 줄기가 流星처럼 긴 꼬리를 남긴다.
전열(?)을 가다듬고 암문에서 동쪽으로 난 城下의 소로를 따라 벌봉을 향한 이동이다.
깊은 겨울아침잠에 빠져든 '고골'을 사이에 둔 벌봉-객산 능선과, 그 너머로 검푸르게 보이는 검단-용마산 줄기가 들어온다. 백두대간 줄기처럼 우람하고 장대하다.
오전 10시 50분.
한적한 우리들만의 실버산행이다. 복원 공사중인 北門 앞이다.
계속 성곽 아랫길을 걸었다. 문득 눈을 들어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다. 장사(長蛇)인 아나콘다 동체처럼 산성은 부드러운 곡선이다. 끝간데 없이 동향하고 있는 산성 안은 천혜의 요새다. 험준한 산세를 따라 병풍처럼 둘러싼 길이 11.76Km의 성곽은 우리민족의 끈질긴 생존의 역사다. 세월의 때가 묻은 城石과 그렇지 않은 깨끗한 돌이 섞인 성채(城砦)를 바라보노라면 누더기처럼 저항한 우리들의 혼돈했었던 약소국의 숙명과 원초적 저항의 흔적이 한 눈에 보인다.
11시 02분.
아치형 暗門도 복원공사 중이다. 암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곽 안쪽 능선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 능선은 지형적으로 성체는 없고 여장뿐인데 복원공사중이다. 일행들에게 산성의 형태와 특징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들려주는 짬을 가졌다.
2001년 9월 16일 후기 일부다.
「남한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엔 온조大王 때 토성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그 후 신라 문무왕 때 재 축조하여 '두장성'을 만들고, 조선 광해군 때 본격적인 축성이 있었다. 당시엔 9개의 사찰과 성문, 망루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어장대-숭열전-청량당-현절사-연무관-지수당-서장대-장경당 등이 남아있다. 산성 안에는 울창한 숲길과 계곡이 있어 드라이브코스나 젊은이들이 즐기는 낭만의 코스로 사랑을 받고있다.
봉화대와 마주한 산성 暗門을 우측에 두고 성곽 밑 능선을 따라 잠시 내려선다.
좌측 산록에 고골이 나목 사이로 들어온다. 군데군데 진흙과 기와로 만든 여장(女墻)과 치(雉)가 돋보인다. 여장은 성체(城體) 위에 만든 성가퀴로 전투 시에 이용되는 지형지물이 된다. 약 80Cm 높이로(폭 2.7m~3.2m)와 口(폭 20Cm), 원총안(遠銃眼)2개, 근총안(近銃眼) 1개로 구성된다. 치는 곡성(曲城)으로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접근한 적을 정면과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지세가 주변보다 돌출된 곳에 쌓은 구조물이다. 북한산성의 것과 똑 같다.」
11시 25분.
동장대지에 올랐다.
<북문 1.4Km← 벌봉 0.6Km, 한봉 1.7Km↑ → 동문 1.5Km>
<동장대지 >
내려다보이는 동남방향 북문일대의 남한산성은 만리장성의 어느 지점에 선 기분이다.
동장대지 서쪽 아래로 되 내려와 만난 暗門을 통과해 북향했다. 벌봉-객산을 잇는 능선을 향한 이동이다. 지근 거리에 <봉암성 터>임을 알리는 오석(烏石)의 탁상형 금석문이 박혀진 곳이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외성이다.
<峰巖城>
"이 성은 숙종 12년(1686년) 府尹 윤지선(尹趾善)이 처음 쌓았는데 둘레가 1142.8m이고 女堞 294 이며, 暗門이 4, 軍00가 15개소 있었다. 병자호란 때 淸兵들이 벌봉에서 성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축조한 것이다."
동장대지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 김자연씨가 준비한 달착지근한 생 무 맛도 일품이다. `입춘(立春) 날 무(우) 순(筍) 생채(生菜)냐'라는 옛 속담이 있다. 맛있거나 신나는 일을 빗댈 때 입춘 시식(立春 時食)으로 먹던 무(우) 순 생채에 비유했었다. 아무튼 모처럼 맛본 무도 제철 음식으로 가장 맛있는 보약이라는 생각이다.
소로를 따라 얕은 내림길인가 싶더니 이내 오르막이다.
벌봉이 우측 전방 가까운 곳에 벽처럼 막아선다.
<한봉 1.4Km← 벌봉 0.2Km↗ 동장대 0.4Km→>
한봉은 동문 쪽 外城을 잇는 봉우리다.
예상과 달리 벌봉능선을 찾아온 산객들이 많았다.
깊은 겨울잠에 든 단풍나무, 상수리, 철쭉 나목이 씁쓸하게 보인다.
잠을 잔다는 것은 주기적으로 뇌가 활동을 하지 않고 쉬는 현상이다. 그러나 나무에는 사람이나 동물의 뇌와 같이 모든 활동에 대해 기능을 갖고 조절하는 부분이 없다. 옥신(auxin)이라는 생리조절물질로 이런 기능을 아주 조금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의미의 진짜 잠은 없다.
그러나 몇 가지 잠과 비슷한 현상이 있다.
첫 번째는 휴면(休眠)이다.
동물의 겨울잠과 같은 현상이다. 나무의 경우는 봄에서 가을까지 열심히 광합성을 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고 덩치를 키워가다 겨울이 되면 활동을 중지하고 다음해 봄까지 쉰다. 또 씨나 겨울눈 등도 적당한 조건을 만날 때까지 쉬고 있다가 어느 날 깨어나서 자란다. 즉 쉬고 있는 이런 기간이 잠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자귀나무에서처럼 밤이 되면 잎을 겹치고 낮이 되면 펴는 수면운동이 있다.
이름은 수면운동이지만 불필요한 수분의 증산을 막고 생체리듬을 조절하는, 잠보다는 일종의 운동이다. 꽃에도 이런 현상이 있다는 포리스트의 소개다.
<상사창동 2.0Km← 한봉 1.9Km↗ 동문 1.9Km, 동장대 0.6Km→>
이정표 부근에는 봉암성과 모양이 똑 같은 탁상형 금석문이 박혀있다.
우측 옆으로 나온 소로를 따라 벌봉을 향했다.
벌봉은 두 쪽의 바위로 이뤄진 거대한 巖峰이다. 암봉 아래엔 쉬기에 알맞은 평평한 공터가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 최고봉(512m)이다. 그 아래에 제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린 흔적이 있고, 식사장소로 점찍어 둔 장소다.
12시 정오.
양대장님의 결참으로 대신 준비한 가스버너로 라면타임을 가졌다.
김옥희씨가 3인분 도시락을, 그리고 각자 준비한 음식물이 쏟아지자 제단을 올리던 부근은 금시 성찬의 자리로 변했다. 그렇게 30여분을 보냈다. 앞으로는 계속 내리막 행보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정상주를 대신해도 별반 지장은 없으리란 판단이다.
벌봉에 올랐다.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흡사 벌과 같다고 하여 벌봉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正氣가 서려있어 침략하면서 깨트렸으므로 산성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淸兵이 이 봉우리에서 성내를 관찰하며 아군을 공략했다."
벌봉 정상에 올라 남한산성 쪽을 바라보면 호란 당시의 격전이 그대로 드러난다.
벌봉은 당시 수어장대 보다 높았기 때문에 산성 내부를 꿰뚫듯이 볼 수가 있는 군사상 요지다. 역사는 이미 흘러갔지만 기록과 그 흔적은 여전하다. 청 태종에게 <삼전도의 치욕>(현 석촌호수)을 겪어야 했던 인조의 고두구배(叩頭九拜)가 어지럽게 오버랩되과 크로즈업으로 정지한다. 無常한 과거 앞에 적막한 현재가 無心으로 대신할 뿐이다.
이제 꾸준히 북부 능선을 타고 '객산'을 향한 경쾌한 행보가 열린다.
<등산로: 동문 1.1Km← 벌봉 암문 →북문 1.5Km>
밤나무 나목 숲길이다.
오후 1시 45분.
355봉 전망대 암반을 지났다. 파란 겨울하늘이 더없이 청결하다.
계속 머뭄없이 내리막 능선을 질주했다.
1시 10분.
객산 갈림길 삼거리에서 마지막 휴식을 거쳤다.
고대 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 터였던 고골이 아늑하게 앉아있다.
최근 관련학회의 수고로 이 고골 일대(사창동-항동-교산동-춘궁동)를 중심으로 당시 백제인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이 다수 발견되어 당시를 이해하는데 이롭게 됐다.
해발 291m에 불과한 객산은 그 모습이 독특하고 산자락이 춘궁동과 연결된다.
춘궁동은 '동쪽의 경주'라는 별칭이 붙은 객산 자락에는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있고, 옛 광주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산>지(2001년 4월호) 소개에 나온 전설에 의하면 옛날 마귀할멈이 한양 땅에 남산을 만들려고 이천고을의 도드람산 일부를 치마폭에 싸서 옮기다 힘에 부쳐 떨어뜨린 산이라 한다. 그리하여 객지에서 떠온 산이란 뜻으로 <객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광주관아를 인조 4년에 남한산성으로 옮긴 이후 한산한 마을이 된 객산 자락엔 현재 광주향교만 남아있다는 전언이다.
1시 25분.
선법사로 내려섰다. 민속신앙의 하나인 천신을 모신 굿판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다. 일행들에겐 다소 생소하거나 이단처럼 보이는 현장의 모습에 대한 느낌이 제각각이다.
하가장동 마을 중앙을 관통했다. 이 지점에서 오늘 산행은 마침표다.
마을을 향한 이동이다.
이곳 일대에는 각종공장과 물품하치장 건물이 즐비하다.
<골말 번영회>건물을 지났다. 마을은 대체로 평화로운 한 낮이다.
의류 물품창고에서 내건 바겐세일에 발을 멈춘 일행들로 귀가시간이 늦어졌다.
2시 30분.
<궁안>마을 광주향교와 하마비가 있는 길을 지나 고골 사거리 농협 앞 버스정류소에 섰다.
마천역을 출발해 산행에 소요된 시간은 총 4시간 20분간이다.
교산동 서부농협 앞 버스정류장에서 둔촌전철역으로 운행하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이른 시간에 마친 하산이 아무래도 서먹했던 모양이다.
너남없이 제2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눈빛이다.
마포전철역에서 정묵연선생님 일행이 하차했다. 나머지 7명의 일행들은 화곡동 000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긴 식사시간과 이야기와 노래가 흩어지는 시간이 허물없이 지나가고 있다. 펼쳐졌던 바쁜 대목이 이렇게 스러지는 밤이다.
*교통 : ①남문[승용차; 성남입구 복정 사거리에서 좌회전-남한산성길(308번도로 8Km),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9번 마을 버스로 환승]
②동문[광주방향 43번 도로-광지원리 중부농협 앞 우회전-308지방도로-동문),
지하철 2호선 강변역~15-1번 버스로 산성 안까지 들어감]
③서문[지하철 5호선 종점-비호부대-청운사-등산로-서문으로,
시내버스 571번 거여동~삼성동 간 운행]
④동서울터미널~남한산성간 13번 직행버스, 을지로 6가에서 서울시내버스~산성입구 ⑤고골[잠실역 버스정류소 30-5번 버스-고골 향교 하차-마을버스 100번 중촌입구] ⑥중부면 오전리[강변역 남한산성 시내버스 112~5번 버스-오야수 주차장]
*숙식 : ①남한산성[백제장(산채정식 031-743-6551), 반월정(손두부전골 031-743-6562), 산골집(추어탕 043-744-3459), 터(찻집 -749-2521),
풍경(카페 -746-8545), 산선 민속집(-743-6585) 등]
②성남호텔( -752-6200), 금수장( -751-4052)
③마방집(객산 아래 천현 삼거리 된장찌개 장작불고기 -791-0011)
*기타 : 남한산성 도립공원(031-743-6610), 남한산성활궁장, 헬글라이더장. 남한산성 유원지.
성남모란장(4-9일장, 약초 가죽 잡곡류)
첫댓글 <정정> 산행일자를 2005년 2월 6일(일)로 바로 잡습니다. 2001년 9월은 과거의 산행기 날짜입니다.
참 역사적인 현장에 좋은 산행들 하셨군요. 명절 잘들 세시고 다음 산행때 뵐께요. 정정 할 내용이 있으시면 본문을 직접 수정하시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