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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행 이야기는 '인도'로 시작합니다.
어떤 여행으로 첫 이야기를 시작하면 괜찮을까, 고민하면서 사진들과 기록을 뒤져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세상에.
내 생애 첫 외국 여행 사이판부터 국내의 강화도, 지리산, 제주도, 운문사, 코타키나발루, 인도 여행, 그리고
최근의 발리까지(마지막에 틀어져 함께 가진 못했지만, 비행기티켓까진 끊었던) 감짱과 같이 여행을 했네요.
의외로 함께한 여행이 많아서 그야말로 요새 아이들 말로 "깜놀"입니다.
여기 감짱의 카페에 세들어 살면서 고료도 없이 여행 이야기를 쓸 운명이었나봅니다.^^
인도 여행은 감짱도 연이어 글을 썼고 거기에 덧붙일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없습니다.
저야말로, 인도로 떠나기 전, 바로 일주일 전 쯤에 '친구따라 인도가기'를 통해 무작정 '묻어간' 바보같고 무책임한 여행이었으니까요.
아래 글은 어느 주간지에 썼던 글입니다.
워밍 업 겸 조금 손 봐서 올립니다.
그 놈의 인도.
정말, 인도 앞에는 꼭 욕이 붙어 나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놈의 인도, 로 갑니다.
터벅터벅 걸어다닌 길바닥에 그려진 소 그림. 거리에도 소, 바닥에도 소, 소천지. 그래도 그 소들이 싫지 않았다.
그러니까 2006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이렇게, 는 무엇이었던가.
이렇게 질질 울면서는, 신경질과 분노와 억울함에 가득 차서 울뚝불뚝 일어나는 감정 상태에 빠져서는 살 수 없다고 말이다.
그 후, 돌연한 결심으로 삭발도 해보고(가만히 앉아서 텔레비전 보다가 불현듯 목욕탕에 가위 들고 들어가 싹둑싹둑 잘랐다),
단식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명상도 해보았다.(정말 별의 별짓을 다했다.)
불교 경전을 사다 읽고 심지어 혼자서 천일기도 하겠다고, 매일 108배를 하면서 ‘업장’을 소멸하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무릎이 휘청거릴 만큼 절을 해봐도,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해도, 묵언수행을 해봐도, 쫄쫄 굶어 봐도, 절통해하며 기도를 해봐도, 기이하게도 미운 사람은 끝까지 미웠고, 순간순간 화가 솟구쳤고, 내게 잘못하는 것 같은 사람들 앞에서 분노했다.
요 몇 년간은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로도, 경제적으로도 진퇴유곡의 상황이었다.
‘도로아미타불’이란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도대체 내가 걸린 ‘덫’이 뭔가 탐색하고 아무리 정결한 음악만 골라들어도 못나빠져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몸서리 치던 어느 날 후배가 말했다.
“언니, 정말 너무 지쳐 보여. 잘 웃던 웃음마저 잃은 것 같아. 수련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권유도 함부로 하던 후배가 아니었다.
정말, 완전 맛이 갔구나.
수련원에 그렇게 입소했다.
4박 5일.
40년 넘게 끌고 다니며 부려온 몸속에 서리서리 똬리 틀고 있는 분노와 화와 눈물을 모두 쏟아버려 온 몸과 마음이 텅 비어 쭈그렁바가지가 된 것처럼 훌렁거릴 때, 이십 년 넘게 사랑해 오던 하덕규의 목소리를 새롭게 만났다.
그는 노래했다.
“껍질 속에서 살고 있었네. 내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도 모르고.
껍질 속에서 울고 있었네. 내 슬픈 영혼.
눈물이 난지 내가 눈물인지도 모르고.
껍질 속에서 노래 불렀네. 내 외로운 영혼.
슬픔이 난지 내가 슬픔인지도 모르고.
껍질 속에서 울고 있었네. 내 아픈 영혼.
아픔이 난지 내가 아픔인지도 모르고.”라고.
그리고 그는 '자유’를 외쳤다. 그저 한 단어로 자유, 자유, 자유, 자유라고.
그 날 이후, ‘목을 놓아’ 울면서 그토록 붙잡고 있었던 슬프고 외롭고 청승스런 나를 놓아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아니면 더 이상 내가 아닐 것 같아 죽도록 붙들고 있었던 아집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원 입구의 거울 앞에 놓여 있던 “지금 들어가는 이 모습으로 나오지 않겠습니다.”란 말처럼 수련원을 나올 때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으므로 새롭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올해 2008년.
변한 게 많지 않았다. “개꼬리 3년 두어도 황모 되지 못한다.”는 속담을 이해했다.
잔잔하고자 해도 수시로 몰아치는 격랑, 평화를 간구한다면서 자초하는 분쟁,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싶은데 터져 나오는 고성.
매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바위처럼 단단한 인간이 되고픈 욕구만 가득했을 뿐, 꼬락서니는 똑같이 형편없었다.
불행하고 가난한 현재의 내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다, 고나 할까.
1월 하순. 인도로의 돌연한 여행은 지난날 반복한 ‘습’대로 전개되었다.
연말연시 휴가 후 업무에 복귀한 지 열흘이 넘었을 즈음, 그 동안 에고와 습과 카르마와 용서에 대해서 나름
깊은 대화를 주고받았던 친구의 문자가 도착했다.
“나, 인도 갔다 올게.” 그런 경우, 그저 잘 다녀오라거나 언제 돌아오는가에 대해서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충동적이고 의존적인 성격 그대로 “나도 좀 데려가 줘.”라고 떼를 썼으니.
하필이면 그녀가 간다는 곳이 인도여서 그랬으리라.
뭔가 심신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곳.
다녀오면 ‘노 프라블럼’의 집착 없는 세계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
<본 아이덴티티>란 영화에서 본과 그의 연인이 둥지를 튼 해변이 있는 곳, <시티 오브 조이>와 <다즐링 주식회사>라는 영화에 나오듯 소박한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
아무리 내가 부적절한 선택을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몹쓸 성정을 가졌다고 해도 만약 친구가 캐나다나 미국쯤을 다녀온다고 했으면 그렇게 단박에 따라가겠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인도라는 나라의 아우라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쉬고 싶다. 떠나고 싶다. 돌아오고 싶지 않다.
아니, 나도 좀 깨닫고 싶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지극히 청소년스러운(아니 어린애스러운) 마음으로 인도 행을 결정했다.
아루나찰라 가는 길에 계속 따라오던 검은 개. 이 검은 개의 영도 아래 아루나찰라 산을 올랐다.
첫댓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점님 글을 참 잘 쓰네요. 흥미 진진 하게 읽고 있습니다. 여행은 나를 한층 성숙 시켜 주지요. 그래서 자주 다니고 싶은가 봅니다.
고맙습니다. 읽어주셔서. 미르님도, 파라솔님도. 근데, 왜 저는 그렇게 여행을 다녀도 별로 성숙해지지 않을까요? 미스테리입니다.. 하하.
글이 맛있어요^^ 술술 읽히네요.